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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21
마태복음 25장 31-33절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으로 부활과 승천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내용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유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처럼 우편이란 개념 자체가 없지만 비유적인 의미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권능과 영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라고 할 때 신성의 측면에서는 권능과 영광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은 각 위격에 따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실 때 그의 신성을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셨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내용은 감추어졌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에만 제한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승천 이전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시고 난 뒤 높아지신 신분 안에서 받으신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으로부터 권능과 영광을 받으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되, 특별히 교회의 머리로 나타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권능과 영광을 받아 그의 몸 된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스리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으로 다스리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의 다스림 아래 두 가지 유익을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그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은사들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채우시고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막으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 마지막 부분인 재림과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다시금 내려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2문입니다.
52문. 그리스도께서 “그리로부터 오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은 그대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답. 온갖 슬픔과 박해 중에서도, 전에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셨고, 그리하여 내게서 모든 저주를 제거하신 바로 그분께서 하늘로부터 심판자로서 임하시기를 머리를 들어 기다립니다(눅21:28, 롬8:22-25, 빌3:20-21, 살전4:16, 딛2:13-14). 그는 그와 나의 모든 원수들을 영원한 정죄에로 던지실 것이며(살후1:6-110, 마25:41-42), 그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자들과 함께 나를 그에게로 취하여 가사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마25:34, 살전4:16-17, 살후1:7).
우선 ‘그리로부터’ 오신다고 할 때 그곳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곳, 천국 혹은 낙원이라고 말하는 그곳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고 할 때 천국 혹은 낙원에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나타내는 보좌가 있을 것인데, 거기로부터 다시금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것입니다. 내려와서 무엇을 하시는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때가 세상의 종말이요, 마지막 심판 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3장 3절과 4절에 보면 이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일단 ‘말세’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히브리서 1장 2절에 근거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가 말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런데 말세에 어떤 자들이 나타나는가?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에 대한 조롱인가? 큰 틀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조롱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조롱합니다. 그럼 왜 그들이 이렇게 말하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처럼 하늘에서 다시금 내려오실 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입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4장 30절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시며,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에서는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 것처럼 재림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조롱하는 어떤 자들의 말처럼 오랜 시간 동안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지 않는 게 아니라, 또한 성취하지 못하시는 게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 창조부터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작정하셨다면 작정 하신 그대로 실행이 될 것입니다. 더딘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더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는 조금 전에 살펴본 베드로후서 3장 3절과 4절 이후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우리가 보기에는 더딘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더딘 것처럼 보이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습니다. 왜 오래 참으시는가? 성경 표현 그대로 빌려오자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빠짐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 성경을 통해 보자면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 그들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즉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의 수 전체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심판 받아 마땅한 세상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다가 택자의 수가 차면, 더 이상 믿어야 택자가 없게 되면 그때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는 그때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36절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천사들만이 아니라 아들조차 모른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때 아들조차 모른다는 것은 신성을 따라서 한 말이 아니라 인성을 따라 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성을 따라서는 모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성을 따라 모를 수 없다는 것은 신성과 인성의 교류 안에서 볼 때 인성 역시 모른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만큼 하나님 외에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워지면 여러 가지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 제자들이 이 부분과 관련해서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게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4-14) 이러한 징조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경종(警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종(警鐘)으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마태복음 24장 42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장으로 넘어가면 동일하게 말씀하시는데, 13절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으라는 것은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내용을 근거로 하자면 단지 이 세상 삶을 위해서만 살아가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깨어 있으라는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재림 후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인데, 마지막 심판과 관련해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 3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리고 34절부터 46절까지가 양은 어떤 자들인지, 그리고 염소는 어떤 자들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양으로 비유되는 자들에 대해서는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 즉 천국 혹은 낙원 혹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곳입니다. 왜 임금께서는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하신느가? 그 이유를 35절과 36절에서 설명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쉽게 말해 너희가 내게 행한 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런 말씀을 행위 구원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기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결코 내 행위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하지만 한 구절만 언급하자면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럼 왜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는 데 있어 마치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말씀하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할 때 깨어 있는 삶의 한 면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37절 이하 39절에 보면 오른 편에 있던 자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께 이런 일을 행하였는지 묻게 되는데, 여기에 대한 답을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치 골로새서 3장 23절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즉 깨어 있는 삶이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비록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주의 말씀에 따라 주께 하듯 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염소로 비유되는 자들에 대해서는 41절 이하 45절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양으로 비유되는 자들과 비교해 보면 정확하게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특히 44절 그들의 말을 보면 마치 주님께 무엇인가를 한 것처럼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가시적 교회 안에서 주를 섬기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를 섬기기 때문에 주를 위하여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주 앞에서는 외식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율법의 첫 번째 돌판에 대한 진실성은 율법의 두 번째 돌판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임금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정리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자기 백성을 위해 이 땅에서 사시면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되 특별히 우리를, 주의 몸 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무엇으로 다스리느냐?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다스리십니다.
이렇게 주의 다스림 아래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참된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있는 자요, 주께서 오실 것을 기다리면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열매가 없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성령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들은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사랑을 증거 할 만한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도 없이, 혹 소망이 있다 하더라도 참된 믿음이 아닌 이상 참된 소망이 아닌 거짓된 소망만 붙들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 46절 말씀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벌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의하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비교되는 지옥이요(막9:47), 마가복음 9장 48절에 의하면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른 편에 있는 자들, 양으로 비유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 46절에 보면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하심으로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에 대하여 의인이라고 칭할 때 의인이라 칭하는 이유가 35절, 36절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만약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의인이라 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앞에서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 행위 구원의 논리만 확증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의가 우리의 행위,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지만 누구를 믿는 믿음인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금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는 의인이라 칭해지는 너희가 참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인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의 말씀처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경 기록에 따르면 구름을 타고 오시되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물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본다고 할 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을 예로 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태양을 볼 수 있다면 우리 반대편에 있는 곳에는 태양을 볼 수 없는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는 누구도 그의 재림을 보지 못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은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볼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5장 31절을 다시 보시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물론 우리는 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이 어떠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광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광인 것은 분명합니다. 소위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놀라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가 영광스럽게 오실 때 그가 창조주요 또한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실 때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오지도 않았고, 영광스러운 모습도 사실은 감추셨지만 예수님께서 다시금 오실 때는 그 모든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지만, 그 모든 일이 갑자기 이루어질 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일어난 일임도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4장 4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도 보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 “그리로부터 오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주는지를 묻는데, 먼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온갖 슬픔과 박해 중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로마서 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17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선 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고난으로 말미암아 슬픔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9절 이하 22절도 보시면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성 없는 피조물조차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을 받기까지 피조물들도 우리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영광을 받기까지의 모든 삶은 슬픔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생에 대하여 시편 90편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90:10)라고 말씀합니다.
슬픔만 있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뜻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박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6절에 보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주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 때 개혁파를 따른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에도 이런 박해들이 있었고, 그 이후 계속해서 박해들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박해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갖 슬픔과 박해 중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드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2-3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에 본래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가 제거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해서 우리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에 대하여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처럼 머리를 들어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 그리고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영원한 정죄에로 던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원수요 교회의 원수가 우리를 박해하고 또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저들이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오실 것을 머리 들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택하심을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러 가신다는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영광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그가 재림하시고 난 뒤 주어질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림을 누구보다 고대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온갖 슬픔과 박해로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는 기쁨과 영광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고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사도 요한은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즉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만을 기다리는 자로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다만 앞에서 살핀 것처럼 잠자는 자처럼 있어서는 안 되고 깨어 있는 삶,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사는 삶으로 주를 기다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