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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자신을 왕이 아니라 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 2023년 5월 21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무엘하 15:1-12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은 인류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인 동시에 외면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탐구합니다. 나는 왜 세상에 왔을까? 누가 보냈을까? 왜 보냈을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까? 인생이 뭔지를 연구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 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어느 날 밖으로 나가보니 수 많은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이 사람이 그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겠습니까? 아! 나도 저 사람들처럼 검은 옷을 입고 저 사람들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뛰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경쟁하며 달려가는 그 목적지가 어딘가 보았더니 자신의 성공과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과 재미와 쾌락과 영광이었습니다. 뭘 깨닫겠습니까? 아! 이게 인생이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사는 목적은 나의 행복과 만족과 성공이구나! 자아숭배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능으로 사는 사람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 본능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이 발달한 사람들은 인생이 뭔가? 어떻게 살아야 고민하던 중에 학문과 이론과 사상과 문화와 종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은 잠시 세상을 왔다가는 나그네이며 허무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그네이며 안개라고 하시고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있는데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생이 허무하고 절망스런 존재가 되었는지 그 허무와 절망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허무와 절망에 갇혀 죽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의 영광과 힘이 되는 재물과 돈을 가지려고 몸부림을 치며 재미와 즐거움으로 인생을 즐기다가 죽습니다. 인생 뭐 있어! 한 번 왔다가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여한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히 아십니까? 성도들 중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지식과 이론이 아닌 마음과 영으로 깨닫고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얼마나 될까요? 저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인생에 대한 인식이 세상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물음이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돈과 영광으로 자신의 자아를 숭배하기 위해 삽니다. 그 우상숭배의 본능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인생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보이는 세상으로 자신의 자아를 숭배하는 그 인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넓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비슷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우리와 다른 게 뭐냐고 묻는 겁니다. 우리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이대로 가면 그 마지막은 무엇일지 묻고 확인해야 합니다.
인생이 뭘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대답은 인간에는 없습니다. 물건을 만들면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 그 물건의 사용목적에 관한 사용설명서를 만드는 것이지 물건이 스스로 사용목적과 방법을 정의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삶의 방식을 그들의 본능 속에 심어주셨지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혀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을까요? 요즘 아이를 낳지 않고 개를 키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여성이 교황에게 축복기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우리 아이를 축복해 달라고 하더니 가방에서 개를 꺼내더라는 겁니다. 교황이 혼을 냈다고 합니다.
정말 자기 자식으로 개를 낳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데 개가 나온다면 열 마리고 스무 마리고 낳겠습니까? 개가 그 유산을 물려받고 대를 잇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식을 원하신 겁니다. 하나님과 영광을 함께 누리고 그 유업을 이어받을 후사를 원하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과 방불한 영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는 양면의 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칼이 의사의 손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지만 강도에게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되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 영적인 지혜와 능력과 자유의지가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사는 믿음과 순종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되자고 하는 불신앙과 불순종, 반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마귀같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은혜와 복으로 주신 그 하나님의 형상인 그 영적인 능력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도구로 사용하고만 것입니다.
그 저주 아래 갇힌 모든 인간의 삶과 인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아숭배 즉 나 자신의 하나님 만들기가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 인생의 하나님 만들기는 나 자신의 마귀 만들기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마귀와 함께 불 못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인생을 산 압살롬은 타락한 모든 인생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다 압살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 안에 살아서 자신의 왕 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진리와 성령을 대적하며 반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닌 목사, 장로, 권사 집사여도 자신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사는 그 자아숭배자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해주신 그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어야겠다고 타락한 자아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타락이고 그 죄를 주님이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해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무슨 죄를 대속해주신 것입니까? 내가 나를 위해 사는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야겠다는 죄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를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힘으로 (그것이 재물이든 돈이든 명예든 권세든 종교든 교회든 은사든 직분이든 봉사든 재미든 쾌락이든) 육체의 정욕과 탐심으로 자신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나 왕 만들기’라는 죄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자아숭배 곧 우상숭배라는 죄입니다.
그 죄를 정말 대속을 받았냐는 겁니다. 회개하고 용서받았느냐는 겁니다. 대속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나도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말입니다. 그 죄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있으면서 나를 위해 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가 주인이니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 타락한 인생의 지독한 나 왕 만들기가 파멸 되는 곳이 나의 그 타락을 짊어지고 대속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 만난 자들에게서만 회개와 거듭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거룩한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된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되찾고 인생의 제 자리를 찾은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 묵상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누구든지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회개만 하면 다 천국에 갑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롭다 하시고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아무도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회개했느냐는 겁니다. 대속을 받았느냐, 거듭났냐는 겁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고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 교만한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 그 마음과 인생에서 나의 주인 됨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으로 바뀌었냐는 겁니다.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을 아십니다. 진짜 회개를 해야 하는 겁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증언합니다.
그런데 정말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온전히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이 성도들 중에 얼마나 있습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입으로는 주여 주여는 하지만 그 삶과 마음과 영혼으로 들어가면 대부분은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자신을 함께 섬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자신의 주인 됨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간음하는 자들인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동성애자들입니다.
하나님도 섬기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영락없이 믿음 같아 보이지만 심판대 앞에 가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도 아닌데 믿음 같아 보여서 뭐합니까? 적당히 믿으면서 자신을 속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 왕 만들기에 몰두하던 죄인들이 은혜로 부름을 받아 교회로 나왔지만 기껏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이나 높이고, 세상의 영광과 육신의 만족이나 구하고, 직분이나 탐내고, 열심과 행위로 자기 의를 쌓고, 주인 행세까지 하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나 왕 만들기 하다가 죽는 겁니다. 그것이 압살롬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예배와 제사가 동원되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이 뭔가를 알면 사람처럼 미련하고 불쌍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존귀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즉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마귀가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듯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겁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도 부자가 되라는 겁니다. 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공부하면 가난하게 된다면 누가 공부하라고 하겠습니까? 공부해야 부자 될 확률이 높은 겁니다.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은 돈 많은 백수가 꿈이랍니다. 돈이라는 것이 세상의 힘과 영광이 아닙니까?
그것이 자신의 왕 됨을 섬길 수 있는 자아숭배의 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타락하여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인생을 사는 죄인들이 돈에 즉 세상에 환장한 것입니다. 교회도 돈에 환장한 것입니다. 돈! 돈! 돈! 돈이 인생의 목적이고 에너지이며 소망이며 축복의 잣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돈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신인 재물은 자신의 자아를 숭배하는 성도들에게 최소한 하나님과 동격이거나 그 이상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세상의 신인 그 재물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자신이냐? 그 선택의 길에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예수님은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와 성도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정말 대속의 십자가를 만나 회개한 자들입니까? 자아숭배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입니까?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자신이냐? 누가 왕이냐는 선택의 길목에서 부자 청년은 하나님만을 선택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부자 청년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이런 청년이 이 시대의 교회에 있으면 아주 기가 막힌 축복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을 겁니다. 믿음도 좋은데 젊은 나이에 큰 부자가 된 겁니다. 교회가 원하는 모델인 겁니다.
그러나 영적인 본질을 해부하자 하나님으로 자신의 왕 됨을 섬긴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 왕 만들기를 하며 산 것입니다. 자신은 몰랐던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 앞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여전히 부족한 자로 말입니다. 이게 세상에 있을 때 드러나는 것이 큰 은혜인데 그 청년은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네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그 말씀은 인생의 주인노릇하며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네 인생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회개하고 예수님만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이 청년이 얼마나 그 때와 그 날을 후회할까요? 지금 이 청년이 의지하고 내려놓을 수 없었던 그 재물을 하나라고 갖고 있습니까? 설령 지옥에서 그 재물을 갖고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인생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나 왕 만들기가 아니었던 겁니다.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인생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세상에서 나 왕 만들기에 성공한 부자가 간 것이 아니라 거지 나사로가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버리고 이제 나를 따라 함께 가자고 했을 때 그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고 결단하고 순종하여 주님을 따라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길을 간다면 가난해지고 고생은 하겠지만, 그 전처럼 사람들이 부러워도 안 하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이 길이 영원히 복을 받는 길임을 알고 그 길을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하고 싶어도 영원히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그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을 아닙니까? 나와 함께 가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나를 위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내 자신을 적당히 함께 섬기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숭배하는데 불편과 손해와 불이익과 고난이 없을 때는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지만 자신이 손해와 고난을 받고 만족과 이익을 얻지 못할 때에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과 목숨과 뜻과 생명을 다합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면 억지로라도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는 뭘 합니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안하는 겁니다.
그것이 정말 내가 인생의 주인이며 인생은 나 자신의 왕 만들기라는 그 죄악을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난 믿음입니까? 압살롬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아버지를 반역하고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것처럼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면서 자신을 교만한 왕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겠습니까? 목사나 성도들이나 다 같이 타락하여 깨닫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쓰레기만도 못한 배설물과 자존심으로 자신을 왕으로 만들겠다고 애를 쓰지만 그 결과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의지하고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뭐가 아쉬워서 버리지 못하십니까? 그게 정말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 부끄럽고 미련한 배설물을 버리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죄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다 나 같은지 말입니다. 내가 압살롬 중의 압살롬이었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목회의 길을 갔지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교회에서 나 자신의 왕 만들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친구들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정성과 충성과 헌신으로 포장을 했지만 그 안에는 교묘하게 나의 성공과 만족과 기쁨과 영광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교묘하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몰랐을 겁니다. 저는 교만도 철저하게 겸손으로 포장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의 왕 만들기인 그 반역과 그 영적인 간음을 하나님은 고난으로 끝장을 내신 것입니다. 압살롬은 죽었지만 저에게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처럼 죄를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또 다시 교회에서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자신의 왕 만들기로 또 반역과 간음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는 죄입니다. 다시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죽어야 할 죄인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그 보혈의 피로 나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피 값으로 벌레만도 죄인을 사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제 생명은, 몸은 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제 대속의 은혜와 그 믿음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인생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깨달은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제 삶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에 내 육체에서 올라오는 그 정욕과 음란과 탐욕과 교만과 미움과 혈기와 온갖 감정들과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고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내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보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자신을 위해 내 마음대로 사는 왕이 되라고 보내셨습니까? 그래서 교회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탕자처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탕자가 자신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자신의 왕 만들기에 성공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탕자가 세상에서 자신의 왕 만들기에 성공했다면 아버지에게 돌아갔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나를 왕으로 만들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나를 왕으로 만들어주기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겠다고 협상을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를 높은 자리에 올려만 주면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시기 원했습니다. 네가 왕이 되면 세상에서 너는 잠시 기뻐하겠지만 영원한 세계에서는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너무 모릅니다.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도 그저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그 저주 받은 삶에 골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정말 미련한 자아숭배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세상에 내려가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를 만나 깨닫고 회개하고 배우고 오라고 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즉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십자가를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그 믿음을 배운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며 왕 노릇하는 존귀한 자들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져 천국에서 왕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