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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지체입니까? / 2026년 5월 17일 주일 에배
본문 / 고린도전서 1:10-25
얼마전 대전 동물원을 탈출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던 늑구라는 늑대가 있습니다. 늑구는 동물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물원에 가족이 있습니다. 사육사들이 주는 먹이를 먹고 자랐습니다. 늑구는 사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늑구는 동물원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주변을 맵돌았습니다. 결국 마취총을 맞고 포획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동물원을 탈출한 늑구에게 집을 나갔다고 말합니다. 초췌해진 늑구를 보며 집을 나가 개고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늑구가 집을 나간 것입니까? 늑구는 집을 찾아간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늑구의 집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동물원에서 태어나 그 곳에 가족과 때에 따라 제공되는 풍족한 먹이와 사육사의 돌봄과 보호가 있어도 시멘트 바닥과 쇠창살 안은 늑구의 집이 아닙니다. 늑구의 집은 자유가 있는 광활한 자연입니다. 자기 집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하였어도 그 본능이 집을 그리워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여긴 내 집이 아닌데 말입니다.
자기 집으로 가기 위한 늑구의 탈출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본향으로 가기 위한 여러분의 그 믿음의 여정은 잘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 곳에 내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과 형제와 친구와 이웃이 있고 생업과 삶의 터전이 있지만 과연 이 세상이 내 집입니까?
사람들이 동물원을 늑구의 집으로 오해하듯이 지금 사람들은 자기 집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성도라고 불리우는 은혜를 받은 자들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집인 줄 압니다. 늑구가 왜 동물원을 멀리 벗어나지 못하였습니까? 동물원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닌 것 같아 탈출을 했어도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그 동물원을, 지금까지 안전하게 살아온 그곳을, 그곳에는 가족도 있지 않습니까? 멀리 벗어나는 것은 두렵고 힘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이 세상이 내 집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에게 세상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부정한 곳에서 나와따로 거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듯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나와 영원한 본향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여기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아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세상은 자기 집이 아님을 알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세상을 나와 즉 탈출하여 주님이 약속하신 그 말씀을 의지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닙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늑구처럼 멀리 떠나지 못하고 다시 세상으로 잡혀 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빨리 멸망할 세상을 떠나라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하여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아 기어이 저주를 받고만 롯의 아내처럼 성도들은 쟁기를 잡았지만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어찌 살 수 있겠는갸? 두려운 겁니다.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오기는 힘들다! 지난 주에 말씀한 것처럼 통발 안에서 나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오려고 해도 못 나옵니다. 작은 물고기들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어떻게 하기로 하였습니까? 세상이라는 그 통발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신인 재물을 두 주인으로 함께 섬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의 타락한 육적 자아를,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기 원하는 즉 하나님 같이 되겠다고 타락한 나의 교만한 자아의 주인 됨을 그대로 둔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겁니다. 그게 가능한 것입니까? 내가 주인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면서 주님에게 내 무릎에 앉으라는 겁니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에도 일어나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내 무릎 위에 앉으라고 하면 과연 그 위에 앉을 사람이 있을까요? 앉는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교회와 기독교의 문제, 성도 즉 그 믿음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너무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와 성도들이 정작 그들 안에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잃고 떠난 것입니다. 삶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것입니다. 주여 주여 입으로는 떠들지만 은혜는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주님의 지체는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지체는 되지 못합니다. 주님의 지체가 아니라는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은 받들지 않습니다. 말씀에는 순종하지는 않는 겁니다. 기록된 말씀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씀은 있으나 마나이며 수 백번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마음과 영에는 말씀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든 다른 하나님을 자기 임의대로 적당히 대충 섬기며 자신의 종교적 욕망과 자기 의와 이익을 위해 이용할 뿐인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즉 주인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니 자기 마음대로 믿을 뿐입니다. 주님의 지체가 아니라 주님을 지체로 부리는 것입니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지체가 있습니까?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지체일까요? 주님은 나의 머리이고 주인입니까? 제가 하늘영광 주님의 교회를 시작할 때 인쇄를 하여 벽에 걸어 놓은게 있습니다. 주님만이 이 교회의 머리이고 주인이다! 사람들이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놓고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그런 무식한 종자들은 본적도 없고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말이 맞습니다.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주님이 세우고 주인으로 있는 교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인과 머리로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되겠습까? 맞는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는 자기들이 주인 노롯하면서 주님이 세우시고 주인으로 계신 교회라고 하면 그게 더 가증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이 교회는 우리가 세웠고 우리가 주인이야!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은 결국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아닙니까? 우리가 벽돌과 건물과 집단과 단체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교회의 주인이 자기들이라고 지껄이나? 정말 어이 없어 하면서 '나'라는 그 몸 된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나를 사셨다고 하셨는데 과연 주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었습니까? 마음과 영과 삶에서 과연 주님은 나의 주인입니까? 머리입니까? 나는 주님의 지체가 되었습니까? 이 교회의 주인은 우리라고 외치던 그 기가막힌 자들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의 주인은 우리라고 주장하며 자기들 맘대로 목회자를 갈아치우는 포악하고 무지한 이들처럼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여전히 마음과 몸과 삶의 주인의 자리에 내가 있으면서 육체의 정욕과 탐심으로 나의 주인 됨을 섬기지는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5절의 말씀이 마음과 영에 그대로 살아 있습니까?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살게 하려 한다는 그 말씀을 의지하고 붙들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묻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는 주님의 지체입니까? 내 삶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제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이 되기 원합니다. 말씀의 나팔이 되기 원합니다. 제 입에 하나님 말씀만을 넣어 주십시오. 저를 주님의 입으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야고보는 증언합니다. 어찌 한 우물에서 단 물과 쓴 물이 나오겠느냐?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이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 어찌 무화과나무에서 감람열매를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겠느냐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이 시대에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분쟁과 다툼은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인이라고 교만하게 타락한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도 나 때는 말야 하며 '나'를 주장하면 꼰대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물 세례는 받았지만 그러나 성령으로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주장합니다. 주인노릇하는 그 교만한 내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겁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어떤 일이 나타납니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자기 자리를 찾는 겁니다. 주인이 바뀌는 겁니다. 거듭나는 것이니다. 주인과 머리로 있던 교만하고 타락하고 미련한 내가 타락한 나를 대속해 주신 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죽고 진짜 나의 주인이며 머리이신 주님이 내 마음과 영과 삶과 인생의 주인과 머리가 되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주님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입과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체가 되는 그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진짜 내 자리인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되는 겁니다. 그 가지에서 열매가 열리는 겁니다. 그 열매가 주님의 지체가 된 증거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지체가 된 즉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회개하고 거듭나 접붙임을 받은 그 가지 즉 주님의 종의 자리에 있는 증거와 열매가 이 세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이지만 않으면 다 압니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 믿음이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의 인격과 언어와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가치가 무엇인지 내 삶이 가감없이 다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양심이 나를 교훈하지 않습니까?
그러고도 네가 목사냐? 저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화인을 맞고 눈이 비늘로 덮이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일 뿐입니다. '나'만 있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갇혀버린 겁니다. 말씀을 덮어놓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설령 말씀을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기도해도 주문일 뿐입니다.
마녀도 거울을 보았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냐? 그러나 성도들은 말씀의 거울을 보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자신 안에 갇혀 누가 주인인가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내가 주인이고 머리입니다. 자신의 주인 됨을 포기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습니다. 주님의 지체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주님을 자신의 지체로 부려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 됨을 십자가에 부인하고 못을 박는 것을 원치 않는 그 교만하고 타락한 '나'로부터 분쟁과 다툼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서로 머리가 되겠다고 싸우고 내가 주인이라고 다투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많은 분쟁과 다툼이 있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양보하며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만 성도들은 죽으면 죽으리라 싸움니다. 희생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 합니다. 저주지 못하는 겁니다.
자신의 주인 됨을 주장하는 즉 하나님 같이 되겠다고 타락한 그 교만한 자아가 어설프게 물 세례를 받고 즉 종교적인 의를 입고 더 교만해지고 더 포악해진 것입니다. 내가 더 강해진 겁니다. 자신의 주인 됨에 면류관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에서 더 교만해지고, 직분을 받고, 은사를 받고는 우쭐대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가 커질수록 교만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됩니다.
두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보리처럼 고개를 뻣뻣이 드는 사람이 있고 점점 고개를 숙여가는 벼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믿어도 자신의 주인 됨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하고 그저 '나'만 주장하는 보리와 같은 교만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교만한 자아를 십자가에 부인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주인으로 따라가는 벼와 같이 겸손하게 익어가는 믿음은 적은 것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부자 청년과 같이 영생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을 잃어도 영생만은 얻기를 원한다면 왜 내가 내놓는 삶을 통해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주님의 지체인지 주님이 나의 지체인지 말입니다. 주님이 나의 머리인지 내가 주님의 머리가 되었는지 말입니다.
저는 내가 주인의 자리에 앉아 주님을 지체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고 목회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제 몸과 물질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그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분명히 나를 높여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심은대로 거둘 것이다.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라가 되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인생이 아주 괴롭게 된 것입니다. 목회가 대박이 날 줄 알았는데 쪽박이 났습니다. 형편 없이 쪼그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치셨고 저는 그런 하나님께 실망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데 나에게 이럴 수가 있나? 낙심하고 불평하던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 너를 위한 것이었다. 저는 내가 했던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을 위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십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 조금도 아끼지 않습니다. 제 목숨을 드리겠나이다!
제 자신도 저에게 속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속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 너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서 무너졌습니다. 자아숭배의 바벨탑이 무너져 내린 겁니다. 비로소 제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았습니다. 교묘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포장하였지만 사실은 내가 머리이고 주인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면서 나의 그 주인 됨을 높이고 확장하기 위해 주님을 나의 지체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했던 제자들과 같습니다. 지금 나는 누구일까요? 십자가에 나의 그 주인 됨과 자아숭배를,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못을 박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주님의 지체입니까?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십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하십니까? 아직도 여전히 나의 주인 됨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을 원치 않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며 주님까지 나의 지체로 이용하며 자신의 주인 됨을 숭배하는 자는 아닙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주님의 지체가 된 자만이 즉 주님과 한 몸 하나가 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받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받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한 베드로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젊었을 때에는 네가 원하는 데로 다녔지만 이제 내가 너를 원치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원치않는 곳으로 데려가도 따라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길이어도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나의 교만한 자아와 그 자아숭배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에 자신의 주인 됨을 못을 박고 종의 자리로 내려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주님의 지체가 된 사람만이 주님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 물었다던 어떤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납니다. 왜 교회에는 다투고 싸우는 자들이 많습니까?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다 가짜다. 교회 안에 가짜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십자가를 마음와 영으로 만나 그 십자가의 용광로를 통과하고 나오지 않으면 다 가짜가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육신의 이익을 위해 사고 파는 삯군이 될 뿐인 겁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받들지 못합니다. 말씀과 십자가와는 상관없이 사는 겁니다. 여전히 자신이 주인인 겁니다. 주여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주님의 지체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교회에 오셨을 때 교회 안에 가짜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섰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도 가짜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기록한 서기관들도 가짜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열심을 낸 바리새인들도 가짜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진짜였습니까? 호산나를 외치던 자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이 시대는 다를까요? 더 하면 더했지 덜 하겠습니까? 더 교묘해졌을 뿐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어도 모르는 시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내 죄를 대속해 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십자가는 용광로입니다. 주인 노릇하는 교만한 내가 죽고 주님의 지체로 다시 사는 용광로입니다. 그 용광로를 통과하셨습니까?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신 대속의 십자가의 그 뜨거운 용광로의 은혜 안에서 나의 주인 됨이 그 온갖 자아숭배와 육체의 정욕과 탐심과 나의 모든 것이 다 녹고 녹아지는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죄를 대속해 주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만이 사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죽을 때, 녹아질 때 주님과 한 몸이 되고 예수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진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을 이룬 사람들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데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지체가 되었습니까?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이제는 예수로 삽니까? 예수로 충만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셨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사십니까? 주님을 위해 사십니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주님과 함께 영광도 받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실 때 주님은 나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주님의 지체가 됩니다. 주님의 지체가 되어 믿음으로 승리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주님과 함께 하나님과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함께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