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酌
일주일 휴가 받아 잠시 귀국했다 내일 다시 일자리로 복귀하는 아들과 소맥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는다. 아들이 암스테르담에서 일하다 보니 소주가 마시고 싶단다. 작년 여름에 암스테르담에서 둘이 양주 한 병과 와인 한 병을 부어대며 제 칠순을 축하해주고 다시 마주하는 자리다.
”일은 어때?“
”힘들죠. 우리 같은 영업사원들의 숙명은 실적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계속 실적압박 속에 살아요.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아니면 못 견뎌요.“
술자리에서 제 주법은 주로 듣다가 상대가 얘기하는 내용과 연결되는 질문을 계속해 나가면, 어느새 상대가 얘기하고 싶은 내용의 전반을 듣게 되는 식이다. 대작은 상대의 속마음이나 비밀을 많이 알게 되는 가장 효율적 방법이다.
술잔이 이어질수록 자신이 하는 일과 가정생활과 자식 교육 등 삶 전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고맙다. 지난 1년 사이에 엄청난 경험과 문제 해결, 경륜이 추가되어 훨씬 단단하고 무겁고 강한 돌덩이가 앞에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작년과 달리 술 따르는 자세가 제사 때 祭酒 따르듯 정중하기 그지없다. 속으로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래?’한다.
”작년만큼 술을 못하시네요?“
”요새 술이 몸에서 안 받아. 그동안 마실만큼 충분히 마셨어.“
‘아하! 이 녀석이 점점 기력이 약해지는 제 모습을 보고 나름 느낀 바가 있어 갑자기 예를 차리는 거구나! 기분이 묘하다. 그래서 양주 선물도 최고로 사서 왔구나! 얼마 안 남았으니 좋은 술 많이 드시라 이거지? 아들은 작년보다 더 가볍고 약해지고 깊어지는 아버지를 느끼고 있겠지?’ 자연스러운 거다. 한쪽이 더 무거워질수록 한쪽은 더 가벼워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순리에 따르는 삶! 더 뭣을 바라겠는가?
”선(손자)이 대학 입학 때까지 여기서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디 그게 네 맘대로 되겠니?”
“어떻게든 그렇게 하려고 에미와 계속 상의 중입니다.”
“내년 4월에 엄마랑 함께 오실 거죠?”
“솔직히 나는 여기서 하루하루 보내는 일상에 너무 감사하고 만족해. 그래도 가야지. 고맙다.”
다시 확실하게 드는 생각은 자식은 이미 물리적으로도 너무 떨어져 있고 정신적으로도 완전한 독립적 존재로 우리(할멈과 저)와는 무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뒤가 서늘해지고 낭떠러지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마지막까지 독립적 존재로 살기 위해 부지런하고 규칙적으로 죽어라 아침 걷기 운동과 근력 운동을 계속하자고 결심한다. 마지막까지 존엄한 삶을 위한 유일한 생존책이다.
그래도 독일 일터로 이틀 먼저 떠난 딸애가 가면서 “아빠! 나중에 아빠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오면, 내가 일을 줄이고 아빠를 돌봐 줄게. 원하면 우리 집에 와서 내 보살핌을 받을 수도 있어. 아빠는 보니까 비록 느리지만 천천히 계속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삶을 사는 것 같아. 우리 식구 중에 제일 잘 살아. 굿! 마음 편히 잘 지내셔!” 말이라도 너무 고맙다. 그애가 지금까지 저를 울린 것이 몇 번인가? 그러면서 봉투를 건넨다. “이건 꼭 아빠를 위해서만 써! 다른 사람 위해서 말고!”
가고 나서 봉투를 여는데 눈이 흐려져 얼마인지 잘 안보인다. “그 애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어떻게 쓰겠는가?” 냅다 할매를 부른다. “여보! 이거 J가 준 봉툰데 자네가 알아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