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본 문 / 로마서 11장 19∼24절 (로마서 52)
주 제 /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또한 준엄하시니, 그리스도인은 자만하지 말고 두려워해야 한다.
작성일 / 2026년 5월 24일. 성령강림절. (№ 26-21)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 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롬 11:19∼24)
Ⅰ 유대인의 실족과 이방인의 구원 (롬 11:11∼12)
2026년 신앙생활의 목표를 외치자. “구원의 복음을 배우자!”(롬 1:16)
로마서 9∼11장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 가르친다고 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즉흥적이지 않고 치밀한 계획에 의한다는 가르침이다.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가르친다.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 문제라는 가르침이다. 로마서 10장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가르친다. 복음에 순종하여 의롭다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복음을 배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계획’을 가르친다. 이스라엘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면서 복음에 순종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가르침이다. ‘남은 자를 통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질투를 통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배웠다. 오늘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계획’에 대한 네 번째 가르침이다.
Ⅱ 믿지 아니 함으로 꺾이고, 믿음으로 선다. (롬 11:19∼22)
로마서 11장 11∼12절을 보니,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롬 11:11).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다.”(롬 11:12). 이 가르침을 받은 이방인 성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로마서 11장 19절을 보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롬 11:19). “이방인 성도들을 접붙이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꺾으셨구나!” 이렇게 우쭐대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서 11장 20절을 보라.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롬 11:20). “옳도다!”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누가 꺾이고, 누가 접붙임 받았는가?” 이것이 중요하지 않고, “왜 꺾이었고, 왜 접붙임 받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믿지 않음으로 꺾이었고, 믿음으로 접붙임 받았으니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이방인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무엇일까? 로마서 11장 21절을 보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 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1). 우쭐대지 말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원 가지’라고 말한다. 조상대대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살던 민족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이 믿지 않으니 아낌없이 꺾으셨다. 그런데 원 가지가 아닌 이방인 성도들이 믿음을 버린다면 하나님이 과연 그들을 아끼어 꺾지 않으실까? 바울은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항상 자신의 믿음을 관찰하면서 잘 가꾸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바울을 로마서 11장에 대입하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써 ‘원 가지’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율법주의에 눈이 멀어 구원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잘려나간 이스라엘이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구원의 복음을 믿게 되었다. 믿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바울이 자신의 마음가짐을 고백했다. 빌립보서 3장 12절을 보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완결되지 않았으며, 사도로서의 사명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구원도 사명도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즉 ‘구원과 사명을 잡으려고’ 달리는 중이라고 고백한다. 접붙임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얼마든지 다시 꺾일 수 있다는 뜻이다. 참감람나무에 붙어있게 하는 접착제는 ‘믿음’이니 자신의 믿음을 굳게 붙잡으려고 달리는 사람이다. 우쭐댈 여유가 없다.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이다. ‘참감람나무 진액’으로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영성’으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다 이루었다는 자만에 빠지면 안 된다.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인하여 꺾이었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믿음이 병들지 않도록 가꾸면서 살게 된다.
Ⅲ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에 주목하라. (롬 11:22∼24)
로마서 11장 22절을 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바울은 “…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고 한다. 하나님은 인자하시지만, 또한 준엄하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준엄하실까? “…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 즉 믿음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원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버리니 매우 준엄하게 잘라내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도 믿음이 병들어서 넘어지면 아낌없이 잘린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믿음이 병들지 않도록 보살핀다.
누구에게 인자하실까? “…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 즉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떠나지 않는다.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늘 다음에 담고 사는 사람들, 그 은혜가 너무 크기에 다른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잘려나갈 일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래야 자신의 믿음을 보물처럼 여기고, 그 믿음이 빛을 잃지 않도록 가꾸면서 살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 3:12a) 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로마서 11장 23절을 보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 11:23). 믿지 않음으로써 꺾이었던 이스라엘일지라도 그 불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을 환영하실 것이라고 한다. 한 번 꺾이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믿음이라는 접착제를 가지고 오면 다시 참감람나무 가지로 회복되어서 참감람나무 뿌리가 주는 진액으로 살 수 있다. ‘탕자의 비유’(눅 15:11∼32)를 생각해 보라.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먼 나라로 떠나서 허랑방탕하던 ‘탕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먼 데까지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아 맞이한다. 잔치를 열어 환영한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킨다. 지난 과거를 따지지 않고 다시 접붙인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이다.
로마서 11장 24절을 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 11:24) 이방인 성도들의 ‘본성’은 ‘돌감람나무 가지’였다고 한다. 우상숭배, 세속주의, 물질주의에 빠졌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복음을 믿으니 ‘본성’을 따지지 않으시고 ‘참감람나무 진액을 공급받는 자리’로 접붙여주셨다.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에 눈이 멀어 잠시 불신의 늪에 빠졌을 뿐 본성은 ‘참감람나무 가지’였다. 그들이 다시 믿음을 회복한다면 본성이 참감람나무 가지인데 왜 접붙임을 받지 못하겠는가?
그러면 이방인 성도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일까? 우쭐대며 꺾인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것일까? 아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삶에 배어나게 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부러워하도록, 그래서 믿음의 세계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의 사명도 동일하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참 많다. 아무리 권면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들도 참 많다. 그들이 부러워하도록 일상에서 ‘구원의 즐거움’이 배어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질투하여 믿음의 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도>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이 ‘구원의 즐거움’이 배어나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믿지 않거나, 믿음을 버린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