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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행복함보다 돈 많음이 더 좋은 미신>의 줄거리:
행복함과 돈 많음 중에 고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십중팔구는 돈 많음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유는 첫째 행복함이라는 막연함보다는 돈 많음이라는 구체성이 더 내게 찬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돈이 많으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행복 자체보다 돈을 더 원하는 이유가 바로 미신 때문입니다.
행복함보다 돈 많음이 더 좋은 미신
(요한복음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행복함보다 돈 많음이 더 좋은 미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행복함보다 돈 많음이 더 좋은 미신”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행복함과 돈 30억 중에 어느 것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단, 이 질문에는 단서가 없습니다. 행복함을 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불행함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30억을 포기했기 때문에 앞으로 30억을 못 번다는 단서도 없습니다. 이런 조건을 제시한다면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돈 30억을 택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장 손에 들어올 30억을 포기하고 행복함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가 가리키는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질문에는 단서가 없습니다. 나중에라도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은 나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돈 30억에 대해서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무슨 수로 벌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돈 30억이 생기면 행복함에도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무일푼에 빚더미 신세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사치일 뿐이라 여겨집니다. 행복은 최소한의 재정적 상황이 받쳐줘야 가능하다는 것이 통념이기에 30억이 행복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돈 30억이 있으면 행복은 주어지기에 문제 자체가 틀렸다고 항변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세상적인 조건에 뒤따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따르자면 이것은 미신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어느 명절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유대인의 명절은 예루살렘에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안식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안식은 목마름이 발생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즉, 안식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행복함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3~4절에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고 설명을 합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묘사로부터 당시의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바닥에서 가스나 물이 때때로 분출되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천사가 와서 물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가면 어떤 병이나 장애도 다 나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일종의 민간요법이었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미신을 믿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이러한 미신을 신봉하는 병자들이 모여서 인간사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대원칙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조건 낫는다는 미신이었습니다. 미신을 원칙으로 삼아 인간사회가 구축됐고, 또 미신을 원칙으로 삼아 삶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볼 때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은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5~6절을 보면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는 분께서 어떻게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하실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38년 된 병자에게 할 수 있는 질문 중에서 제일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낫기를 열망하지 않았다면 베데스다 연못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신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시는 순간 38년간이나 병을 앓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병이 낫고 싶은 건지를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을 보면 학자들이 이 질문의 의도를 두고 고민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어떤 학자는 “38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낫기를 원하는 희망을 끈질기게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미 베데스다 연못에 와있던 시점에서 이러한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믿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심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시고자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신 이유는 38년 된 병자 속에서 참으로 기이한 심리상태를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38년간 병을 앓으며 베데스다 연못에 와 있었지만 정작 열망하던 것은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이 병자에게는 분명한 열망과 간절한 바람은 있었습니다.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베데스다 연못에 와 있는 걸 보면 낫고자 함은 분명한데 속에서는 전혀 그러한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불필요해 보이는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병자의 대답 또한 특이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에는 그저 “예!”라는 한 단어로 충분합니다. 만약 그러한 질문이 불만스러웠다면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이상하게 대답이 깁니다. 7절을 보면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으로부터 병자의 소원을 알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물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은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연못가에는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던 수많은 병자와 장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움직인다!”라는 외침이 들리면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연못물을 향해 달려갑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밟히고 밀치고 당기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식의 난장판과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장면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언제 왔는지는 알 수 없고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 한 번도 물속에 첫 번째로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소원이 바뀌게 됩니다. 처음에는 병이 낫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병이 낫든 안 낫든 베데스다 연못물에 첫 번째로 들어가는 것을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병이 낫는 것과 첫 번째로 들어가는 것을 묶어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그것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굳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낫는다는 것은 미신이지만 그곳에서는 통용되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원칙을 제외하고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셨고 이로부터 병자의 소원이 변해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의 원칙과는 상관없이 직접 병자를 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사람이 바랐던 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자기를 들어서 물에 넣어주셨으면 좋겠다는 간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를 인간세상의 축소판으로 삼아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어떤 상태로 살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요즘은 로스쿨을 나와야 판검사가 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사법고시에 합격만 하면 판검사가 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험이 1차 2차 3차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동창의 소개로 어떤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은 1차 시험에 일곱 번을 떨어진 경험자였습니다. 이분의 소원은 처음에는 판검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1차 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동안에 소원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판검사나 변호사가 안 돼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1차 시험에 합격해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유학을 왔는데 14~15년이 지나도록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지 못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유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박사논문이 잘 풀리지 않자 마음속 바람이 바뀌게 됩니다. 교수가 안 돼도 좋으니 논문만 끝내고 보자는 것이 바람이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이 사람도 처음에는 병이 낫기를 바라며 베데스다 연못에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움직일 때 처음으로 들어간 사람은 낫는다는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첫 번째로 들어가기를 매번 실패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사회에서 성공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첫 번째로 들어가는 것이 성공입니다. 모든 사람이 병 낫기를 바라서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원과 바람은 바뀌게 됩니다. 그렇기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간단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첫 번째로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사회에 통용되던 원칙과는 상관없이 직접 병을 낫게 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이 직접 주시려는 치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을 인간사회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행복함보다 돈 많음이 더 좋은 미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돈이 많기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에 채워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은 채워짐을 바라며 목마름이 발생합니다. 채워짐이 없는 상태는 곧 안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을 위하여 세상의 가치들을 원합니다. 돈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돈을 벌고자 합니다. 그런데 돈을 벌려다 보니 문제가 생깁니다. 돈이 마음대로 벌리지 않습니다. 낫고자 베데스다 연못에 왔지만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마음에서 물에 들어가는 것이 낫는 것을 대체해버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돈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안 벌리니까 왜 돈을 벌려고 했는지는 잊어버린 채 돈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음이 행복해지는 안식을 갖기 원하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 채 “예수님, 제가 돈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에 “주여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근본적 이유는 마음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지만 원하는 만큼 돈이 벌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마음을 채워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어보신다면 “예!”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38년 된 병자와 같이 “예수님, 제가 돈이 없습니다. 아무리 벌려고 해도 돈이 안 벌립니다.”라는 답변을 합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다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배우자가 문제입니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 건강이 문제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들은 모두 예수님의 질문에서 벗어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주기를 바라느냐? 그래서 네 마음이 행복함을 느끼기를 바라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러한 질문에 “돈이 없어서, 건강이 없어서, 집이 작아서, 자녀가 형통치 못해서, 외모가 부족해서”라는 대답은 모두 초점이 어긋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조건과는 상관없는 마음의 채워짐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이 온전히 채워지는 안식을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안식을 바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간구하는 이유는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정작 세상의 과녁들로 마음을 채우기를 바라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려고 합니다. 돈을 벌면 공허함이 채워져서 안식이 주어지리라 믿습니다. 안식이 없는 병적인 상태가 안식의 상태로 치료가 될 것을 바라지만 이것은 미신일 뿐입니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합격하면 기쁘고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은 미신입니다.
본래 인간의 행복함 곧 안식은 하나님만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 행복함은 세상의 어떤 조건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습니다. 자동차와 냉장고가 서로 독립된 물체인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서 행복은 세상의 어떤 조건과도 연결되거나 속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가의 사람들이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원칙에 묶였던 것처럼 우리는 마음의 행복함을 세상의 가치로 채울 수 있다는 미신적 원칙에 묶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참으로 황당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채워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누구도 마음이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마음을 채우겠다고 미신적으로 믿게 된 목표물들을 갈망하고 소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마음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제 마음이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안식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모릅니다. 행복하게 직장생활하는 법을 모릅니다. 직장에서는 승진하고 월급이 올라야 행복할 수 있는 줄로만 압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돈이 행복과 연관이 없습니다. 돈을 벌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사람들이 연못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로 들어가면 낫는다고 믿었던 것과 같은 미신입니다. 자녀가 형통해야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미신입니다.
마음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뻐하는 중에 직장 생활도 할 수 있고 자녀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본문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행복함이 안식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 행복함의 문제를 이 세상의 조건과 연결 짓는 미신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미신의 매력에 빠지고 미신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주시고자 했던 은혜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금 돈이 없는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돈에 대한 배신처럼 생각합니다. 돈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없는데도 행복하면 큰일 나는 줄로만 압니다. 건강이 없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는 듯 살아갑니다. 로미오가 다른 여자들과 행복해하는 걸 본다면 줄리엣은 화를 내는 것처럼 내가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과 행복해한다면 세상이 화를 내기라도 할 것처럼 의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미신처럼 내 마음의 행복함과 연결되어 있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가게를 열었으니 하루에 손님이 백 명은 넘어야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미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손님이 없어도 행복해하면 세상을 배신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손님의 가치를 배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그 어떤 조건에도 묶이지 않고 미신에 사로잡히지 않은 독립된 행복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행복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을 우리 속에 넣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안식을 원하느냐? 네 마음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환자처럼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더는 “돈을 주세요, 자녀의 형통을 주세요, 승진을 주세요, 인기를 주세요, 새 집과 새 차를 주세요.”라는 대답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때에 지금 몸으로 만나는 삶의 처지가 어떻든 예수님은 내 안으로 행복을 집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이 행복은 완전히 독립된 행복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독생자 예수님 가지기를 통해서 세상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복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돈이 없든 일이 안 되든 몸이 아프든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예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행복을 가지고 나서 세상일들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고 기쁘고 만족하는 것을 미신에 얽매이고 이 세상 조건들에 관련시키면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유보시켜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들이 이루어져서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예수님을 부르고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가짐으로써 “예수님! 아버지 때문에 행복한 안식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가 미신에 사로잡혀 행복과 안식을 밀쳐내며 유보해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세상의 모든 조건에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주어지는 행복과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