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에 숙도(叔度)와 서로 사귀게 되었는데, 그 뒤에 다시 완산(完山)의 이명익(李明翊) 경설(景卨)을 만나서 그를 벗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차츰 옛 사람의 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 자신이 고루하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채 이들 두 사람이 끝까지 나를 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것은 작게는 책선(責善)을 받고 크게는 보인(輔仁)을 입음으로써 나 스스로를 이 유속(流俗)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만 불행하게도 숙도가 먼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무덤의 풀이 5년을 자란 지금, 또 경설이 이번 가을에 세상을 버리고 가 버렸기에 내가 가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 때 온양(溫陽)의 석암(石庵)이란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암자(庵子)는 본래 내가 이들 두 사람과 함께 일찍이 왕래를 하던 곳으로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거기서 가마를 멈추고는 어지러이 흩어진 바위 틈에서 잠시 쉬었는데,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차마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숙도의 아들 덕구(德九)가 일찍이 경설이 지은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자기 아버지의 묘소에 세울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승낙을 하였으나 아직껏 이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리 인간이 서로 같은 세상에 태어나서 함께 서로 사귄다는 것이 어쩌면 마치 저동산에 핀 꽃들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꽃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피고지고 하지만, 그 차이를 말한다면 이는 단지 잠깐 사이일 뿐이다. 나 또한 이들 두 사람을 뒤따라가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이제 저 효자의 청을 더 이상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돌아와서 이와 같이 서문을 쓰고 다시 명(銘)을 짓는다.
숙도는 참으로 성실한 장자(長者)로서 그 모습이 헌칠하고 후덕하였으며, 성품이 목눌(木訥)하여 마치 말을 할 줄 모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만약 친구에게 어떤 잘못이 있을 경우 반드시 바른말로 지적하여 이를 얼버무리는 일이 없었으며, 사람들 또한 공이 이처럼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여겼을 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공은 집이 가난하였는데, 신창(新昌)의 동쪽 교외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은 모두공을 좋아하여 공에게 복종하였다. 그리고 숙도가 죽은 뒤에도 가족들은 옛 땅에서 전과 같이 그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농민들이 다투어 소를 빌려 주고 땅을 갈아 주어서 인력이 남아돌았다. 내가 일찍이 언젠가 숙도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숙도가 밭에서 손수 김을 매고 있다가 돌아와서 나를 맞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나더러 일을 하루 쉬라고 하는구나.”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술을 거르고 나물을 볶고 하여 이를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즐거이 마시면서 놀았는데 아무런 수줍은 기색들이 없었다. 그가 너무나 천진(天眞)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음이 대개 그러한 정도였다.
숙도의 선대(先代)에는 덕망이 높고 귀현(貴顯)한 분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정산 선생(貞山先生 이병휴(李秉休))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분은 옥동(玉洞 이서(李漵))과 성호(星湖 이익(李瀷)) 두 분 선생의 조카로서 성호의 학문을 이어받아서 전한 분이다. 그리고 이분의 아들인 목재옹(木齋翁) 삼환(森煥)을 지나서 육회당(六悔堂) 시홍(是鉷)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남긴 가르침이 사뭇 융성하였고 상제(喪祭)와 관혼(冠婚) 등에 모두 가문의 일정한 법식(法式)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혹시 예법에 관한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찾아와서 묻곤 하였다. 심지어는 경사(經史)의 문자(文字)나 음독(音讀)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이 가문의 방법을 그 준적(準的)으로 삼았다.
숙도는 바로 이와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던 것이다. 집안에 있는 책들이 무려 수백 권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선대에서 일찍이 손수 정리한 것들이며 그분들이 지은 논저(論著)들이었다. 그래서 비가 내려 집에 물이 새기라도 하면 반드시 밤에 일어나서 사당과 감실을 살펴본 뒤에 나와서 두루 서가(書架)를 만져 보고는 비가 새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물러가서 잠을 자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서 동복(僮僕)들보다도 먼저 마당을 쓸었으며, 일이 끝나면 의립(衣笠)을 갖추고 밭에 나가서 김을 맸고 돌아오면 몸을 단정히 하고 책을 보았다. 더러 옛글을 뽑아 적어서 이를 전하기도 하였는바, 일찍이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한가히 앉아서 그냥 쉬기만 하는 법이 없었다. 자식들의 교육에도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아들이 8, 9세가 될 무렵부터 가르치는 공과(工課)가 일정한 과정(課程)이 있었으며, 붓글씨를 익히는 데에 있어 하루에 종이 한 장씩을 채우도록 하였다. 나물밥인 끼니조차 자주 걸렀으나 글씨 쓰는 도구는 일찍이 떨어진 적이 없었는바, 이렇게 한 것이 10여 년이었다. 아들이 조금이라도 놀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면 문득 밥상을 대하여 밥을 먹지 않았다. 병이 위독하여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에도 다른 말은 없고 오직 학업에 힘쓰라고만 하였다.
경설이 말하기를, “이른바 전통 있는 가문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인물이 잘나서 남들을 내려다보고 세상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대의 법도를 잘 지켜서 기상(氣像)과 풍운(風韻)이 저절로 속된 무리들과는 서로 같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또 사람의 아름다운 자질이란 여러 가지이다. 그런데도 공자(孔子)는 유독 ‘목눌(木訥)이 인(仁)에 가깝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속이 깊고 두터운 사람은 행동이 바깥의 물욕으로 내닫는 일이 없고, 설사 그러한 마음을 지니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노력하고 절약하는 일이란 또한 선비의 가문에서 응당 성실히 지켜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숙도 같은 사람으로 말하면 그는 참으로 전통 있는 가문의 인물이라 하겠다.” 하였다. 아, 이 말이 그 정곡(正鵠)을 터득했다 하겠으니, 내가 지금 다시 무슨 말을 더 기록하겠는가.
옛날에 내가 외람되게도 선배의 묘문(墓文)을 지은 일이 있었다. 그 때 숙도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은 자신에게 그렇게 절실한 일이 되지 못할 뿐더러, 또 시기상으로 너무 빠른 것이다. 나이가 더 들고 배움이 더욱 진보하기를 기다려서 때가 된 다음에 이런 것을 내어놓는 것이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 말에 승복하였으며, 감히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이미 나이가 들 만큼 들었다. 그런데도 배움은 여전히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으니, 생각건대 이는 내가 그의 경계를 지키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하물며 지금 도리어 내가 그를 위해서 이 글을 짓는단 말인가. 아, 이제는 다시 책선(責善)의 말을 얻어 들을 수가 없는데 더구나 어찌 보인(輔仁)의 충고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도 너무나 쓸쓸하여 가히 서글플 뿐이다.
숙도는 이름이 종헌(鍾憲)인데, 여흥인(驪興人)이다. 그의 6대조 잠(潛)이 나라를 위해 바른말을 하다가 목숨을 바치고 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재상(載常)은 옥동 선생(玉洞先生)의 증손(曾孫)으로 목재옹(木齋翁)의 아들이다. 이분이 육회당(六悔堂)을 낳고 육회당이 휘 치묵(治默)을 낳으니, 휘 치묵이 곧 숙도의 아버지가 되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사인(士人) 정노동(鄭魯東)의 딸이다.
숙도는 신해년(1851, 철종2) 2월 15일에 태어나서 무술년(1898, 광무2) 3월 13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신창(新昌) 파산(琶山)의 모좌(某坐)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배위(配位)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정홍우(鄭鴻宇)의 딸이다.
숙도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덕구(德九)는 형 종식(鍾軾)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다음은 아직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았다. 그런데 경설은 덕구가 그 인품이 근후(謹厚)하여 그 가문의 아들로 걸맞다 하여 자기 딸을 그 아내로 주었다. 그리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목눌하여 인에 가까웠으니 / 木訥近仁
자질이 본래 순박하였고 / 質之醇也
분수를 지켜 검약을 즐기니 / 守分甘約
처신함이 근실(勤實)하여라 / 身之勤也
남은 힘으로 이치를 탐색하매 / 餘力探賾
그 맛이 정말 진지하였네 / 味之眞也
미쁜 벗이 쓴 그대의 행장 / 諒友狀之
사실이요 꾸밈이 아니라오 / 實不以文
내 이제 그대의 묘명을 지어 / 我述而銘
후손에게 이를 일러 전하노라 / 詔厥來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