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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탈진과 공허의 나팔 재앙 인생판>의 줄거리 :
일곱 나팔 재앙 중에 앞선 네 개의 나팔이 울리면서 각각 재앙을 불러옵니다. 이 네 개의 나팔 재앙은 어린 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인생판 자체의 성격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이미 그 성격이 결정된 판 위에서 사는 인생은 예외 없이 탈진과 공허함으로 결론 납니다. 실패와 좌절이 이미 결정된 인생을 출발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판 위에 이제 세 개의 나팔 재앙이 더 쏟아지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탈진과 공허의 나팔 재앙 인생판
(요한계시록 8:7~13)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본문에는 네 번의 나팔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재앙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만 보아도 무척 괴로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팔 재앙은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앞으로 세 번의 나팔이 더 남았기에 13절에서는 ‘화, 화, 화가 있으리니’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석을 보아도 마음에 닿는 해석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해석 자체도 너무나 다양해서 어떤 기준으로 해석의 옳고 그름을 구분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계시록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해석을 위한 지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지침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면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7절을 보면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강릉에 제법 큰불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본문도 언젠가 일어날 엄청난 화재를 묘사한 것일까요? 사도 요한은 앞으로 지구 위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적으로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은 어린 양을 중심으로 두루마리에 기록된 역사대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어린 양을 등진 자와 어린 양을 향하는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성령을 통해 마음으로 보시며 그 마음에 느껴지는 감동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온 지구 위에 있는 땅과 수목과 각종 푸른 풀이 타 버리는 재앙은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본 일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기에 이러한 묘사를 한 것입니다. 삼분의 일이란 단순히 지구 면적의 삼분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팔 재앙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현상적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는 계시록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성경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2,0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직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을 앞으로 일어날 현상적인 사건으로만 해석한다면 2,000년 동안 지구에서 살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의 문자대로 이해를 하고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보게 된 내용에 접근해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7절을 보면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늘은 비를 내려주고 햇빛을 비춰주는 곳입니다. 비와 햇빛을 통해 모든 수목과 각종 풀이 자라납니다. 한편 우박은 생명을 키우는 비 대신에 이미 자라는 식물조차도 다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따듯한 햇빛 대신에 식물을 태우는 불이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수목과 풀이 우박에 죽고 불에 탄다는 것은, 지구 위에 먹거리가 없어지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어도 가축은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사료는 기본적으로 풀입니다. 식물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중 삼분의 일이 타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8~9절을 보면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나팔 재앙이 먹거리에 관계된 일이었다면, 두 번째 나팔 재앙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산처럼 견고한 삶을 바라지만 그 견고한 삶을 바라는 심정에 역행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바다의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졌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실제로 오대양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그곳에서 사는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집주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삶의 영역 안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면 교역을 통해 다른 곳에서 수입해 와야만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다와 배는 주변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얻게 해주는 교역의 상징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무역의 방편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배는 가장 대표적인 교역의 상징물이었던 것입니다.
먹을 것이라면 주변에서 얻을 수 있지만, 먹을 것만 가지고는 삶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생필품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생필품을 얻기 위해서는 교역이 필요합니다. 꼭 바다 건너에서 오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은 이웃집과 물물교환을 해서라도 얻어야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교환과 교역을 통해 삶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얻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삼분의 일이 깨졌습니다.
10~11절을 보면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삼분의 일이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우선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자면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에서 횃불은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사람은 첫 번째 나팔 재앙에서 말하는 대로 먹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나팔 재앙에서 말하는 대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삶은 희망과 바람과 소원을 갖고 추진하게 됩니다. 이것이 물이 상징하는 갈증을 표현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횃불 같이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과 물 샘에 떨어진다.’는 것은 희망에 대해 갈증을 느끼게 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원을 갖고 염원을 품고 희망을 향해 달려가면서 삽니다. 그런데 삼분의 일이 깨진다는 것은 그 희망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12절을 보면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며 땅으로 빛을 보내는 대상들입니다.
이 네 재앙은 어린 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에 내리게 됩니다. 어린 양 십자가 제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로 사는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재앙들입니다. 십자가 제단에는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를 죽이기 위한 용도로 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불을 자기를 죽이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 불을 쏟아부으신다고 했습니다. 네 나팔 재앙은 이 불이 쏟아질 때의 여러 측면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를 죽이지 않고 그 상태를 자연인의 상태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 제단의 불이 쏟아지는데 그 재앙의 여러 측면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와 달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를 자연인의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운명이나 운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의도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일이 술술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은 이렇게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죄와 저주에 찌든 사람들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행운이나 운명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행운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이 내려오는 가운데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네 나팔 재앙은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 자신을 십자가 제단에서 죽이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한편 성도는 죄와 저주에 찌든 자신을 십자가 제단에서 죽이는 자들입니다. 날마다 어린 양을 태워 죽이듯이 번제물로 드리며 살고 있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삶은 바로 앞장에서 하나님께 인침 받은 자들로 언급되었습니다. 주석들이 많이 놓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을 시도하지만 바로 앞에 나왔던 인침 받은 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삶을 통해 나팔 재앙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란 그 마음이 향기로운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 어린 양 안에서 하나님을 가진 자들입니다. 앞서 본 7장 15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로 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16절을 보면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본 네 가지 재앙의 내용이 그대로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재앙은 온 지구의 초목의 삼분의 일이 불타는 것이었습니다. 초목은 먹거리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둘째 재앙은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의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생필품을 조달할 수 없는 상황으로서 마찬가지로 주림이라는 기본적 욕구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재앙은 강들과 물 샘의 삼분의 일이 쓴 물이 되었습니다. 이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마음의 갈증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넷째 재앙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이란 내 힘을 초월하여 삶을 이끌어 가는 어떤 힘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운명이나 운이나 팔자라고 표현합니다. 성도들의 삶은 이러한 요소에 의해 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앞서 본 7장 17절을 보면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늘 십자가의 어린 양을 기억하고 함께 죽습니다. 이는 곧 의식 속에서 어린 양의 십자가가 언제나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는 동안 삶은 어린 양의 인도를 받습니다. 어린 양의 십자가가 의식에서 살아있고, 어린 양과 같이 죽었다는 의식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인도를 받는 곳은 생명수 샘입니다. 생명수 샘은 기쁨을 상징합니다. 생명 현상의 본질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된 상황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의 네 재앙은 이러한 성도의 삶과 대비됩니다. 어린 양 십자가 제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를 태워 죽이지 않고, 그대로 자연인이라 생각해서 삶에 임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재앙이 이러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빈곤하고 벌거벗었다는 책망을 들었고,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지만 실제로는 부유하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써의 물리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굶주림이나 목마름이 없으며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계속 언급되는 삼분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숫자 3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단순히 지구 위에 존재하는 식물이나 바다나 물의 삼분의 일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시에 삼분의 이는 여전히 남아있으니 다행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계시록의 내용은 전부 상징입니다. 3이란 하늘의 완전수입니다. 앞서 청황색 말 탄 자가 나타났을 때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받았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숫자로써, 사도 요한은 3이라는 숫자를 동원하여 하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실제로 하늘에서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내려와서 땅 삼분의 일을 태우고, 수목의 삼분의 일을 태우고, 풀을 태우는 것을 보았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무엇인가를 보았는데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자니, 그러한 비유를 통해 3이라는 숫자를 등장시켜 하늘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을 보면서 일을 합니다. 일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마음의 채움인 만족과 기쁨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에 평강을 얻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만족과 기쁨으로써의 평강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먹거리를 위해서 일을 할 때도 작용하고, 필요한 생필품을 구하려고 할 때도 작용합니다. 그리고 희망과 소원과 염원 또한 온전히 채워짐으로써 기쁘고 평강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며,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운명이나 팔자 같은 것에서도 행운아가 되어 기쁘고 평강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하여 ‘온전한 만족과 기쁨과 평강’을 3이라는 숫자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땅만을 보고 사는 인간이 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온전한 평강, 온전한 기쁨, 온전한 만족입니다. 여기에도 각각 영역이 있습니다. 먹거리와 관계된 영역에서 애를 쓰는 것은 먹거리에서 온전한 만족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하는 영역에서 노력하는 이유는 생필품이라는 영역에서 자기가 원하는 만족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희망과 소망의 차원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또한 자기가 온전하게 만족하고 기쁠 수 있을 만큼 운이 따라주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땅만 보면서 각 분야와 영역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에 대해 온전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원하며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각 영역에서 얻으려는 온전한 만족은 3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3은 하늘을 상징하는 완전수입니다. 아무리 먹거리 영역에서 이것이 있으면 좋겠고, 이것만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할지라도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생기지 않습니다. 단 것을 먹고 나면 짠 것이 먹고 싶고, 짠 것을 먹고 나면 물을 찾게 되고 끝이 없습니다. 물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를 구매하고 매매하는 일로 만족을 얻으려 해도 만족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소원과 희망과 꿈이 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하려 하지만 이룬다고 해서 만족이 생기지 않습니다. 운이 따라주기를 바라며 만족하기를 바라지만 바라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삶의 어떤 영역이든 온전한 만족과 평강과 기쁨은 3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대로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삼분의 일’이란 삼분의 이가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도예가가 멋진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햇빛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아주 작은 흠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주저 없이 그릇을 깨뜨려버립니다. 삼분의 일이란 하늘의 만족과 평강과 기쁨에 흠이 난 상태입니다. 만족 자체를 하늘에서 주어지는 3이라고 볼 때, 그중에서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만족이 깨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남은 삼분의 이로 만족하고자 할 수는 없습니다. 만족(滿足)의 ‘만’은 충만 만(滿)이 의미하는 대로 삼분의 일이 빠진 상태는 이미 충만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관찰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매사에 만족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에 대한 채움의 기준을 갖고 그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기준을 갖고 있든지 땅에서 열심히 하는 모든 일은 하나도 만족으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거리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생필품을 구입하고 매매하는 교역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희망과 소원과 꿈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운이 따라줘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은 3이 의미하는 대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만족을 가리키는 3에서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만족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아무리 먹거리와 관련해서 일을 해봐도 그로부터 얻으려는 만족에서 항상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진정한 만족은 얻을 수 없습니다. 만족은 하늘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를 뒷받침이라도 해주듯이 13절을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뜬금없이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앞서 우리는 네 생물 중에서 독수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독수리는 땅을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보도록 시선을 끌어갑니다. 그 독수리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땅에 사는 자들에게’라는 말에서 ‘사는’이라는 뜻은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만족을 위해 삽니다. 채워지기 위해 삽니다. 기쁘기 위해 삽니다. 그런데 땅에 사는 자들은 마음의 채움을 땅에서 얻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서 온전한 채움으로써의 만족을 바라는 자들이여, 사람의 마음을 위한 온전한 채움은 하늘에 있는데 너희는 땅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너희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해도 만족할 수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를 어린 양 십자가 제단의 불로 태워 죽이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자기를 태우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은 제단의 불을 그 삶에 그대로 쏟으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은 벌었는데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우울해합니다. 세상의 전문가들은 우울의 원인을 따져서 고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 위로 불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를 태워 죽이는 데 써야 하는 십자가 제단의 불이 쓰이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그 불을 쏟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나팔 재앙이 뜻하는 대로 기본적인 만족에 대한 채워짐의 삼분의 일이 흠이 생겨서 깨져나간 상태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흠집이 난 상태이기에 진정한 만족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편 이와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돈이 하나도 없어도 어린 양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오늘 분량에 해당하는 제단의 불을 다 써서 나를 태워 죽입니다. 그러자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땅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돈이 없어도 하나님을 가짐으로 마음에는 주림이 없고 목마름이 없습니다. 마음에 다른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갖자 이 땅에서 무슨 물건이나 집을 구입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갖자 이 땅에서 삶이 잘 풀리고 형통하기를 바라지 않게 됩니다. 이런 내용 자체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고 내 마음에 상처를 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삶을 사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만 저 사람들은 불교도이고 힌두교도라 예수님을 안 믿어서 그렇다. 예수님 이름을 불러도 엉터리로 부르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어린 양이 불교도, 힌두교도, 무신론자, 잘못 믿고 있는 모든 기독교 종교인들의 삶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린 양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린 양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 인생의 키입니다. 우리는 어린 양이라는 키를 쥐고 있고, 그들은 등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으로써 지금도 그들에게는 나팔 재앙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거리와 소유물과 이 세상의 소원이나 행운을 바라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만족과 평강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나팔 재앙이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팔 재앙이 임하는 이유는 어린 양을 등지고 있고 십자가 제단에서 자기의 죄와 저주에 찌든 모습을 죽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린 양 때문에 복을 받거나 어린 양 때문에 화를 당합니다. 어린 양을 품으면 복이 임하지만, 어린 양을 등지면 화, 화, 화가 임할 뿐입니다.
어린 양을 등지는 자들은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를 태워 죽일 용도의 불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불이 쏟아지는 인생판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 인생판이 본문의 네 나팔 재앙을 통하여 소개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족을 위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가져도 못 가져도, 성공하든 실패하든 평강이 없습니다. 평강 없이 실패와 좌절과 공허와 탈진이 확정된 인생판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어린 양을 등지고는 탈진을 피할 수 없고, 공허를 피할 수 없고, 실패와 좌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판 자체가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 그 판 위에서 그들은 탈진과 공허로 결정되고 실패와 좌절로 확정된 인생을 매일매일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여야 하고 날마다 성도다워야 합니다. 오늘도 내 몫의 제단의 불을 백분 활용하여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온전히 태워 죽임으로써, 어린양과 함께 하늘 보좌까지 올라가 하늘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땅을 살아 화를 입게 되는 자들과 같은 부류라고 착각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