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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목자 예수님의 양으로 사는 법>의 줄거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목자이신 것은 아닙니다. 사자나 곰 같고, 사슴이나 토끼 같은 사람에게 목자는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양으로 느낄 수 있도록 실제로 양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찾아 나서는 대신에 예수님의 양이 되십시다.
목자 예수님의 양으로 사는 법
(마가복음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목자 예수님의 양으로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목자 예수님의 양으로 사는 법’
본문은 오병이어 기적에 앞서 등장한 사건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전도 여행을 마친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병자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천국을 전파한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제자들이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먹고 쉬게 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한적한 곳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레모스(ἔρημος)는 광야를 뜻합니다. 35절에서는 광야가 빈 들로 표현되었습니다. 빈 들이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광야는 외롭고 적막한 곳이고 인간의 삶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광야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며 쉼을 얻고 재충전하기를 지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정한 휴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광야가 사람이 없어서 쉬기에 합당한 곳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사명을 수행하다 지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쉼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를 지시하신 이유는 예수님께 집중하기에 유리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마을이나 성읍과 같이 인간사회가 존재하고 생활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세상을 향할 수 있었기에 예수님께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가치가 전무한 광야는 예수님께 집중하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생기는 관심을 끊을 수 있는 광야와 같은 장소가 필요합니다. 광야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설 수 없는 장소입니다. 광야에서는 아무리 동서남북으로 분주히 돌아다녀보아도 삶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삶의 문제는 접어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이사야서 40장 29~31절을 보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쉼의 포인트는 여호와를 앙망함입니다. 결코 삶의 문제의 해결을 앙망하지 않습니다. 삶의 문제에 휘둘리는 동안에는 진정한 쉼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가 끝나버린 광야에서 여호와께 집중할 때에 진정한 쉼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군중들이 도보로 예수님이 가시려는 곳으로 몰려와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간절함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모른척하실 수 없었습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꼴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먹지 못한다는 것은 곧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마음이 만족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마음이 굶주린 자들에게 천국과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심으로써 마음을 배부르게 해주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다는 표현이 오늘의 주제가 됩니다. 양에게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앞서 목자가 시급합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찾는 것은 양이 아닌 목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있는 양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필요성을 직접 느낄 필요조차 없습니다. 양에게 있어서 최적의 환경은 참되고 능력 있는 목자입니다. 설령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양의 생존을 책임지는 것은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양에게 있어서 삶은 목자의 문제이지 양이 관련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엄마의 품이 전부입니다. 집이 부자인지 가난한지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이처럼 양들에게는 목자가 전부입니다.
이 사건 뒤에 나타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참 목자이심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환경이 되심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양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푸른 초장을 찾고 쉴만한 물가를 찾고자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는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유복한 삶의 환경을 통해 기쁘고 만족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렇게 양의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실 수가 없으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되어주실 수 없습니다.
목자를 유일한 환경으로 생각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있습니다. 목자 있는 양은 결코 스스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따를 뿐입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많이 배웠든 그렇지 못하든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든 높은 위치에 있든 그것은 여러분의 환경이 아닙니다. 심지어 가정이나 출석하는 예배당조차도 환경이 아닙니다. 몸이 어느 곳에 있든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환경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던 중에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시간이 되어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원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먹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더군다나 군중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에 의해 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36절에서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촌과 마을이란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된 장소입니다. 반면 이들이 있었던 빈 들은 삶을 위한 어떠한 환경적 조건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빈들이기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이상 때를 거를 수는 없었기에 제자들은 삶의 조건이 존재하는 촌과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빈들에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 개의 입장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의 입장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촌과 마을로 흩어 보내서 스스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게 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각자 먹는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빈들에 모여 있던 군중들의 입장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이들은 한심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자고 이렇게 오랜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다고는 하나 참여가 강요되는 자리도 아니었고 격식 있는 자리도 아니었기에 때가 되면 알아서들 떠날 수 있었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 모인 큰 모임이니만큼 볼일을 보러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리를 벗어난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보면 한 아이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도 배가 고팠을 텐데 이 음식을 해가 저물도록 먹지도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빈들에서 참 신비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남자든 여자든 아이들마저도 때를 잊을 만큼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었고 그 가르침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녁때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리를 벗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께 집중하는 동안 삶에 대한 관심은 끊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나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이기를 자처하시며 먼저 이들의 마음의 배를 불리셨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배를 불리시는 일까지도 책임지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목자로써 우리의 삶을 어떻게 책임지시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목자로 하는 양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하는 양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마음은 빈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빈들 즉 광야는 인간의 삶을 위한 조건이 전무한 곳입니다. 삶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빈들에 모인 군중들은 강제로 모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알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기적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 집중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며 때를 잊을 지경이 되었던 이유는 삶에서 지쳤던 마음이 휴식을 취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삶을 살아갑니다. 다만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온전히 채울 거리는 발견할 수 없으며 채워지지 않는 일을 반복하니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받자 마음이 채워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빈들에서 진정한 휴식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질 때에 휴식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의 쉼을 얻은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시는 목자로 나서십니다.
우리는 삶을 위해 열심히 뜁니다. 제자들이 했던 제안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촌과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동분서주하는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목자로 모실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문제에 관여하시는 목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마음이 양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먼저 마음은 삶의 문제가 끝나는 광야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광야에 들어간 마음으로 예수님께 집중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배부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진정한 쉼을 얻은 마음이 양이 된 상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여호와를 앙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멋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도달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집중해서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마음은 채워지게 되고 쉼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목자로 따르는 양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쉼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삶의 문제 또한 해결해나가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7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리라는 말씀입니다. 목자 없는 양 같았던 군중들을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배불리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마음에서는 배고픔도 잊을 정도로 온전한 휴식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휴식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목자가 되셔서 육체의 배고픔까지 책임지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오병이어 기적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양은 마음에서 삶의 문제가 끊어진 자들입니다. 광야에서는 스스로의 삶의 문제에 대해 관여할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마치 양이 스스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찾지 않고 오직 목자의 음성에만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삶의 문제가 끝나는 광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십자가 사건은 지나간 일이었으나 밝히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나의 환경으로 바라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뜻하는 바는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집중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버지로 마음이 채워질 때에 만족이 없고 피곤하고 지치기만 했던 삶에 휴식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안식과 평강을 유지시켜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역사는 다른 이들에게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 되시고 예수님의 양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해 예수님이 나의 목자 되시고 나는 예수님의 양이 되는 일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빈들에 모인 군중들에게서 일어난 기적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빈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음을 인정한다면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부활과 승천에도 연합하게 됩니다. 나의 인격이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실린 나의 인격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채워져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참 휴식을 얻을 것입니다. 이 쉼을 맛본 자만이 예수님의 양입니다.
삶이 끊어지고 예수님께 집중함으로써 하나님으로 배부름을 경험하고 이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되셔서 마치 어린 아기를 돌보는 엄마의 손길처럼 우리의 삶을 돌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누리는 안식이 깨어지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삶의 문제들을 책임지시며 이끌어 가시는 목자가 되시기를 자처하고 나서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전을 가져라, 꿈을 위해 대가를 치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환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일 수 없습니다. 오직 목자이신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만이 우리의 바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배불러서 쉼을 얻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꿈이고 비전이고 바람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자가 되셔서 삶을 움직여 나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목자이신 예수님을 확인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의 환경이 어떻든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을 빈들로 만들어 예수님께 집중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배부름을 얻어 쉼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에 나는 예수님의 양이 되고 예수님은 나의 목자 되시는 이 신비롭고도 기적 같은 무한한 은총의 사건이 현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