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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름과 불기둥 따라 건성건성 살기>의 줄거리 :
우리도 실제 삶의 현장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 볼 수는 없을까요?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삶을 건성건성 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삶을 치열하고 주도면밀하게 살려 한다면 절대로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서 잃지 않기 위한 싸움입니다. 이 일에 전념하느라 삶은 건성건성 살 수밖에 없으면 실제로 보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안내하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보입니다.
구름과 불기둥 따라 건성건성 살기
(출애굽기 13:1~2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본문에는 무교절과 초태생에 관한 규례 그리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목할 부분은 초태생과 무교절에 관한 내용이 묶여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구름과 불기둥 따라 건성건성 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라는 삶의 현장에서 매일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본문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따라가듯이 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출애굽 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된 이유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는 출애굽으로부터 지금까지 3,500년 동안 이어지는 선민들 전체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납득하실 수 있는 이유 안에서 이 세상의 삶을 아주 건성건성 살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건성건성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삶을 건성건성 사는 나를 하나님이 이해하실 수 있으면 반드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내 삶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나도 마음에서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삶을 건성건성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치밀하고 치열하고 주도면밀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 세상의 삶을 치밀하고 치열하고 주도면밀하게 사는 한 죽었다 깨나도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건성건성 살되 하나님이 ‘너는 그럴 수밖에 없겠다.’라고 납득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출애굽으로부터 3,500년 뒤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똑같이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깔리는 착각과 오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이 세상을 열심히 잘살아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실제는 다릅니다. 삶을 성실하게 잘살아 보겠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는데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3,500년 전 출애굽 당시에나 있었던 고대의 전설 중 하나로 여깁니다. 우리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건성건성 살지 않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숙곳에 이릅니다. 이제 숙곳에서 가나안까지는 시나이반도 북쪽으로 지중해를 따라서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2주일이면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이 정도의 여정은 남녀노소와 각종 가축이 함께 했음을 감안하더라도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당시 근동 지방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일이었습니다. 대상들이 낙타를 끌고 다니던 길이었고, 모세 또한 시나이반도의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설령 모세가 미디안 광야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애굽에서 배운 학문과 지리를 통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이 길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서 보호하고, 밤에는 영하로 내려갈 정도의 추위에서 보호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다만 인도하심의 측면에서 볼 때 다 아는 길을 굳이 이렇게 하실 필요가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마치 성인이 되어 장가 가고 시집간 아들과 딸을 시시콜콜 간섭하려는 극성스러운 부모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숙곳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결혼하여 맞벌이하는 자녀를 위해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교대로 반찬을 가져다줍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집안일에는 건성이 될 수밖에 없는 자녀의 상황을 납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오해했습니다. 내가 주도면밀하게 잘살고 싶은데 지혜와 힘이 모자라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 같은 방법으로 나를 도와주시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진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가정을 이룬 자녀가 맞벌이하느라 집안일은 건성이 될 수밖에 없음을 납득할 때 부모님들이 간섭하는 것처럼, 선민이 시간이 없어서 이 세상의 삶을 건성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하나님이 납득하실 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너희가 삶을 건성건성 살 때 반드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만 너희가 그렇게 사는 이유를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가정을 이룬 자녀가 맞벌이하느라 집안일에 건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하느라 이 세상에 대해 건성건성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본문에서 초태생과 무교절과 유월절에 대한 규례가 한데 묶여있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모시는 일을 위하여 출애굽을 통한 광야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이 되신다면 세상일은 건성건성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아침 일찍 나가면 저녁 늦게야 돌아오는 맞벌이 부부가 직장생활 때문에 집안일에는 건성건성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부모님들은 자녀의 맞벌이 생활을 납득하기에 이런저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신경 쓰며 싸우다시피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시며 ‘얘가 도저히 자기 삶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주도면밀하게 살아갈 수가 없구나.’라고 납득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삶은 건성건성 살아도 하나님이 납득하실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온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모든 신경과 의식과 마음을 하나님께 다 쓰느라 도저히 세상일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 세상의 삶을 하나님의 치밀함과 주도면밀하심을 통해 인도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그동안 삶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납득하실 수 있는 이유로 이 세상을 건성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세상 삶에 대해 진심이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진심은 세상 삶을 향해 있었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일을 위하여 진심을 다하느라 세상일에 건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과 힘을 다해 세상을 제대로 살아 보고자 하면서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말만 들어도 좋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는 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한 조건은 내 마음은 세상을 거의 떠나다시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 정도 신경을 쓰는 건성건성 살기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는 초태생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무교절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고 다시 초태생이 함께 묶여 언급됩니다. 앞서 우리는 유월절 규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유월절은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야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장자 재앙을 모면한 사건입니다. 장자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민의 각자 마음에 존재하는 첫 번째 대상을 장자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다른 존재의 있음을 느낌으로써 내 존재의 근거를 삼습니다. 이것이 존재감을 느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좋음을 찾고 채워서 만족감을 얻고자 합니다. 문제는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의 대상과 좋음으로 채워서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선민은 무조건 첫 번째 대상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자들입니다. 선민이라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하는 대상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대상을 첫 번째로 붙잡는다면 장자 재앙으로 상징되는 죽음이 임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사장님의 존재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사장님의 칭찬을 받아서 만족감을 느끼려 한다면 그 자체로 재앙입니다. 선민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본문에서 초태생과 무교절의 의미가 묶여있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인 무교병을 먹는 기간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은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으로 만족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에는 어쨌든 첫 번째 대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돈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붙잡았다면 돈을 위해 생각하게 되고, 감정이 움직이고, 뜻이 작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누룩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첫 번째로 붙잡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뜻이 작동함으로써 삶이 부풀려 집니다. 내가 삶을 제멋대로 부풀리는 동안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신 그림의 선이 무너집니다.
가끔 제 얼굴을 보면 젊었을 때와 달라진 것이 느껴집니다. 살이 찌고 늘어지면서 얼굴의 윤곽이 깨졌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그림 그려놓으신 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첫 번째로 붙잡을 때 누룩이 됩니다. 그 누룩은 하나님이 본래 그려놓으신 선을 부풀게 하고 깨뜨립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에 이어지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을 통해 장자가 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고, 무교절은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교절과 초태생 규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초태생은 첫 번째 것으로써 쉽게 말해 장자입니다. 이러한 초태생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아울러 하나로 묶는 개념입니다. 장자라는 말로 상징되고 비유되는 초태생입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셨고, 12절에는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초태생을 소유하셔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삼남은 필요 없으시다는 것일까요? 장녀나 딸들도 필요 없으시다는 것일까요? 심지어 가축에 대해서도 하나님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초태생으로 규정하신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남존여비 사회였습니다. 인구수를 셀 때 여자는 세지도 않았기에 출애굽을 할 때도 남자 장정만 60만이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회상을 고려할 때 초태생이란 단지 처음 태어난 수컷이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라는 단어를 항상 하나님과 연관시키라는 것입니다. 선민의 사전에서 ‘첫 번째’라는 단어의 정의는 ‘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태생 규례의 의미입니다. 당시의 장자는 가문을 이어받는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처음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로 삼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자매들도 장자를 볼 때 첫 번째와 하나님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첫 번째’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 초태생 규례의 의미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가 되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통해 광야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유월절은 첫 번째 장자에 대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무교절은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머리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규례가 초태생과 묶여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속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일을 하느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리면 세상에 대해서는 건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돈 문제에 관여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느라 돈 문제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임합니다. 내 몸을 떨기나무로 삼아 하늘의 에너지인 불꽃이 내려와서 하나님의 힘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진심으로 생각할 일은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돈 문제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어서라도 건성이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염려가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출애굽 하여 숙곳에 집결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시나이반도를 지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고 있었던 블레셋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은 이미 정비된 체제를 갖춘 선진국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430년 간 노예 생활을 하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충돌하여 전쟁이 일어난다면 겁을 먹고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지켜내려면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대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재정 문제를 대할 때 겁을 먹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에서 재정 문제를 첫 번째 관심거리로 갖지 않아도 될까? 정말로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그 상태를 유지해도 될까?’라고 겁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나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당장 마음에 겁이 납니다. 이러한 겁냄에는 ‘내가 건강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까? 마음으로 건강 문제를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기 위하여 전념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내가 신경을 쓰고 마음과 뜻을 다해봐야 별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일에 대해서 겁을 먹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걱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건강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나를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싸우는구나. 그러는 동안 건강 문제를 건성으로 대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치밀한 계획을 갖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 겁먹고 애굽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이 앞서가실 수 없습니다. 애굽은 하나님 이외의 세상 것들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끌어들이는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세상 문제가 생기면 겁먹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마음에 세상 것을 붙잡고 씨름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출애굽 당시에 한 번 일어나고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앞에서 초태생과 무교절에 관한 규례가 함께 언급되었습니다. 초태생은 하나님을 첫 번째로 여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무교절은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이 세상 삶은 건성으로 사는 연습입니다. 이것이 초태생과 무교절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기만 하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겠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실질적인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지켜내기 위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보면 알게 됩니다. 그럴 때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에 길이 열립니다. 마음에 길이 열림은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전제하에 이루어 집니다.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면 세상일에 대해서는 여력이 없기에 건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무엇을 할지가 마음에 보입니다. 길이 열리는 조건은 세상 삶에 대해서는 마음도 뜻도 힘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일을 만나면 두려워합니다. 세상일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세상일을 붙잡느라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서 놓칩니다. 이것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세상 것을 담고, 애굽에 머물러 있는 상태의 완악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실제로 출애굽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이 들어와 있다면 선민이 아닙니다.
한편 19절을 보면 특이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400년 전에 유골을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이 유언대로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갖고 나옵니다.
앞서 우리는 야곱이 죽었을 때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에 묻혔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기에 애굽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인식시키는 화살표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요셉의 유골은 선민에게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고 오직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격해 나가라는 화살표의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하늘을 가리키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싶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의 유골을 간직하고 가나안 땅을 향해 나간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죽음을 마음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로부터 이 세상 것을 첫 번째로 끌어들이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향해 감으로써 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모시게 됩니다. 또한 그 상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의 유골을 갖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요셉의 유언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가나안 땅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유골이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죽음을 늘 마음에 품고 다님으로써, 세상 것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끌어들이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마음에 품을 때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것들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끌어들이지 않게 됩니다. 초태생의 규례가 의미하는 대로 첫 번째라는 말은 무조건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있음의 존재감을 느낄 때도 첫 번째는 하나님입니다. 좋음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할 때도 첫 번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마지막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죄와 저주에 찌든 우리의 인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십자가를 붙잡고 아버지를 첫 번째로 모시려고 할 때 세상에 대해서는 건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며 납득하십니다. ‘너는 도저히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여력과 시간이 없구나. 그렇다면 나는 이제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2025년 하루하루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너의 삶을 인도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에 얽힌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알게 하여 주시고, 아는 바 대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붙잡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만 우리의 마음이 향해 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온전히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세상에 대해서는 살아갈 여력이 없게 하시고, 이러한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역사가 막힘없이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