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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 stop
감지 천 순창
1.
나는 시내버스다.
처음 회사에 들여 올 땐 시퍼런 청춘이었는데
세월도 무상하여라.
이 십여 년을 달리다보니 페인트도 벗겨지고 어디 한곳 고장이라도 나면 부품도 구하기
어려운 고물이 다 되었다.
오래전에 망한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이 만든 차인데 그때만 해도 삐까 뻔쩍!
모두가 부러워했던 신차였다. 그런데 왜? 세계적으로 잘 나가던 그 큰 기업을 망가뜨려서
없애버렸을까? 시절이 하 수상하니 깊은 속사정은 알 수가 없다.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전기 차에, 무인 자율자동차까지 나오는 세상에
남의 것 베끼기 좋아하던 중국조차도 버스를 만들어 무작정 싸게 팔아대니
나 같은 똥차야 어디 설자리조차 없는 게 당연할 수밖에.
사장이 사업과장에게 그랬다.
"이제 이차는 오지노선에 올해까지만 투입하고 폐차합시다."
길도 좁고, 사는 사람도 적은 산골 면단위에
하루 2, 3회 무료운행을 하면 나라에서 운임과 유류 비를 지원해주니 회사로선 손해날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 곳은 8할이 산악지형에다가 농업에 종사하는
고령의 노인들이 많은데 장날이나 축제 등 큰 일이 아니면 출입이 적어서
농촌인구감소로 인해 대형 예산을 들여 교통망을 구축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으니
나 같은 헌차를 활용한 오지 운송지원이 효율적이었다.
이제 나는 올해가 내 생의 한계로 정해졌다.
온전히 내 명대로 누리자면 30년도 더 살 수 있는 세상을 왜? 지들 맘대로 죽이고,
없애고 하는지 화가 나고, 눈물이 나려 해 견딜 수가 없다.
비록 늙고 털털거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손만 본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을,
내 청춘과 열정을 바쳐 저들에게 돈을 얼마나 벌어 주었는데 그 은공도 모르고!
정말! 내가 쓸모가 없어져서 폐차를 통한 안락사를 시키더라도 이왕이면
부모님 염 하듯이 고이 닦고 기름칠해서 차 박물관에라도 보내주면 좋으련만
박물관은커녕 오래된 차라고 쓸 만한 부속이라도 팔아먹을 심산으로
내 뼈다귀까지 알뜰히 분해해서 처분할 것이니 충성했던 지난 세월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어쩌랴!
칼자루 잡은 놈이 대장이라고 살아 있는 날까지라도 놈의 눈치를 보며
악착같이 굴러가야만 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더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는데 억지로 울화까지 참으려니 심사가 뒤틀려
죽을 지경이다.
왜? 하필이면 조물주는 그 많고 많은 생명 중에 쇠붙이인 차로 나를 세상에 보냈을까?
잘 생기고 돈 있는 집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주면 안 되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운행 중 교통사고나 화재 등 여러 가지 일로 일찍 생을 마감한 동료들 보단
나은 거라며 스스로에게 위로를 해본다.
오늘은 와룡, 도산을 거쳐 운곡 리 까지를 왕복하는
오지 구간에 배차된 나는 새벽 6시에 일을 시작하였다.
제법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로 접어들면서
낡은 카브레타 와 제네레타 가 말을 잘 안 들어 시동이 걸리는데 한참 애를 먹었다.
운전기사 장 씨는 죄 없는 내 뒷바퀴를 발로 걷어차며
"에이 씨발~ 얼른 폐차나 시키지 뭐할라꼬 이지랄 이여!" 하며 욕지거리를 해댄다.
아무리 그런들 나야 어찌 해 볼 수도 없는 처지니
고스란히 당 할 수밖에 없지만 괜히 억울한 마음이다.
버스 계류장이 고속버스와 ktx 신역이 있는 시내 외곽 신단지로 통합 이전하는 바람에
승용차나 택시를 타지 않고는 새벽 출근이 어려운데, 회사에선 출퇴근 버스를 지원해 주지
않아 기사들이 불만이 쌓여 있는데다 나처럼 고령의 차들은 차가운 날씨에 취약해서
시동이 잘 걸리지 않기 일쑤였기에 늘 그들의 화풀이 대상으로 발에 채이고 공구에 두들겨
맞아온 것이다.
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사장의 아버지는 집채만 한 엔진룸이 앞에 달린 버스 두 대를
사서 이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100여 대가 넘는 지역 굴지의 운수회사로 키워놨고
운 좋은 아들은 회사를 통째로 물려받아 운영 중에 있는 것이었다.
다른 버스회사가 한 곳이 더 있긴 하지만 규모가 워낙 작아 우리와는 상대가 되질 못했다.
그러니 돈이 되는 주요 노선은 거의 대부분 이 회사가 차지하고 있는데 그래도 큰 기업이라
지역 기여도라는 이미지 때문에 나 같은 구닥다리 차를 시골 오지 노선에 투입 해
운송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운임과 기름 값은 지자체로부터 전액 보상을 받으니 꿩 먹고, 알 먹기 사업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차가운데서 오그리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발에 채이고
욕을 먹은 다음, 후미의 낡은 배기통을 통해 시커먼 연기와 굉음을 내면서 시동을 걸려고
애를 썼다.
며칠 전, 중고 시동 모타를 폐차장에서 구입해 교환을 했는데도 한참을
씨룽! 씨룽하는 소리를 내면서
똥배가 터질 만큼, 용을 쓴 뒤에야 겨우 시동이 걸렸다.
하긴 옛날엔 버스 앞대가리에 있는 구멍에 긴 쇠꼬챙이를 쑤셔 넣은 뒤
기사의 욕지거리와 목구멍이 터질 것 같은 아픔을 참으며 구동벨트가 터져라 모터를
돌리며 시동을 걸어야 했던 걸 생각하면 그나마 지금이 행복한 것인지도 몰랐다.
시동을 걸어놓고 엔진과 버스안의 히터가 더워지기를 기다리며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때운 장 씨가 담배를 입에 문 채 운전석에 올라앉았다.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장 씨는 이리저리 운행에 필요한 동전과 타이머 등을
둘러 본 뒤, 기어를 넣고는 부웅! 하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워낙 고령의 나인지라 그가 발을 밟을 때마다 시커먼 배기가스가 내 꽁무니로 배출되었다.
어쨌든 오늘 하루도 무사하기를 빌며
드디어 출발이다.
2.
시내를 한 바퀴 우회한 뒤 곧장 시외로 나섰다.
새벽이라 시골로 가는 손님은 아예 없었고 간간히 노선 인근에 있는
학교의 학생들 두어 명이 타고 내렸다.
이내 시내를 벗어 난 버스는 한적한 편도1차선의 외곽도로로 들어섰다.
먼저 와룡 면 초입에 있는 이하라는 마을을 거쳐 이상 리, 신부 골, 감애 마을을 지나
다시 원도로인 도산 행 918번 지방도로로 가야한다.
왠지 올해는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더워 도로 옆에 누워있는 밭들의 채소나 곡식들이
하나같이 힘이 없고 알이 실해 보이질 않았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새벽바람에 나온 농부 한사람이 약통을 멘 채 이리저리
제초제를 뿌리고 있었다.
곧 추수를 해야 할 계절이지만 지난여름의 더위가 워낙 심해서인지 곡물들이
제대로 익질 않았다.
오늘이 장날이니 아무래도 손님이 있을 것 같아 장 씨의 발바닥이 악셀레이터를
힘껏 밟기 시작했다.
편도 일차선이긴 해도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으니 길은 조용했다. 그러나
아스팔트 포장이 오래돼 가끔씩 덜컹 거리며 튀어 오를 땐 안 그래도 낡은 내 온몸이
욱신거리며 쑤셔댄다.
새 차일 땐 그리도 자주 그리스 오일을 쳐주더니 이젠 그놈의 오일 구경한지도
언제 적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폐쇄된 이하 역사 앞에 돌돌이 보행기를 붙들고 서 있는 할머니 한사람이 손을 들었지만
장 씨는 못 본채 하며 그냥 지나쳤다.
마을 끝에 있는 정류장에서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태우려는 심산이다.
이왕이면 늙은 노인네가 마음 편하도록 태워주면 될 것을 굳이 못 본 척하는 것이 얄밉다.
신부 골에 있는 정류장에 닿으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농산물을 넣은 보따리와 채소 등을
지고, 인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 씨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한다.
“흙 묻은 나물은 안되니데이! 털고 올라오소!”
동네 주민이라고 해야 스무 명이 안 되는 산골마을에 열두 명의 사람이 버스에 타는 걸 보면
장날은 장날인가 보았다.
노인들의 보행기용 똘똘이를 실어 주던 박이장이 장 씨를 보며 “안녕 하시껴!“ 한다.
저 사람은 참 이장 노릇을 잘하는 것 같았다.
매번 버스를 탈 때면 정류장에 나와 노인들에게 짐이며, 보행기 등을 실어 주고 내렸다.
하긴 이장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니 이 마을에선 제일 젊은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타려던 김씨 영감의 손에 라면박스 하나가 끈으로 묶인 채 들려 있었는데
차에 발을 올리는 순간 꼬꼬댁! 하며 닭 한 마리가 박스 뚜껑을 열고 튀어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깜짝 놀란 김씨 영감이 놈을 잡으려고 팔을 휘 젖는 순간,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아이고! 아이고고!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김 영감이 땅바닥에 쓰러지자 박이장이
얼른 영감을 부축하며
“괜찮니껴? 어른 요!” 하며 일으켜 세운다.
그사이
닭은 쏜살같이 옆 논으로 달아났다.
다행이 부러지거나 다친 곳은 없는 듯 허리를 주무르며 일어나던 김 노인이
“아이구 저놈의 달구새끼! 오늘 저거 없애서 할마이 제사 올릴 고등어 한손 사 올라 캐띠마는
버릿네!“ 하며 울상이다.
장 씨도 놀란 얼굴로 운전석에서 뛰어 내려와 영감을 살핀다.
버스 승, 하차 중에 낙상 사고라도 나서 사람이 다치면 운전기사는 골치 아픈 일이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이고 할배요! 짐승은 버스에 실을 수 없다는 걸 모르니껴? 어데 남 망훌 일이 잇니껴!”
하며 벼락같이 성을 낸다.
김 영감이 집으로 돌아가고 장 씨가 버스 안을 다시 한 번 살펴 본 뒤에야
차를 돌릴 수 있었다.
아무튼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버스에 타는 시간도 꽤 걸릴 수밖에 없으니
운행시간을 지키기란 그리 녹록치가 않은 것이 시골 운행이었다.
아까 지나왔던 이하 역 앞에는 그 할머니와 중학생인 듯 한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학생들이 할머니의 보행기를 싣는데 거들며 차에 올랐다.
“내사 오늘 이거 내다 팔아도 돈이 안 되지 싶데이!” 하며
풍천 댁이 참깨 두되와 들깨 두 되를 안은 보따리를 만지며 투덜거렸다.
옆에 앉은 무실 댁 할머니가 “그래도 우야노! 농사 진거는 팔아야제!” 하며
맞장구를 친다.
“날이 에지간해야 익을 낀대 무신 놈의 날씨가 그리 더운지 곡식도
지대로 영그질 않아 모다 빈 쭉정이뿐이야!“하며 울상이다.
그때였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임동 댁이 갑자기 일어서며
“기사 님요! 똥 나올라 카니더! 문 좀 열어주소~”하며 엉금엉금 앞으로 나온다.
“뭐라고요?” 장 씨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반사경으로 뒤를 보다가
“할매요! 앉으소 앉아! 자빠져 죽을라 카니껴?”
“누구 망훌 일이 있나!” 하며 차를 세웠다.
“왜요?” 장 씨가 운전석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오며 임동 댁 앞으로 가자
임동 댁이 겁에 질린 얼굴로 “똥을 못 누고 와서...”말끝이 흐려지며 눈치를 살핀다.
“하이고~ 내 참! 자가용도 아이고 뭔 난리로 이게!!”
할 수없이 할매를 부축해 내려놓으니 임동 댁은 밭 옆의 나무 아래로 후다닥 가더니 몸빼
바지를 훌렁 내린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아이고 저 할마이 치매 왔능 갑다!” 안 그래도 맘이 바쁜 사람들이 투덜거리고
히히덕! 거리며, 장날 아침나절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시내 외곽에 있는 장터에 사람들을 내려준 나는 장 씨가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커피를 뽑는 사이 잠시 쉴 수가 있었다.
농사가 되니 안 되니 해도 장꾼들은 여전히 많았다.
3.
새벽 일찍 나선 탓인지 한 바퀴를 돌았는데도 아직 아침나절이다.
두 번째 노선은
와룡면 소재지를 지나 안동 댐 인근 오지마을인 산야, 도곡을 돌아 호반 길 우회도로를 따라
예안 정산 리를 돌아오는 진짜 산골길이었다.
장 씨가 스프링이 낡아 쿠션이 좋지 않은 운전석 시트를 주먹으로 퉁퉁 치더니
“방석을 하나 깔아야 하나~” 하며 투덜거렸다.
시립 화장장이 있는 굴티 마을을 지나는데 영구차 한 대가 관을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런 두건을 머리에 쓴 상주인 듯한, 사람 하나가 관을 붙잡은 채 통곡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어려 보이는 상주가 아무도 없이 슬피 우는 걸로 보아 아마도 모친을 잃은 것 같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혼자 남겨진 저 아이는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갈까 하는 괜한 걱정을 하며 산야 리 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비록 안동 댐이 들어서며 마을 전체가 통째로 수몰 된 지역이긴 해도
보상도 많이 받고 수자원 관리단의 지원으로 수몰된 땅을 활용해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도록 해준 탓에 골골이 제법 많은 주민들이 외지로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동네였다.
비록 오래된 초등학교 하나가 폐교되어 인근 면의 학교로 통합되면서 아이들이 조금
불편해지긴 했어도 교육청에서 제공하는 통학버스가 3대씩이나 운행되니
부모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 같은 시내버스는 늘 상 빈 차였다.
어쩌다 통학버스를 놓친 한, 두 명의 아이가 탈 때가 있지만 거의 빈 차로 왕복하곤 했다.
그렇다고 버스 회사는 걱정할 일이 없다.
기름 값에, 운임에 도로 보수까지 우선으로 해줘서 손해 날 일이 없으니까.
오늘처럼 장날이 아니면 그저 많으면 한, 두 명, 아니면 노다지 공차다.
산야리 인근에서 도로가 일부 차단되어있었다.
오지 지역 상수도 공급을 위해 시청에서 공사를 진행 중인데 워낙 좁은 길이니
차량이 한번 씩 지나가면 한참을 공사가 중단되곤 했다.
“신호수”라는 빨간 글씨가 적힌 깃발을 깃대에 달고 등 뒤 허리춤에 꽂고 있는 여자가
수건으로 얼굴을 다 가린 채 신호 봉으로 차량을 유도하고 있었는데 그 꼴이
우습기 짝이 없어 보였다.
“에이 씨! 바쁜데 밤으로 일할 것이지 웬 대낮에 난리들이야!” 하며 장씨가
투덜거리며 잠시 정차하자
감독관인 듯한, 사내 하나가 고개를 두어 번 숙이며 양해를 구한다.
잠시 뒤, 다시 길이 열리고 차는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뱀의 똬리처럼 굽은 산길을 돌아가는데 나도 숨이 턱에 차올라 죽을 지경이다.
내 뒤쪽으로는 시커먼 배기가스가 주변 나무들을 다 죽일 것처럼 쏟아져 나오고
오래된 내 심장은 가쁜 숨을 몰아 보지만 승객이 한사람도 타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속도가 나질 않는다.
괜히 내가 미안해져 운전기사 장 씨의 눈치를 볼 판이다.
승객도 하나 없이 안동 댐 끝 마을 인 도곡 리에 도착한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출발시간을 기다렸다.
마을 이래야 집은 겨우 다섯 호에, 여섯 명의 주민이 사는데
그조차도 시내에서 출장 농사를 짓는 중년의 부부가 가끔씩 들어와 사는 곳이 한집,
객지에서 사업하다 망하고는 빚쟁이들을 피해 이 심심산골에 들어와 빈 땅을
임대하여 소작농을 하기 시작한 한 씨와 그의 처,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버려두지 못해
감나무, 대추나무 몇 주를 심고, 파 농사며 들깨 농사를 짓고 있는
올해 여든 아홉의 김 영감님, 그리고 3년 전 영감이 죽어 혼자 된 남선 댁 정씨 할머니가
주민의 전부였다.
오늘은 친정이 남선 이라 남선 댁으로 불리는 정씨 할매 혼자서 버스에 올랐다.
그 질긴 더위에도 억척같이 논밭을 기며 가꾸었던, 열무나물과 들깨, 날이 선선해지며
주워놓은 도토리와 밤, 뒷골에서 찾아 낸 송이 몇 송이를 가지고 장엘 나선 것이다.
“하이고 할매요! 구십 노인네가 힘도 좋다. 워째 그걸 다 들고 갈라꼬 그러노?”
하며 장 씨가 덜렁 덜렁 짐을 받아 버스 맨 뒤 칸 좌석에 얹어 주었다.
평소 그리 싹싹한 사람이 아닌데, 남선 댁이 버스를 몰고 올 때마다
감자며 무, 쪽파 등을 한두 단씩 먹으라며 건네준 탓이니 뇌물 값은 하는 것이다.
“혼자 사는 할매가 뭐할라꼬 이렇게 돈을 만들까? 장에 영감 생겼나?”
하며 장 씨가 삐죽거린다.
“영감은! 흥 내사 사내라 카믄 한 트럭꾸 줘도 싫타!”
남선 댁이 쌈지에서 담배하나를 꺼내 물며 무심한 듯 뱉어낸다.
아무리 시골 촌구석이지만 운행 시간이 정해져 있어 손님이 있든 없든 제 시간에
출발을 해야 하니, 아직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물론 나도 이 참에 힘을 비축해서
저 높은 언덕길을 올라 갈 준비를 하는데 도움도 되었다.
남선 댁은 아들 둘에 딸 하나, 삼남매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형부가 선생으로
읍에 사는 언니가 데려가 학교를 시켰다.
언니에겐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이왕 공부시키는 거 내 자식도 부탁한다며 아이를
억지로 떠맡기니 사람 좋은 형부와 언니가 그러라며 어린 조카를 맡아주었다.
그래 남선 댁은 농사 지어, 때마다 쌀이며 철 채소 등을 갖다 바쳤다.
물론 학비와 하숙비는 논, 밭을 팔아서라도 언제나 넉넉하게 보냈었고 다행히 아들은
남선 댁의 바람대로 속을 썩이지는 않은 채 고등을 거쳐 울산 공대엘 들어갔다.
물론 언니의 아들인 조카가 워낙 똑똑한데다 형부가 선생님으로 자기 아들과 함께
과외 아닌 과외를 시켜 준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현대자동차에 들어가 상무까지 지내고는 퇴직을 했다.
며느리가 명절이나 조상 제사를 지내려고 이곳에 올 때마다 아들과 실랑이를 했지만
남선 댁은 모른 척했다.
울산에서 큰 배의 선주 딸이었던 며느리가 아들과 같은 직장을 다니며 만났는데
고생이라곤 눈곱만큼도 해 본적이 없는 집안의 고명딸이니 오죽하랴 싶어서였다.
그래도 적으나마 명절이나 제사. 시어미 생신에라도 왔으면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면 좋으련만
평생을 그래 본적이 없다.
그래도 남선 댁은 동네에 아들자랑, 며느리 자랑으로 입에 침이 마를 날이 없었고
손자 녀석이 태어나자 외양 칸에 있던 황소를 내다 팔아 장차 학비로 쓰라며
아들에게 건넸다.
영감은 안동 권씨 부정공파 월곡 종손으로 조상님들로 부터
그 많은 논, 밭 전지를 물려받고도 손 에 흙 한번 묻힌 적이 없이 밖으로만 돌며
색시 질, 노름질로 한량 짓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자연히 집안일과 농사는 남선 댁 할매의 몫이었고, 모든 것은 끝이 있는 법.
그 많던 논밭이 술값, 색시 값으로 다 들어갔고, 영감은 간암으로 세상을 버렸다.
어차피 혼자 농사짓고 자식 키우며 살아왔으니 영감이 있으나 마나였지만
그래도 혼자가 되고 보니 영감 없는 과부라고 주변에서 무시하는 것 같아
괜 시리 서럽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죽은 영감이 원망스러웠다.
남선 댁은 오늘 실어놓은 농작물을 얼른 팔고 대전을 가야만 한다.
둘째아들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지가 벌써 29년째다.
무슨 놈의 팔자가 이런지 남편 복 없는 여자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천생 정 씨 할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맏이를 읍에 사는 언니에게 맡겨 학교라도 시킨 일은 두고두고 잘한 일이지만
그래도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논밭전지가 서른 마지기나 되는데 영감은 밖으로만 나돌며
한량 짓으로 세월을 보내니, 둘째라도 농사를 맡아야 할 판이었는데 다행이도
말 수가 적고 순한 성격의 아들은 순순히 어머니의 말을 따라 주었다.
아무리 농사가 많고 전답이 많아도 농촌 총각에게 시집올 처녀는 마른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해서 남선 댁은 국제결혼 중개소에 얼마간의 돈을 주고 베트남 처자를 만나게
했는데 한 해 농사지은 값으로 비행기 표에, 처녀 몸값에, 소개비를 합쳐서
천만 원이 조금 더 들었다.
농사에 시달려 만날 풀이 죽어 있던 둘째 아들은 베트남을 다녀 온 뒤부터는
자주 웃기도 하고 밭일도 그리 힘들어 하질 않는 듯 했다.
입국 수속과 한국말 교육을 마친 열여섯 살, 어린 며느리가 드디어 국내로 들어 온 날,
수력발전소가 들어선다며 공사 중으로 아직 댐에 물이 들기 전이라 좋이 50여 가구가
넘게 사는 동네가 잔치 준비로 분주하게 돌아갔다.
아들 놈 장가 못간 몽달귀신 만들까 노심초사했던 남선 댁은 돈이야 들든 말든
그제야 한 시름을 놓았다.
“어마이! 이거 뭐니?” 이런 우라질! 며느리라는 것이 시어미에게 말도 막 놓고,
뭘 시키면 “모른다! 모른다.” 하며 도통 소통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어쩌나! 일손 부족한 농사에 손 하나 보태는 것이 얼마나 큰지 해보지 않은 이는
알 수가 없는 일.
아들이 늘 상 헤벌쭉하고 일꾼도 하나 늘었으니 남선 댁은 그저 좋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장날, 아들이 며느리 옷을 사겠다며 며느리와 함께 시내엘 나갔다.
밭일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친정 어미와 식구들에게 전화질을 해대며 찔끔거리던 며느리는
시내엘 간다니 새벽부터 들떠 이것저것 옷을 챙기며 부산을 떨었다.
“가거든 맛있는 고기도 먹이고, 겨울옷도 몇 벌 사서 들어오라”며 쌈지 돈을 쥐어준
남선 댁은
-그래 저 어린 것이 바다 건너 혈육하나 없는 낯선 타국, 그것도 하늘아래 첫 동네 같은
심심산골에 와서 얼마나 외롭고 친정 식구들이 보고 싶을까 싶어 농사가 바쁜 철이 아니면
자주 장에라도 데리고 나가 마음을 달래주라고 아들에게 일렀었다.
아들이 버스를 타고 나가는 걸 본 남선 댁이 오랜만에 동네 경로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로당이라 해봐야 혼자 노인 할망구들 넷이 전부이긴 해도 그래도 모이면 파전, 녹두전도
부쳐 먹고, 집에서 만든 모주도 한잔씩 마시며 민화투를 치는데 그놈의 십 원짜리
화투판이 나중엔 평생 원수가 될 것처럼 큰 싸움판이 되곤 했다.
장에 간 아들과 며느리가 막차로 돌아왔다.
웬걸? 옷을 샀다는데 보따리가 다섯 개도 넘는다.
“이기 뭐로?” 남선 댁이 놀란 얼굴로 아들에게 물으니
며느리가
“어마이! 이거 오천 원, 만 원한다. 우리 엄마 보낼 꺼다!”
세상에! 아무리 옷이 싸다 한들 서른 벌이 넘는 옷을 사가지고 오다니 기도 안 먹혔다.
아들놈은 그저 머리만 끌쩍거리며 어미와 눈을 맞추질 안한다.
“아이고 저 등신~ ” 속으로 한마디 뱉은 남선 댁은
“오냐! 그래라, 낼 우체부 오거든 친정으로 보내라.”
그때부터 며느리는 장에만 가면 옷을 한 보따리씩 사들였고 베트남에 있는 친정 동생들에게
보냈다.
언제부턴가 며느리는 아들에게 상전이었다.
남선 댁 모르게 얼마씩 돈도 보내는 듯 했지만 그저 모르는 척!
못난 아들 데리고 살아 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장에 간다고 나선 아들 내외가 밤이 늦어도 돌아오질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지서 순경 두 사람과 형사기동대라고 딱지가 붙은 차 한 대가 수갑을 찬 아들을 싣고
들이닥쳤다.
남선 댁이 깜짝 놀라
“이게 무슨 일이요?” 하며 경찰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이 사람이 아들 맞지요?”
“아니 내 아들이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손을 묶었대요?”
안면이 있는 와룡 지서의 강순경이
“아주머니! 저 친구가 아주머니 며느리를 죽였어요!”
남선 댁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허리에 포승줄이 꽁꽁 묶인
아들은 얼굴이 초췌한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라고, 장엘 간다고 나섰던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니!
남선 댁이 눈을 뜨자, 울산에 있는 큰 아들과 딸이 와 있었다.
장에 간다며 나선지 두 번째인가, 며느리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사람들의 모임에
갔었던 모양이었다.
천리 먼 길 타국에서 집 떠나 온 동포들끼리 만나는 자리다 보니
오만가지 얘기들이 다 나왔단다.
대부분의 베트남 여자들은 그 곳에서도 최하층의 가난한 집안자식들인지라
한국으로 시집오는 조건으로 받는 단 돈 몇 백만 원이면 친정집 살림이 단숨에
중 상류층으로 살 수 있는 거금이었으니 중간 브로커들에게는 거의 인신매매 수준이요,
돈 받고 사고파는 중세시대의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나이가 많거나 장애인, 정신지체 자, 산골 오지 농사꾼의 자식들이 대부분인 남편감들은
거의가 무식했고, 난폭한 성질머리에, 돈 주고 데려 온 여자라는 생각에
본전 뺄 요량으로 그저 두들겨 패고, 무시하고, 머슴처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물론 아내로, 며느리로 대접하며 집안 손을 이어 가는 집들도 있긴 했지만
모임에서 만나 나누는 얘기들은 사람 취급은커녕,
그저 신랑에게, 시 어머니에게 구박 받고, 무시당하고, 두들겨 맞은 얘기 들 뿐이었다.
자연히 모인 여자들은 눈물바다요, 원망스러운 자신의 신세타령이었다.
그 중에서 제법 일찍 눈을 뜬 사람이 모인 여자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돈을 모으고 말을 익혀 지옥에서 도망칠 것을 가르쳤고
거기에 베트남 인 브로커들까지 개입하여 돈 많고 늙어빠진 독신 노인들을 속여
2중, 3중으로 결혼 사기행각을 획책하는 일까지 발전하였다.
남선 댁 며느리도 그렇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남편이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했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손찌검이나 욕도 하질 않았고
시어머니도 모질게 대하진 않았지만
베트남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자신이 집안 형편 때문에 한국으로 팔려 왔다는 생각은
두고두고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선은 외로웠다.
말도 잘 안통하고, 친척도 하나 없는 타국의 산골 생활이 너무도 허무하고 답답했다.
그러다보니 브로커 중의 한사람인 베트남 청년이 그녀를 유혹했고
사건이 난 그날 남편을 식당에 잠깐 앉혀놓은 뒤, 그녀를 찾아 온 놈을 만났다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내가 혹여나 길을 잃었나 싶어 찾아 나선 골목길에서
놈과 끌어안고 있는 아내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혹시나 오해했거니 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를 사랑해주는 베트남 애인이라며 이제 자기와는 안 살겠다고
하며, 친정에 보낸 돈도 물어 주고 저 사람을 따라 가겠다고 한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나 싶었는데
그의 손에는 아까 장에서 샀던 부엌칼이 들려 있었고 놈과 아내가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남선 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우리가 잘못 한건 절대 아니야! 내 부처 같은 아들이 지 년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사람을 속이고 바람을 펴? 잘 죽은 거야. 그래 그런 년은 죽어도 싸!“
아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대전교도소에 갇힌 지 29년 째였다.
광복절이니, 새 대통령 취임이니, 무슨 명절이니 할 때마다 이젠 나오겠지!
오늘은 오겠지 하며 기다린 지 벌써 한 세대가 흘렀고 남선 댁도 머리가 허연 노인이
되어갔다.
아들놈이 스물 셋에 그곳엘 갔으니 벌써 50이 넘었다.
처음 두, 세 번 면회를 갔을 때는 아들이 어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창틀에 목을 매기도 하고, 머리를 벽에 찧어 자살을 몇 번 시도하더니
무슨 생각인지 조용하게 수감생활을 했고 모범수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워낙 죄가 중한지라 특별 휴가나 외박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무튼 아들이 마음을 잡고 열심히 살아 주는 것만 해도 남선 댁은 고마웠다.
아무리 죄가 무겁기로서니 아들이 늙어 죽을 때 까지 감옥에 있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으로 명절이나 아들 생일에는 꼭꼭 대전으로 가곤 했다.
그 아들의 생일이 바로 내일이었다.
오늘 나가는 장에서 떡집에 부탁해 둔 생일 떡과 먹 거리, 겨울을 날 의복까지
알뜰하게도 챙긴 남선 댁이 내 차에 오를 때 다리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낀 것도
그 때문이리라.
나는 내려왔던 청 고개를 끙끙 거리며 힘들게 오르면서 생각했다.
사람의 일생이나 나 같은 차의 일생이 같을 수는 없지만
하필이면 사람이 아닌 기계로 태어나 올 해가 지나면 뜯겨져 해체되고, 쓸 만한 부속은
분해해서 팔리게 될 것이고, 끝내는 짧은 생을 마감해야 하는 신세라 여기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남선 댁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아들처럼 희망조차도 나는 가질 수 없다니.
누가 나를 버스로 태어나게 했을까?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다리에 힘이 빠져 털털거리며 앞으로 나가질 못한다.
“아이고! 빌어먹을 이놈의 똥차가 또 말썽이네!”
장 씨가 좁은 길옆으로 나를 바짝 붙이더니, 시동을 끄고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과장 님요! 이놈의 차가 기어코 퍼졌니더. 렉카하고 대체 버스 하나 보내주소!”
하며 차에서 내리더니 담배를 꺼내 문다.
남선 댁이
“이게 뭔 일이래? 내가 시방 장에 갔다가 대전행 버스를 타야는데
차 놓치면 워쩔라고 그라는데?“ 하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직 10시도 채 안된 시각에 산꼭대기는 늦은 시월 햇볕이 따갑게 퍼지고 있었고
엔진이 벌겋게 달아 오른 나는
그저 한심하게 서버렸고 오늘 장날은 허탕이었다.
bus! stop
2025. 10.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