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1월, 고교졸업은 했으나, 입고갈 옷이 없어, 교복을 입은 채, 송정리역에서, 야간완행열차를 타고, 추운 새벽, 서울역에 내려, 두리번거리다가, 우연히 운 좋게도 ‘태릉 입구’ 라 쓰인 버스를 보고, 그걸 탔다. 그 후 생도생활은 자긍심으로 충만, 나라에 고마웠고 부족함이 없었다.
'82년2월, 인생 두 번째 공직자로 변신. 77포병대대 근무할 때, 인접부대 문영대 동기가 알려줘 예편 신청, 감사가 뭔지, 감사원이 뭐하는 덴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놈이 모든 공공기관을 규찰하고, 정부 정책부터 국민생활 바닥까지 잘잘못과 비효율을 가려내는 국고 지킴이가 되었다.
감사원 감사관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힘들고 거친 자리였다. 애당초 감당 곤란이었다. 마치 육지에 사는 헤염 못 치는 동물을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 내려놓고 참치 잡아오란 꼴이었다.
'92년1월, 구차하지만, 살아야 했다. 처자식 호구지책으로, 사표도 못 내고, 죽지도 못 하고, 감사 안 해도 되는 부서를 찾았으나, 감사원에서 감사 안 하는 부서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 옥상에 올라갔지만, 뛰어 내리지는 못했다.
'02년9월, 남들은 다 잘 댕기는 직장을 나 홀로, 더 댕길 수도, 그만 둘 수도 없어 괴로워했다. 암 안 걸리고, 살아서 명퇴를 목표로 탁구에 몰입하는 등 나름대로 생존방식을 강구했다. 집사람으로부터 집안일을 안 돌본단 핀잔도 들었지만, 우선 내가 살아남는 게 더 중한 거라 생각했다.
'12년7월, 명예퇴직해도 된다는 연락받고 기뻤다. 기쁜 내색은 못하고, 징징대며 고난과 영욕으로 점철된 30년 감사관 생활을 마감하고 마패를 반납했다(홍조훈장, 대통령표창 등4회 수상,8시SBS, MBC,9시KBS뉴스, 신문기자 등이 서로 먼저 나를 인터뷰하려 지들끼리 싸운 적 있다).
'22년5월, 백수10년차. 모든 걸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살 때도 되었건만, 공정, 합리성, 효율성, 합법성의 잣대로 세상을 보는 게 습관화된 내 눈높이에서 볼 때, 세상은 여전히 혼탁, 열 받을 일 많고, 꿈만 꾸면, 지금도 감사할 때, 스트레스 받던 악몽을 꾸며 소리를 지른다.
멋모르고 내딛은 첫발 때문에 노심초사한 세월. 아쉽고, 물리고도 싶지만, 소용없고.. 마누라에게 젤 미안한 생각이 든다. 자활능력 없는 사람에게 수 십 년간 직장 힘들어 그만 두겠다고 공갈 치고, 집안일 나 몰라라 하고, 신경질 내서. 많이도 불안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육사 간, 감사원 간 때문이다. 고맙기도 하고, 영광된 적도 많았지만, 다시 산다면, 육사도, 감사원도 두 번 갈 일은 아니다.
앞으로 20년, 마누라 돈 쓰는데 부족하지 않게, 충분히 벌어다주고, 신경질 안 내고, 잘 살아 보께요. 미안해요.
첫댓글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솔담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