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
화자는 조선시대의 선비입니다. 과거에 급제하면 백 년을 함께하자는 언약을 맺어, 정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동안 고향을 떠나 한양에서 과거 공부를 했습니다. 기어코 급제한 선비는 고향으로 금의환향해 돌아오지만, 정인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이미 병색이 짙은 자신과의 혼인을 말리고자 했지만, 화자가 거부했고 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분명한 과거급제를 제안했던 것. 화자는 정인과의 혼인을 서두르기 위해 노력했으나 정인은 혼자 남겨질 화자를 위해 채비했습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정인의 곁에서 화자는 영원한 연정을 맹세합니다.
*내용에 유의해 주세요.
*비개(悲慨): 슬퍼하고 개탄함.
*하인: 나이 든, 침울한
(E1. 급제 행렬, 사물놀이 00:15 F.O)(E. 겹, 몇 초 뒤 말발굽 소리 F.O)
(사이, 길게)(E. 나무문, 문고리로 두드리는 소리)
선비: (들떠서, 설레어서) 이리 오너라.
(E. 낡은 나무문 천천히 열리는)
하인: (대수롭지 않게, 힘 빠져서) 누구십니까?
선비: (신나서) 안에 낭자 있느냐? (들떠, 기쁘게 웃는 호) 이것 보거라!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 소식은 당도하였어? 어사화란다! 폐하께 직접 하사 받은 거야. 나를 기다릴 내 님께 한시바삐 보여주고 싶구나. 어서 안내하렴.
하인: (머뭇거리는 호)(점차 울먹이며 오열하는) 아이고, 아이고. 우리 아씨 어찌하면 좋을까. 낭군 되실 분이 이리 금의환향하셨는데. 아이고, 아이고오. (E. 땅에 털썩 주저앉는)(오열하는 호)
선비: (영문을 몰라) 왜 그래? 한양에 가 있는 동안 연서를 많이 받았단다. (조금 불길해서 어색하게 웃는 호) 예끼, 네가 주저앉아 울 일이 아니란 말이다. 어서, 어서 나를 아씨께 안내하렴. 낭자의 얼굴을 보고싶구나. 하루가 일 년 같아 얼마나 내 님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단다. 약조했던 대로 과거에 급제해 돌아왔으니, 이번엔 님께서 약조를 지킬 차례가 아니더냐. 아버지께 말씀드려 곧 사주단자를 넣을 거야.
하인: (오열하는 호) 아이고, 나으리. 나으리….
선비: (불길해 다급히 뛰어가는 호)(E. 흙길 다급히 뛰어가다 장지문 벌컥 여는) 아씨, 아씨는 어디 계시느냐. 처소를 옮기셨어? …그래, 볕이 잘 드는 방이 좋다 하셨었지. 그쪽으로 안내하거라. (사이, 짧게)(크게 소리치며) 얼른 안내하라고 하지 않느냐! 아니면, 내 한양 간 동안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으로 요양이라도 가셨느냐. 게가 어딘지 말하거라. 내 님 계신 곳이면 나 어디든 따라갈 작정이니! (불안해서, 절망하며, 읊조리듯) …얼른 말하래도. 미안하다, 내 너를 탓하지 않겠다. 제발, 그저 내 님 어디 계시는지만 알려다오. 응?
하인: (슬프게 읊조리며) 나으리….
(사이, 길게)(E. 산, 새 울음소리, 매미 소리 섞인, 천천히 걸어가는)
하인: (F. 회상)(침울하게) 나으리께서 한양으로 떠나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그때도 모두가 말리긴 했습니다만, 나리를 배웅 나갔던 아씨는 그 밤부터 고뿔을 크게 앓았습니다. 상한 몸에 찾아온 병마는 아씨를 좀먹어갔고…. 잠시나마 걸으려 마루 밖을 서성이는 것 외에는 밖을 나오지도 못하셨죠. 그런 것도 며칠, 산들바람마저 여린 아씨를 해치기 시작해 그 후론 방 밖조차 쉬이 걸음 하지 못했습니다. (사이) 몇 날 며칠을 고운 손에 먹물을 들여가면서까지 무리해 서신을 쓰시는가 하더니… 그리 고요한 어느 밤에 주무시다 편히 가셨답니다. (F. 종료)
선비: (사이)(힘겹게 웃으며) 투기가 생깁니다. 내 님이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한테 사랑받고 있던 것 같아서. (사이, 짧게) 어찌 아셨습니까? 어찌 떠나실 때를 아시어, 질기게 그대 곁에 있을 걸 알아 과거시험을 핑계로 나를 저 먼 한양까지 보내셨답니까? (허탈하게) 나를 떼어놓고, 그래, 기쁘더이까? 그래서 백 년을 함께하잔 언약을 앞둔 정인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매몰차게 떠나셨습니까. (사이) 그런 고얀 성미에 어찌 그리 사랑스러우시어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나를 속였답니까. 내 님 태어날 적부터 푸근한 품에 안아 키웠던 유모는 그대 떠나고도 나를 기망하여 그대가 써놓은 연서를 한 통씩 보냈습니다. 그 속의 소식들만 철석같이 믿어 나는 그대 몸 건강히 이 여름날 볕을 즐기고 있는 줄만 알았답니다. 늦은 밤 몰래 우리 만나게 해주었던 행랑아범은 내 금의환향하는 급제 행렬 구경 한 번 나오질 않았습니다. 우리 서로 나눈 정을 모를 턱이 없을지언데 어찌 그리 그대와 같아 그대 잊으라며 내가 찾아올 때까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걸까요.
(BGM. 00:00 F.I)
선비: (울음 참아내며) 하여, 많은 날 동안 내가 급제하지 못할까 아픈 몸을 이끌고 그리 수북이도 연서를 써놓으셨답니까. 그게 무어라고. 그 연서 한 통 덜 받고 그대 하루 한나절이라도 더 길게 살 수 있었다면 내 망설이지 않고 그걸 택할 사내인걸, 그대 영민한데 그런 것도 모르셨습니까? (울음 터트리며) 하루빨리 그대 다시 만나 혼인 하고픈 마음에 바로 급제하려 들 줄은 차마 모르셨습니까. 내가 과거 공부를 하며 떠올리던 건 어사화를 받는 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고운 활옷(*전통 혼례에서의 예복) 입은 그대 모습이었지요. (사이, 짧게) 어쩌면, 어쩌면 아셨겠네요. 하나를 말하면 열은 물론이요, 스물은 알던 그대인데. 이 사무치는 마음, 애타는 마음. 가장 알기 쉬운 이런 것도 모르셨을까. 아시어 그러셨겠지요. 아시어…. 생이란 것이 한낱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걸 아셔서, 아셔서 핑계라도 두었던 거겠지요. 이것나마 나 살아가는 데에 힘이 되라고. 우리의 연정을 양분 삼아 살아가라고.
선비: (사이)(울음 갈무리하며, 힘겹게 웃는 호) 가여워 꽃 같기만 한 그대가 무얼 잘못했다고 하늘도 무심하지, 이리 빨리 꺾어버리다니요. 살 의미 사라진 허망한 이 터에 혼자 남을 나는 가엽지 않았는지. 하늘과 땅 모두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내 눈은 고운 그대 낯을 보라 존재했고 내 귀는 옥구슬 같은 그대 목소리 들으라 존재했고, 내 코는 그대에게서 나는 꽃내음을 맡으라 존재했고, 내 입은 그댈 향한 연심을 속삭이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대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내 님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나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내 모든 것을 잃은 건데,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사이, 길게)(조용히, 읊조리듯) 그대 하나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유가 모두 그대였습니다. 이 하늘 아래에 그대 없고 땅 아래 차게 묻혀있다는 사실만 떠올려도 사지가 끊기고 창자가 뒤틀린 듯 고통스러워 비통합니다. 이게 어디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더이까. 나는 더 이상 나 하나로 서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내가 아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이) 사람은 나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하더이다. 이름 석 자 남길 수 있게 나 할 수 있는 일 다 하라는 뜻임이 틀림없겠지요. 허나 이름 석 자는커녕 마음만 오롯이 남고 말았으니… 내 님께 고할 말이 있습니다. 나 살아 웃음 짓는 이유는 오직 그대였음이라, 평생을 건너뛰어 영원의 연정을 내 님께 고백합니다. 하늘도, 땅도, 하물며 저승차사조차도 우리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습니다. (사이)(작게 웃는 호) 며칠 전부터 선음이(*蟬吟, 매미 소리) 들렸다 하더군요. 내도록 날이 좋아 그런지 여느 해보다 더욱 우렁찬 것 같다고. 허나 난 듣지 못하였으니, 모르던 사이 귀부터 멀고 있었나 봅니다. (사이, 길게) 내 생을, 영원을 님과 함께하고 싶어 하루 나절에 전부 읽고 만 수십 통의 연서는 그대 곁에 나를 묻으며 품에 넣어달라 전해뒀습니다. (숨 고르는 호) 그대 남기고 간 모든 연정을 끌어안으며, 그렇게 바삐 가겠나이다.
(BGM. 03:55에서 O) -> 모자라면 반복
(E. 흙길 천천히 걸어가는)(E. 새 소리, 매미 소리 섞여 길게 들리는)
(선비, 호흡 갈무리 하며, 답답한 듯 길게 한숨 쉬는)
(E. 밧줄 옥죄는)(선비, 숨 막혀 버둥거리다 멈추는 호)
*BGM
https://youtu.be/G9BJjBkFXnM?si=zzYWOPrD2bbPcZ7G
✔️Track - Seed - 파체위소(破涕爲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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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EC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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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악기_사물놀이_합주_01_MKH418_ST_192 / (재)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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