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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9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0
설교 제목: 산 위에 있는 동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4~16
설교 목적:
이 설교에서 나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시온산에 있다. 그곳은 저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며(시 48장), 하늘의 예루살렘 도성이고(히 12:22~24),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다(마 5:14~16).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야곱이며 이스라엘이다. 시온의 빛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며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이다. 우리의 이런 위치와 신분을 깨닫고 복이 사방으로 흐르게 하는 물꼬를 열기를 기도하며 다짐하며 실천하는 우리가 될 것을 결심하는 설교를 해 보자.
설교 개요:
1. 네가 어디에 있느냐?
2. 너는 누구냐?
3.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
1. 네가 어디에 있느냐?
제가 청년 때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성경은 인생의 지도와 같고 나침반과 같다. 그래서 인생을 바르게 살려면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한다.’ 저는 그 이야기를 노트에 적고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설교자의 자리에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과연 성경은 인생의 지도와 나침반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방향을 발견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위치를 발견한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아는 것은 우리 인생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에게 그런 목표가 있기에 나는 지금의 고난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 진통제를 먹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없어도 고난을 견딜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습니다만,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의 위치가 지금 어디냐?’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 3:9)?’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그곳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계 2:13).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대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자신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앞임을 늘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그분의 돌보심을 받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성경구절들이 우리의 현재 위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며 또한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5장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위치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분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있는 자리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는데 그 이유는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등경 위에 두는 등불처럼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산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의 이웃이나 우리의 가족,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고 배우고 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위치라고 주님은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산 위에 있는 동네’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산 위에 있는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며 그들이 살던 산은 시온산입니다. 성경 시편을 보면 고라 자손은 이렇게 자신이 살던 산에 대하여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시편 48:1~2
고라 자손은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산인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시온산은 예루살렘이 있는 바로 그 산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집을 지으시고 그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온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터가 높고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온 세계가 즐거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그들이 이스라엘이며 그 도시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들이 아름답다는 말은 곧 그들이 사는 동네가 빛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향하여 복을 명하시고 그들을 빛나게 하셔서 온 세상에 비치게 하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시온을 향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사야 60:1~3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전에는 잘못하여 열방에게 시달리고 짓밟혔을지라도 이제 하나님이 다시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그들은 다시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일어나라는 격려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늘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신약성서에서도 교회에게 우리의 위치를 일깨워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특히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시온산이라고 알려주는 구절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이 본문은 우리 교단의 이름이 유래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서 12:22~24
우리 교단의 이름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라는 말이 나온 본문이 바로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모임’(πανήγυρις, panéguris, assembly)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하면 시온 산에 와 있으며, 그곳은 하늘의 도성인 예루살렘과 같습니다. 이 말은 지금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하시며 교회를 통하여 통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앞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 표어로 삼은 말씀,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는 선언은 바로 이런 의미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분이며 동시에 우리의 위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시고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산 위에 있는 동네이며 터가 높고 아름다운 시온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므로 우리 교회는 곧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리로 부르신 이유는 이 높은 곳에서 온 세상의 모델이 되고 빛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빛나는 백성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고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의 빛나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2. 너는 누구냐?
그러면, 산 위에 있는 동네에 사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시온의 백성이며, 예루살렘의 시민입니다.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의 가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삶에 가득히 넘쳐날꺼야
너는 어떤 시련이 와도 능히 이겨낼 강한 팔이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와 언제나 함께하시니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나는 널 위해 기도하며 네 길을 축복할꺼야
너는 하나님의 선물 사랑스런 하나님의 열매
주의 품에 꽃 피운 나무가 되어줘
이 찬양은 사실 요셉의 축복입니다. 야곱이 죽을 때 그 아들들에게 축복했는데 그 중에 요셉에게는 무성한 나무처럼 자라서 그 가지가 담을 넘을 정도로 번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창 49:22).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렇게 축복해 주신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때 눈이 먼 아버지 이삭은 아들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너는 누구냐?’(창 27:32)
아버지에게 축복기도를 받은 야곱은 그 이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몸에 새기고 마음에 간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장차 시온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즉, 산 위의 동네에서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도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아브라함의 복은 이삭에게 전달되었고, 이삭은 그 복을 야곱에게 전달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받은 그 복을 아들들에게 축복기도의 형태로 전달했으며 그것이 요셉에게는 담을 넘는 가지처럼 무성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이렇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복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받을 복은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시온에 베풀어 주시는 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 위에 있는 동네로 부름받은 교회의 사명이며 본질입니다.
지난 주에 저는 교회가 한 다발의 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빛나게 하며 그 빛나는 얼굴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하는 꽃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교회가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본래 에덴동산이며, 시온산이며, 예루살렘성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복은 사방으로 흘러갔습니다.
그 에덴의 물줄기처럼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헌신과 교회의 일꾼들의 희생을 통해서 더욱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초기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로마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책,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 1996)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부흥은 잘 정리된 교리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헌신적인 사랑과 섬김 때문이라고 연구 결과를 발표합니다.
교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도 필요하고 성도들의 진실한 기도도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행 2:42). 물건을 나누고 베푸는 교회를 보고 이웃이 칭송했습니다. 교회는 말씀 전파와 함께 사랑과 나눔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 동네는 밝은 빛을 비추고 거룩한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산 위에 있는 동네에서는 사랑과 자비의 물결이 흘러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며 그 복에 동참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이며, 시온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물꼬를 열어 세상에 복이 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의 섬김과 나눔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복은 이 세상에 점점 확산될 것입니다.
3.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제 세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깨닫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면서 깨닫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인생이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줍니다. 사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사도행전 22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다메섹으로 들어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아나니아를 만났고 그에게 기도를 받았으며 교회로 인도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사실 이런 전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한 때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여러 번 우리의 길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시작된 변화였습니다. 배나 비행기가 항해를 할 때 조종사나 항해사가 그 배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변침(變針)이라고 합니다. 변침은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도 인생의 항해에서 변침을 하면서 오늘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침은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도의 길입니다. 도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의 길은 조금씩 바른 길을 향하여 변화됩니다.
오늘 저는 우리들과 우리의 교회가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올라오는 예배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높은 산에서부터 물이 흘러 골짜기를 적시며 들판을 풍요롭게 하는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사방으로 흘러 온 세상을 비옥하게 하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동시에 이 세상에 복이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저 북방에 있는 높은 산 시온에 올라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복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사랑을 나눔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며, 복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잘 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따르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기 욕심이나 부끄러움을 넘어서 이웃을 배려하고 복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그러지고 구부러진 것을 바르게 펼 수 있도록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동안 필리핀 임마누엘교회를 돕기 위하여 물질을 모았습니다. 이제 우리 이웃에 사는 이들을 돕는 일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성동구청 복지정책과는 우리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하여 가정의 달 이웃사랑 생활용품 나눔 행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5월 한달 동안 진행되는 이 행사에서 우리는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모아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식표품은 라면, 통조림, 즉석밥 등 가공식품이며, 생필품은 치약, 샴푸, 세제, 휴지 등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장에서 구매할 때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서 추가로 구매하여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 해야 할 가장 첫번째 일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점점 시온의 백성으로 나누고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산 위의 동네인 이유입니다. 이 일로부터 오랫동안 닫혀 있던 우리 교회 사랑의 물꼬가 터지고 넘치기를 기대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