그는 숙소에서 79명과 함께 생활하였다고 한다. ‘다다미’만 깔아놓은 숙소에서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 당했다.
“머리 하나는 저기 두고 하나는 여기 두고 발만 이렇게 맞춰가지고(머리는 반대편에 두고 발만 마주보게 눕도록)…. 그런데 이가 들끓어서 옷도 못 입고 발가벗고 자요. 79명이 쭉 ‘다다미’를 깔아 놓고서.”
방 안에는 조선인 노무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밤새도록 지키는 사람이 있었으며, 도망가다 잡히면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를 당했다.
“밤새 지키는 사람이 조선 사람이었는데, 만약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그 사람은 욕을 보는 기라. 그러니 밤에 내빼지 못하도록 알뜰히 지켜야지. 그래 우리 동네 사람 고 밑에 사람도 내캉 같이 간 사람이 있는데, 밤에 같이 누워 자다가 나보고 내빼자 카는기라. 어느 날 하루 저녁 자고 나니까 그 사람이 없어졌는데 나중에 보니 화장실 분뇨통에 들어가 빠져가지고 그래가지고 나갔지. 그렇게 해 도망갔는데 사흘 만에 잡혀왔어. 그리곤 삽으로 두드려 패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죽고 싶어도 목을 맬게 있나 칼이 있나. 요새 유치장 가는 도둑들은 호강이요 호강.”
다코베야에 수용되었던 조선인 노무자들의 식사 양과 질은 형편없었다. 박시영은 개들도 우리 먹는 건 안 뺏어 먹으려 한다고까지 묘사하였다. 또한 식사를 할 때는 서서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밥쟁이가 조선사람인데 ‘오야가타’라고 했어. 징용 들어오는 거 나가는 거, 밥 한 끼에 얼마 하는 거 그거 계산 하는게 밥쟁이라 해. 밥하는 사람들이 ‘벤또’를 해가지고 오는데 밥이 냄새가 심한기라. 뭐 배고픈데 안 먹을 수는 없는 거고, 반찬은 한가지인데 걔들도 마 우리들 건 뺏어 안 먹을려고 해, 그 또 일하고 들어가면서 문 앞에 번호 딱 불여가지고 들어가면 서서 밥 먹고. 밥도 작지만은 얼른 먹고 치워야니께 서서 먹는 거야.”
토목작업장에 동원된 노무자들은 일정 작업이 완성되거나, 인력수급 등의 상황에 따라 다른 곳으로 배치되어 일하는 경향이 있었다. 박시영 또한 히가시카와 유수지 건설공사에 1년 정도 동원된 후 네무로 비행장으로 이동되어 노동을 강요당하였다.
“네무로라고 그리 또 한달 간기라. 거기서 비행기장(활주로)을 닦는데, 높은 데는 고르고 낮은데는 흙을 갖다 채우는 일을 한기라. 79명이 전부 갔는데 거기 가서 인제 허리를 맞았어.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데…. 당시에 병원에 보내줘야 가지. 지금도 침 맞고 이래 지내지. 내가 거기 가 있었던게 28달 반이요. 고생한 얘기는 밤새도 못합니다. 그때 내 허리 맞아가지고 지금 병신 되가지고 어떻게 댕긴지도 몰라요.”
박시영은 해방되고도 열흘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혹독한 노동의 댓가라며 준 단돈 100원을 받아들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감옥살이 하는 사람들은 호강하는거라는 박시영의 말에서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되고 67년이 지난 지금, 강제동원 피해자 및 희생자들이 나라를 잃고 겪어내야 했던 가혹한 세월들을 그 누구도 다 헤아리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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