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주석은 여러 차례 위기 속에서 당을 구하고 ㉡신중국을 세웠다. 그가 없었다면, 적어도 우리 중국 인민은 아직도 암흑 속에서 더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중략)… 그러나 그의 잘못은 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 ㉢ ) 당시 우리도 의욕이 너무 앞서, 과학적 법칙을 무시하며 단기간에 경제가 성장하기만을 바랐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 ㉢ ) 자체의 주요 책임은 여전히 그에게 있다. 당시 몇 개월의 시간을 거치며 그는 빨리 잘못들을 발견하고, 수정 의견을 제기해야 했지만, 수정은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1962년, 그는 이에 대해 자아 비판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교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문화대혁명이 폭발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부활을 피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는 중국의 실제 상황을 잘못 계산했다. 먼저 혁명의 대상이 잘못되어서, 소위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원래 혁명에 기여하고 실제 경험이 있었던 지도자와 간부를 탄압했고, 여기에는 류사오치 동지도 포함되었다. ㉠주석이 저지른 것은 정치적 잘못이었고, 이 잘못은 작지 않다. - 鄧小平文選 - |
<작성 방법> ◦밑줄 친 ㉠이 밑줄 친 ㉡을 이룬 원인을 쌍십협정 이후의 전쟁과 관련지어 서술할 것. ◦괄호 안의 ㉢ 시기에 공업 분야에서 증산에 주력했던 생산물을 쓸 것. ◦밑줄 친 ㉣의 발단이 되는 『문회보』 평론의 저자를 쓰고, 평론 대상인 역사극의 제목을 쓸 것. |
해설 :
∙ ㉡신중국, 공산당 승리 이유(쌍십협정 이후) : 토지개혁(5・4지시, 토지법대강)으로 농민의 지지 획득, 요심전투・회해전투・평진전투 등(질문이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 ㉢철강(철)
∙ ㉣문화대혁명 발단 문회보 저자 : 요문원
∙ 역사극 제목 : 해서파관
[2018 기출] 팽덕회, 해서파관, 4인방(사인방), 문화대혁명
[세상의 모든 역사 중국사 김종권 p.320∼321]
1) 중국공산당의 승리
① 국공 싸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일본군 점령지역 선점
② 소련의 내전에 대한 우려 → 「중소우호동맹조약」(1945.8.14.)
③ 「정부와 중공 대표의 회담기요」 발표, 쌍십협정 체결 (1945.10.10.)
㉮ 내전 중지
㉯ 정치협상회의 개최
㉰ 평화건국방안
㉱ 국민대회 소집문제 토의
④ 미국 트루먼 대통령 마샬 장군을 특사로 파견하여 국공 중재(1945.12.)
⑤ 정전협정(1946.1.) → 정전 실행 위한 조정 집행부 설치
⑥ 임표 지휘 공산군의 국민정부군 공격
⑦ 국민당 정부의 반공가결(1946.3.) → 정치협상 파기, 헌법초안 수정 반대
⑧ 공산당의 청산투쟁(친일 지주, 악질 지주 토지 몰수 및 처형) 및 감조감식
⑨ 「청산, 감조 및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 또는 5·4지시(1946.5.4.) → 해방구 내에서 지주적 토지소유제를 폐지하고 농민적 토지소유제 실현
⑩ 국공 내전의 전면화 이후 “耕者有其田”의 원칙에 입각해 토지혁명 실시 → 토지법 대강 시행(1947)
2) 국민당 정부의 패배요인
① 중요도시는 국민당 장악, 공산당군은 농촌 장악
② 공산당의 만주 접수, 일본군의 무기 획득
③ 국민당 정부의 친일 중국인 처벌, 일본군 장병은 보호
④ 국민당 정부군의 관료와 군대의 고령화, 기강 문란
⑤ 공산당 정풍운동, 기강 확립
⑥ 등소평의 화북지역 야전군 무한과 남경 진격
⑦ 요동 심양작전에서 임표의 동북야전군의 승리
⑧ 공산당 평진전투에서 북경과 천진 점령
▶국공 내전 중 삼대 전쟁
∙동북야전군의 요심전투(임표)
∙중원, 화동야전군의 회해전투(등소평)
∙동북, 화북야전군의 평진전투
[세상의 모든 역사 중국사 김종권 p.325]
② 대약진운동(1958.1)
㉮ 신중론자(반약진론) 비판
㉯ 대중적 기술혁신, 지방공업 건설, 대규모 수리시설
㉰ 공업: 철강 증산운동
㉱ 농업: 인민공사 추진
㉲ 팽덕회의 대약진운동 문제점 지적 → 우파 기회주의로 몰려 실각
㉳ 1959년 모택동의 대약진의 문제점 인정, 유소기에게 국가주석 이양
[세상의 모든 역사 중국사 김종권 p.326]
1)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중국공산당의 위기의식
① 모택동・임표・강청(약진파) ↔ 팽덕회・유소기・등소평・진운(주자파)
② 문화대혁명의 전조: 사회주의 교육 운동(사청운동)
③ 요문원이 『문회보』에 「해서파관을 새로 평하는 글」을 게재
④ 상해의 문혁파, 『해서파관』의 필자 오함 비판
㉮ 해서파관은 세종이 간언을 하는 해서를 파직시키는 것을 다룸
㉯ 요문원은 세종을 모택동, 해서를 팽덕회로 간주해 오함 비판
⑤ 해서파관 사건으로 실권파 일원 북경 시장 실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400∼403]
회담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10월 10일 「정부와 중공 대표의 회담기요」의 발표로 일단락되었다(쌍십협정). <400쪽>
양측이 회담에서 합의한 것은 내전을 피하고 정치협상회의를 열어 평화건국방안과 국민대회 소집문제를 토의하기로 한 원칙적인 것에 한정되었다. … <401쪽>
… …
종전 후 공산당 지배하에 있었던 농촌에서도 어려운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나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공산당은 2차 국공합작을 하면서 과거 소비에트 정부를 국민정부에 예속되는 지방정부 즉 변구로 격하시키면서, 동시에 소비에트지역에서의 토지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정책을 중지했다. 친일적인 지주 외에는 지주의 존재를 인정해 소작료와 고리대의 이율을 낮추는 감조감식 정책으로 완화했다. 감조감식 정도만으로도 농민들의 환영을 받아 농민을 항일전으로 동원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402쪽>
공산당은 종전 후 새로 얻게 된 농촌지역의 해방구에서도 감조감식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친일적인 지주, 악질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처형하는 청산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내전에 대비해 생산운동을 전개해 농업발전 농민생활 개선, 군대의 보급 확보 등을 도모했다. 1946년 5월 4일에는 「청산, 감조 및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5・4지시)를 내려 당시 각 해방구에서 농민들이 각양각색으로 토지혁명을 전개해 가고 있던 상황을 통일적으로 규제하고자 했다. <403쪽>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p.406]
1948년이 되면 양측의 형세가 뒤바뀌어 공산군이 승리를 거듭하며 해방구를 늘여갔으며 병력 차이도 줄어들었다. 내전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던 삼대전쟁이 치러졌고 공산군이 차례로 승리를 거두었다. 우선 임표의 동북야전군이 만주의 중심지역을 둘러싼 공방전인 요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가을에 금주와 장춘을 점령하는 등 만주 전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11월에는 등소평 등의 중원, 화동야전군이 회해전투에서 승리해 중원의 요충지인 서주를 점령했다. 동북, 화북야전군은 평진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1949년 1월에는 천진과 북평을 점령했다. 이렇게 공산군이 반격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국민정부가 내전 중에 급속도로 민심을 잃어 가고 있는 반면에 공산당은 농촌에서의 토지개혁으로 광범위한 농민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양사개론 p.717]
국・공 양군의 전세는 1947년 7월을 기하여 공산군측의 우세로 반전되었다. 즉, 임표가 지휘하는 동북야전군은 만주지역을 석권하면서 이듬해(1948) 4월에 길림・목단에 주둔하고 있던 47만의 국민당군을 요동심양 작전에서 괴멸시키고 전만주를 점령하였다. 여기에는 만주에 들어온 소련군의 원조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에 앞서 등소평이 지휘하는 화북지역 야전군은 대별산맥을 장악하여 무한과 남경에 진격하였다(1947.6). 팽덕회가 이끄는 8로군이 연안을 탈환하고(1948.1), 다시 등소평, 진의(陳毅) 등의 야전군은 서주를 중심으로 한 회해(淮海)작전에서 중원지방을 점령한 후 마침내 1949년 1월의 평진(平津)전투에서 북경과 천진을 공산군이 점령하여 화북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총통은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에 원조를 호소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연합국은 국민당을 도와줄 형편이 못되었다. 이에 장개석은 공산당에게 화의를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