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이 거의 부자간의 차이 정도 되는 것을 들어 해방이후 왜곡된 실상을 모를 수밖에 없는 항간의 악평이 있지만 6임 연원제도가 근간인 상제님 진리판이 포교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아신 태사부님은 포교대운만 전적으로 맡고 직접 교주직을 맡으라는 김종렬(후일 임술교 교주) 간부 등의 주장도 만류하고 바지사장인 교주직은 당시 청맹과니로 맹인인 60가까운 노회한 이상호로 하여금 용화동 본부를 맡아 단체의 중량감을 보이게 배려 합니다. 당시 20대의 젊은 총사수는 내가 교주가 되어 들어앉으면 각장 역동적으로 포교할 수 있는 본인이 더 이상 포교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지 않느냐고 하시며 교주자리를 마다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결국 김종렬 간부는 후일 임술교를 개창한 것이지만 이때 사실상 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젊은 총사수가 용화동 본부에 거처까지 마련해주며 신앙적인 자리마저 마련해준 노회한 맹인 이상호였습니다.
젊은 총사수는 무엇보다 조직관리보다는 외적인 포교에만 주력하는 중이었습니다. 보천교 시절부터 조선총독부 양해사건(일제하 보천교 공개화)을 기회삼아 그 인맥을 활용해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고 미륵불교 시절을 거치며 팔파연합회를 만들고 배신과 배사율을 밥먹듯 했던 노회한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해방이후 비록 끈 떨어진 갓 신세인 장님이 되었지만 아직 해도진인에의 꿈을 포기못한 그로서는 그 교활하고 간악한 심성이 전혀 변하질 않았으며 머릿속의 계략과 모책은 젊은 시절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중이었습니다. 밖으로만 나돈 20대의 젊은 총사수는 노련한 형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생각을 못한 채 간과하고 해방이후 개척한 2변 조직을 송두리째 강탈당합니다.
동생 이정립은 이러한 강탈 사실을 왜곡한 글을 써서 당대에는 시퍼렇게 눈뜨고 진실을 아는 사람이 많아 차마 공개는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그가 죽자 그 아들 이영옥이 장성해 그 왜곡된 유고집을 모아 <증산교사>를 발행하고 후일 이정립의 종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젊은 총사수의 연원계열 중학교 1학년 신도였던 홍범초는 후일 자라 <증산진법회> 교주로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석학들로 구성한 <증산사상연구회> 회장 자리에 있는 배용덕 회장을 몰아내고 자신이 회장이 되고자 끊임없이 괴롭히고 상제님에서 태모님으로 이어지는 종통을 부정하며 자신의 직계 연원의 뿌리인 태사부님을 부정하는 한편 해방이후 2변때 태사부님이 만든 대법사 증산교에 대해 적반하장으로 이상호가 만든 대법사 증산교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 주장하며 이상호를 배신하고 나간 인물로 날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성산 신도들을 초청한 공개석상에서 태모님 어진을 짓밟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범증산교사>를 통해 왜곡된 2변 교사를 담은 <증산교사>의 내용을 한 번 더 왜곡해 비틀어댑니다.
용화동 대법사를 지키고 앉아 중장년층을 흡수하는 역할을 해 줄 것으로 알고 젊은 총사수가 앉혔던 이상호는 젊은 총사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젊은 철부지 한 명이 어쩌다 상제님 판에 들어와 정력적으로 운좋게 단체를 개척해 대운을 마무리 할 운명인 자신에게 헌납한 정도로 밖에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정읍 시기리에서 만난 이후 거처까지 제공받고 비록 명분만 있는 얼굴마담이지만 호기좋은 젊은 총사수가 개척한 단체의 중심자리까지에 배치된 그는 초기에는 감읍하며 순한 양으로 행세하지만 기회가 오자 이 조직을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위해 일찍이 보천교 혁신운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동생 이정립을 통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조직을 야금야금 먹어가 마침내 조직전체를 장악하는 노회한 백전노장의 능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이상호는 한 술 더 떠 후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 근본부터 싹을 자르기 위해 당시 젊은 20대 총사수 안세찬을 끊임없이 청부살해하고자 박복만 같은 암살단을 끊임없이 파견하고 기회를 보며 탐색합니다. 한편 이정립은 자신을 장가까지 보내준 젊은 총사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왜곡된 자료를 쓰지만 실상을 아는 많은 신도들의 눈이 두려워 당대에는 차마 왜곡된 글을 공표하지는 못하고 해도진인이라는 허망한 꿈만 안은 채 이상호가 65년 사망하자 1967년 초 실망과 좌절감에 휩싸인 채 1년 반도 안 되는 사이에 형을 뒤따릅니다.
그 이후 이 왜곡된 글이 교사출신인 그 아들 이영옥에 의해 <증산교사>로 부활하고 증산교 대법사를 이상호가 창교했고 안세찬이 배신했다는 왜곡된 글은 이상호 이정립의 종통이 자신에게 승계되었다고 자칭하는 홍범초에게 <범증산교사>라는 책속에서 또 한 번 왜곡 전수됩니다. 이영옥은 증산교사 서문에서 부친이 타계하고 후일 안세찬 총사수가 배동찬 간부를 통해 인연맺어 결혼시켜준 모친 장옥으로부터 부친의 유고 원고들을 커다란 박스에서 발견해 넘겨받아 책으로 발행하게 된 것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홍범초는 용화동 대법사 증산교의 종령(교주)을 역임한 바 있는 황원택과 함께 안세찬 총사수의 연원계열이었지만 일체의 연원뿌리를 부정한 사람이며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태모 고수부님 탄압 전적(前跡)을 계승해 10년 천지공사를 보신 태모님의 유일 신권을 인정치 않아 용화동 통천궁에서 상제님 영정과 함께 모셔진 태모님 영정을 떼어내 짓밟아 버린 적 있는 파렴치한으로 자신이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종통을 이어 의통집행을 할 마지막 사명자로 인식해 이유없이 안운산 태사부님을 음으로 양으로 핍박하고 헐뜯게 됩니다.
사악함으로 가득찬 이상호에게 대법사 증산교의 종권을 강탈당한 안세찬 총사수는 당시 대국적으로 모든 것이 다 상제님 천지공사의 일환이란 것을 깨닫고 일체 이상호 이정립 형제에게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54년 신도들에게 20년간 말점도 도수를 선언하고 은퇴 후 20년 뒤 품안의 자식이 성장하자 74년 기두합니다. 차남 안택원은 서울대 재학중 군복무 중이고 안중건은 대전고 3, 안병섭은 대전고 2일 때입니다. 이들 3인이 각각 군복무중인 대학생, 고교생 신분인지라 태사부님은 가족 중 가장 먼저 사회인이 된 장남 안중선을 데리고 용화동을 찾은 바 있지만 황원택, 홍범초 등 옛 신도들은 평신도 신앙체계를 주장하며 교주인 종령을 2-3년제 선거로 뽑는 자신들의 교단은 과거의 연원체계가 아니므로 자신들 아래 다들 새로 입도하라고 주장하는 소리만 듣고 돌아옵니다.
과거 태사부님이 품안의 아이들 키우듯 교육시켜 신앙사회에서 성장한 그들로부터 연원체계를 일체 부정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인 태사부님에게 조차 재입도하라 하는 폭언만 듣고 돌아옵니다. 태사부님은 75년부터 77년까지 대전천의 구 중앙데파트 앞 제일은행 옆 상가건물 4층에 5평정도의 방을 얻어 칠판을 걸고 지인을 모아 고교를 갓 졸업한 대학1년생 4째 아들 안중건을 내세워 서너명 씩 지인을 불러 교리강좌를 열며 자식을 훈육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이때 홍범초는 무슨 일인지 태사부님에게 선생님을 모시고 싶다하며 러브콜 서신을 사택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태사부님은 일체 응하질 않고 있다가 자식 안중건을 데리고 다시 용화동을 찾아 가지만 마찬가지로 구 신도들로부터 육체적 영적 폭력만 재차 당하고 돌아옵니다. 태사부님이 기두하신 걸 알고 지금까지 홍범초가 초청장을 보내면서까지 모시지 못해 안달한 이유는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제스츄어에 불과했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 후 홍범초는 얼마안가 스스로 자신의 연원의 뿌리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위에서 러브콜을 보낸 것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태사부님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일체 사적으로 응하시지 않았습니다.
훈육기간 중을 포교의 기회로 생각해 전력을 기울이던 안중건은 자신의 노력만큼은 고사하고 아예 사람 하나 포교가 안 되자 집에 돌아와 자신의 불만과 엄청난 스트레스를 전 식구들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냅니다. 이같이 힘든 3년간의 준비과정-강의 수련이 끝나자 태사부님은 78년 대전에서 처음으로 성모여고 건너편 교보빌딩 위 200미터 구 MBC 앞에 정식 도장을 개창하게 되는데 이런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추수도수 사명에 있어 78년 처음으로 증산도 도장을 개창하는 영광을 가진 사람은 안중건이 아닌 장남 안중선입니다. 태사부님은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안중건을 후일 교리 강사로만 쓰기로 하여 잠시 뒤로 물리고 장남을 내세우셨는데 이 사이 안중건은 대전고 위 <청산독서실>에 살다시피 하며 역설적으로 경전이 없는 조직에 과도기적으로 사용할 교리서<증산도의 진리> 집필에 매달리는 시간적 여유를 다소 갖게 됩니다.
태사부님은 장남 안중선을 중심으로 새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중임을 맡은 안중선은 결혼 후 틈틈이 모은 자비를 들여 사무실을 얻어 추수 사명의 첫 증산도 신단을 꾸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고 모든 집기물도 자신의 혼수품 및 자신의 과거 사무실 집기로 채웁니다. 태사부님은 크게 신임한 장남이 첫 도장을 개창하자 크게 만족하고 장남에게 큰 포교대운을 맡겨 부산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장남은 기대에 맞는 실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돌아오게 되고 돌파구가 필요했던 태사부님은 장기적으로 5째 아들인 안병섭이 필요함을 느껴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설득작업을 하게 되고 또 한편 태사부님은 더 이상 눈앞에 당면한 대안이 없음을 알고 비로소 4남 안중건을 정식으로 교화원장에 임명합니다. 그러는 사이 80년 괴정동으로 도장을 신축해 옮기면서 그동안 판도 작고 할 일도 별로 없어 소극적으로 도와주는 역할 외엔 할 일 자체도 별로 없었던 관계로 묵묵히 관망만 하다가 바로 서울로 올라가곤 하던 5째 안병섭이 모친 장례식조차 참례치 못한 충격을 계기로 3월 초부터 대학가 새학기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어 증산도 도문은 본격적으로 제 궤도에 오르는 조건을 구비하게 됩니다.
태사부님은 방학 중 서울에서 귀가할 때마다 5남 안병섭을 꾸준히 설득한 보람이 있어 80년 봄 도모님이 선화하심을 계기로 안병섭은 본격적으로 <대순전경> 5판을 들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주요 대학과 전국 대학가를 누비며 증산도 천하사에 뛰어들게 되고 그동안 교리서 집필에 매달려온 안 중건 역시 공주 부여 구교인 20여명 신도에 불과한 도판 속에서도 <증산교의 진리: 미성사刊>를 81년 출간하면서 문왕의 도안(都安)세 살림 도수가 본격적으로 제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경만장 세 살림 도안도수는 법은 서울에서부터 펴 내린다는 말씀에 근거해 80년 안병섭이 서울을 중심으로 대학가를 공략하자 84년에 전국적인 55개 대학 서클에 공식적인 둥지를 틀면서 동대문구 지하철 1호선 휘경역 출입구에 위치한 소위 회기도장에서 80년 괴정동 본부도장을 마련한 후 4년여의 과도기를 거쳐 비로소 종단 <증산도>의 시대를 선포합니다. 종도사 안운산 태사부님을 중심으로 안중건(경전) 종정, 안병섭(원전) 부종정, 박재도 부종정 및 기획실장 정형권 제 1 재무원장(대전) 김순환, 제2 재무원장(서울) 김남용, 전국대학생 포교회 회장 안원전, 수석 부회장 노상균, 부회장 김한기 , 부회장 강형석 외 산하 전국대학생 회장단 홍보부장 남우진 등.... 6임 연원제로 강력하게 포교대운을 진두지휘한 안병섭의 포교대운을 못마땅하게 여긴 안중건은 사사건건 불만을 드러내고 시한부적인 동시에 독선적이고 오만한 마인드 때문에 결국 재정파탄과 안중건을 떠받친 중심 간부 정형권 실장과 그를 떠받친 윤혁중, 김정석, 권응선 등 국민은행 출신 3인 체제가 붕괴되어 떠나면서 그 끝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