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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문화사(23)-파주(坡州)
경기도 서북단에 자리하고 있는 파주는 서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하구에 접하고 있으며, 이곳을 관통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는 임진강을 품고 있는 북쪽 면은 DMZ와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곳이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면 신라가 이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임진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자료에 따르면 파주 지역의 지명은 고구려의 것부터 남아 있는데, 이두와 한자로 표기된 땅이름이 함께 전하고 있다. 그런데 파주 지역 옛 이름은 좀 복잡해서 그 뜻을 일률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지금은 파주가 교하, 파평, 금촌 등을 모두 아우르고 있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교하가 나머지 지역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 셋은 서로 다른 지역으로 인식되어 각각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지역이 파주로 합쳐지다 보니 기록상 자료와 파주라는 지역에 대한 지금의 인식에 약간의 혼동이 올 수밖에 없다.
고구려 시대에는 파평면 지역, 파주읍 지역, 교하(금촌, 탄천면 지역 포함) 지역이 따로 나누어져 있어서 각각 고유한 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파평면 지역은 파해평사(坡害平史), 파주읍 지역은 술이홀(述尔忽), 교하(금촌, 탄천면) 지역은 천정구(泉井口) 등으로 불렸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파평현, 봉성현, 교하군으로 되었고, 고려 시대에는 봉성(峯城)을 서원(西原)으로 바꾸고 교하군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1393년에는 ‘서원’과 ‘파평’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원평군으로 통합했다가 태종 때에 원평도호부로 승격시켰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교하군은 따로 존재했다. 세조 때인 1460년에 원평도호부를 없애고 파주목으로 통합했는데, 이때에도 교하현은 그대로 존속시켰다. 그러다가 숙종 시대인 1687년에 파주목이 교하현을 다시 통합하게 된다. 영조 시대에는 또 잠시 나누어졌다가 조선 말기에 파주로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파주라는 땅이름에 대해서는 세 지역으로 나누어서 고찰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교하(交河)는 파주시에 속해 있는 곳이면서 아주 작은 동네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주변의 여러 현(縣)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교하군(交河郡)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고구려 지명으로는 천정구(泉井口), 혹은 굴화군(屈火郡)이라고 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교하군으로 바꾸어서 그 뒤로 이 지명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교하에 대해서는 고구려 시대의 땅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천정구를 보자. ‘泉(샘 천)’은 바위틈 같은 작은 구멍에서 물이 솟아나거나 흘러나오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자(象形字)이다. 샘물은 흘러서 내, 천, 강 등을 이루면서 바다로 흘러가므로 이 글자는 ‘川(내 천)’, 江(큰물 강) 등의 뜻으로 확대되었다. ‘井(우물 정)’은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땅을 깊게 판 구멍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이 우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동네, 고을, 마을, 시장 등으로 뜻을 가지게 되었다. ‘口(입 구)’는 안과 밖을 이어주는 것을 지칭하는데, 사람이나 동물의 입, 혹은 부리를 본떠서 만든 글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 현상에서 튀어나온 끝, 꼭대기, 머리, 들머리, 들고나는 곳, 그런 공간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천정구’는 ‘강 옆의 높은 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굴화’에서 ‘屈(굽을 굴)’은 꼬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나중에 굽은, 굴복 등의 뜻으로 확장되었지만 불룩하게 튀어나와 솟은 곳을 지칭하는 것이 기본적인 뜻이다. ‘火(불 화)’는 펀펀한 벌판을 나타내기 위한 이두 표기로 ‘벌’, ‘공간’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다. 그러므로 ‘굴화’는 높고 평평한 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우리말 땅이름이 가진 뜻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한자로 바꾼 교하(交河)는 ‘물이 만나는 곳의 땅’이라는 뜻이 되어 앞의 땅이름들과 연결된다. 이 지역은 한강과 임진강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파주읍 부근이면서 신라 때는 봉성현(峯城縣)으로, 고려 시대에는 서원군(瑞原郡)으로 불렸던 지역의 고구려 이름은 술이홀(述尒忽)이었다. 이것은 우리말을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어서 표기한 이두(吏讀)이다. 이 표현은 ‘述尒’+‘忽’의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둘로 나누어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述(펼 술)’은 ‘辶(辵-갈 착)’과 ‘朮(차조 술)’이 합쳐진 글자이다. ‘朮’은 식물의 열매가 매달려있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꼭대기’를 나타낸다. ‘辵’은 ‘가다’는 뜻을 가진 ‘彳(걸을 착)”과 ‘멈춘다’라는 뜻을 가진 ‘止(그칠 지)’가 결합한 것으로 ‘천천히 가다’는 의미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述’은 꼭대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는 뜻이 되어 불룩 튀어나온 언덕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尒’는 ‘此(이 차)’나 ‘其(그 기)와 같은 용도인데, 앞에서 말한 것을 지칭하는 관형사의 용법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述尒’는 높은 곳, 불룩 솟아오른 곳, 언덕 등의 뜻을 가지는 표현이 된다. ‘忽’은 ‘城’의 이두 표기로 높고 평평하여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술이홀’은 ‘언덕이 많은 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의하면 ‘술이홀’은 신라 경덕왕 때에 ‘峯城’으로 되었는데, 고구려의 지명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자로 바꾼 것이다. ‘峯(멧부리 봉)’은 평평한 땅보다 높이 솟아올라 튀어나온 것의 꼭대기라는 뜻을 기본으로 한다. ‘城’은 사람이 무기를 들고 지키는 곳의 안쪽으로 일정한 경계가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 글자는 지역, 혹은 공간을 나타내는 글자이기 때문에 ‘봉성’은 언덕, 혹은 봉우리가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술이홀’과 ‘봉성’은 우리말과 한자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파주읍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고려 시대에는 ‘瑞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원’은 파주읍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부분까지를 영역으로 했었다. 조선 시대까지는 교하현이 존재했는데, 고려 시대부터 ‘서원’ 지역을 그 아래에 두었다. ‘瑞(상서로울 서)’는 ‘玉(구슬 옥)’과 ‘耑(양쪽 끝 단, 실마리 단)’이 좌우로 결합한 형태인데, 옥의 양 끝에는 아름답게 장식한 조각이 있어서 상서롭고 고귀하다는 뜻을 가진다. ‘玉’은 색깔이 있는 아름다운 돌로 만든 구슬 여러 개를 연결해 꿰어서 만든 보석으로 둥글거나 불룩한 모양 여러 개가 연이어 있는 모양을 지칭한다. 그래서 이 글자는 고귀함, 믿음, 미덕 등을 상징한다. ‘耑’은 ‘端(양쪽 끝 단)’의 원래 글자로 꼭대기, 끝, 실마리, 시작 등의 뜻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瑞’는 사물의 끝, 혹은 꼭대기 등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原’은 벌, 공간, 지역 등을 나타내는 글자이므로 ‘서원’은 ‘둥근 모양(언덕, 구릉)이 많은 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瑞原’은 ‘述尔忽’이나 ‘峯城’과 같은 의미가 된다.
고구려에서는 ‘파평’ 지역을 ‘坡害平史(파해평사)’라고 했는데, 한자 지명이기는 하지만 ‘술이홀’과 비슷한 뜻이다. ‘坡(고개 파)’는 ‘土(흙 토)’와 ‘皮(거죽 피)’가 좌우로 결합한 구조로 흙과 깊은 관련이 있다. ‘土’의 아랫부분은 평평한 땅이고 윗부분은 흙덩이나 흙더미를 나타내는데, 평평한 곳 위에 여러 가지 퇴적물과 모래 같은 것들이 섞여서 쌓여 있는 것이 땅이라고 보아 이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이다. ‘皮’는 동물의 가죽을 손으로 벗기는 행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회의자(會意字)이다. 글자의 위와 왼쪽 옆 부분은 동물의 머리 모양을 나타내고, 아래의 ‘又(오른손 우)’는 손을 나타내기 때문에 가죽을 벗긴다는 뜻을 기본으로 했다. 그러다가 점차 가죽, 표면, 겉, 껍데기, 위 등으로 그 뜻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坡’는 땅의 거죽, 혹은 표면을 나타내게 되면서 평지에 불룩 솟아오른 언덕, 혹은 고개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坡’는 물가(水邊)라는 뜻을 가진 ‘泮’과도 통해서 쓰므로 ‘물가 높은 곳’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害(해칠 해)’는 ‘宀(집 면)’, ‘口(입 구)’ ‘丯(풀 어지러울 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형성자(形聲字)로 집 안에서 사람들이 어지럽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공격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해치다, 방해하다, 해롭다, 시기하다, 재앙 등의 뜻을 가지는 글자로 발전했다. 후대로 오면서는 맹렬하다, 왕성하다, 많다 등의 뜻으로 확대되었다. 고구려의 지명에서 쓰인 이 글자는 ‘많다’, ‘왕성하다’ 등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坡害’는 ‘물가이면서 언덕이 많다’라는 뜻이 된다.
회의자(會意字)인 ‘平(평평할 평)’은 사람의 말이 부드럽고 편안하다, 혹은 악기의 소리가 부드럽고 화평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였는데, 높고 낮음이 없이 균일하게 소리 남을 나타내는 것에서 발전하여 툭 튀어나오거나 움푹 들어간 곳이 없이 펀펀한 땅을 나타내게 되었다. ‘史’는 ‘中(가운데 중)’과 ‘又(오른손 우)’가 합쳐진 글자인데, 일이나 사건 등을 손으로 기록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는 일은 바르고 공평무사해야 하므로 공정을 유지하면서 치우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中’을 넣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平史’는 고르고 펀펀한 공간, 혹은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되어 ‘물가이면서 언덕처럼 높고 평평한 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액봉(額蓬)’이라 한다고도 했는데, 이 말도 고개, 혹은 언덕과 같은 뜻이다. ‘액봉’은 이마를 맞대고, 혹은 얼굴을 맞대고 맞이한다는 뜻으로 고개의 양쪽에서 올라오면 얼굴, 혹은 머리를 맞대고 만나므로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신라 경덕왕이 ‘파평(坡平)’으로 고쳤다고도 나오는데, 이것은 ‘坡害平史’의 줄임말이다. 따라서 ‘파평’은 ‘높고 평평한 언덕 고을’이라는 뜻이 된다.
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지금의 파주 지역에 서원군(瑞原郡), 파평현(坡平縣), 교하현(交河縣) 등이 있었는데, 조선 세조 때에 파주목(坡州牧)으로 통합되면서 ‘술이홀’, ‘파해평사’, ‘봉성’, ‘파평’ 등으로 나누어 기록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이것 모두를 파주의 옛 지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의 파주 지역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현재의 이름으로 정착되었는데, ‘坡’를 ‘波(물가 언덕 파, 陂)’로 한 곳도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면서 언덕과 평야가 잘 어우러진 지역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파주’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물가 언덕 고을’이 될 것이다.

첫댓글
임진각 말로만 듣던 곳을 사진으로 볼 수 있도록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