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우리나라와 일본 경차의 크기는 법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작아서 전장 3,400mm, 전폭 1,480mm 전고 2,000mm 라는 수치를 가지고 있죠. 경차의 법정 제한 폭이 레이나 모닝보다 무려 120mm나 작습니다. 더 홀쭉하죠.
갈수록 값 싸고 연비 좋고 효율적인 ‘도구’ 개념의 차만 잔뜩 팔리는 일본 자동차시장에서 거의 유일하게 활기를 잃지 않은 게 경차시장입니다. 그래서 경쟁도 치열한데요,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박리다매라는 경차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더 매력적인 경차를 내놓아 한 대라도 더 팔기 위해 안달입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더 극단적인 경차가 나왔습니다.
바로 이 차. 얼마 전 다이하츠가 내놓은 웨이크라는 모델입니다. 첫인상이 무척 독특하지요. 폭 대비 지나치게 높은 키 때문에 다마스에 가까운 화물차 느낌이 물씬 납니다.
웨이크는 현재 일본 시장의 경차 중 (다마스처럼) 엔진이 바닥 아래 위치한 옛날 화물형 방식의 경차를 제외하고는 전고가 가장 높습니다. 한마디로 2박스 형태의 일반적 승용형 경차 중에서 가장 키가 높다는 말이죠.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일본 경차의 전폭 규정이 우리나라보다 120mm나 작기 때문에 레이보다도 훨씬 좁고 높아 불안해 보입니다. 디자인적 불안함을 실제 주행에서 느낄 수 없도록, 다이하츠는 무게중심을 낮추기 위해 엄청나게 고심했다고 합니다.
이 차의 등장에는 크게 두 차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먼저 2013년 동경모터쇼에서 선보였던 데카데카라는 컨셉트카가 웨이크의 실질적인 베이스모델입니다. 그리고, 다이하츠가 웨이크를 만들 때 의식했던 모델은 그 이전까지 승용형 경차 중 가장 높은 키를 자랑했던
혼다의 N박스라는 차죠. 극도로 줄인 엔진룸과 있는 힘껏 키운 전고로
엄청난 실내공간을 제공한 혼다의 경차입니다. N박스의 실내는 단순히 넉넉할 뿐 아니라 여러 레저활동에 걸맞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웨이크는 N박스를 강하게 의식하고 나온 차라 전고뿐 아니라 N박스의 강점이었던 사항들을 모조리 따라잡으려는 모습입니다. 일례로 N박스가 내세웠던 타사보다 앞선 실내 수납공간을
웨이크도 엄청나게 갖췄습니다. 대시보드와 앞좌석만 봐도 수납공간이 이렇게 즐비합니다. 하나하나 세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군요. 어디에 뭘 넣어뒀는지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요사이 일본의 공간중시형 패밀리카가 갖추고 있는 시트 구성의 다양성은 웨이크에도 당연히 이식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굳이 차에서 이렇게 의자 펴놓고 잘 일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지만, 캠핑족들에게는 매력적인 공간임에 틀림없지요.
웨이크는 이렇듯 캠핑족이나 아웃도어족들을 위해 엄청난 기능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수많은 이점과 기능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홈페이지에는 각 공간의 구체적인 치수를 알려줄 뿐 아니라,
각종 짐을 실을 때 이 차의 실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세히 보여줍니다. 1번은 통상적인 트렁크 사용모드이고요, 2번은 바닥을 드러내 실내 전고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그림입니다.
3번 사진은 트렁크에 칸막이를 추가해 2단으로 사용하는 모습. 4번 사진을 보니 칸막이가 총 2개 제공되나 봅니다. 짐칸을 3칸으로 나누어 사용할 수 있군요.
그런데, 이 차의 쓰임새에 대한 내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예 실제로 어떤 물건을 얼마나 싣고 무엇을 즐길 수 있는지 까지 이렇게 보여주더라고요.
1번 그림은 네 명이 캠핑을 떠날 때의 모습. 어른 둘, 아이 둘과, 이들을 위한 모든 캠핑 짐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놨습니다. 저걸 모두 실을 수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3번 그림은 어른 두 명이 낚시를 떠날 때의 모습. 각종 낚시도구에 더해 2인용 고무보트까지 실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둘 모두 인원수와 물품의 종류, 그리고 이들을 어디에 어떻게 실었는지 까지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설명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용법을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나 싶을 정도지요. 잡지도 설명서도 아닌 홈페이지에서부터 말입니다. 처음부터 많고 깊은 내용을 어필하려는 듯한 인상입니다.
요사이 일본 경차들에 흔한 안전관련 옵션들도 풍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형급 이상에나 달려 나오는 레이더 충돌회피장치를 일본에서는 1000만원 언저리의 염가모델에도 장착할 수 있지요. 웨이크의 가격대는 원화로 대략 1300만원부터 1800만원 사이.
이쯤에서 잠시, 제가 오래 전 썼던 <갈 데까지 간 일본 경차(여기 클릭)> 라는 칼럼이 생각납니다. 이 글에서도 언급했듯 일본 경차는 출력과 크기라는 제약을 두고 있지요. 그 제약의 한계까지 늘리려다 보니 잘 팔리는 메이저급 경차들은 모두가 비슷해지고 있다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간과했던 게 있었네요. 아직 여유가 남아있던 높이. 이제는 그 높이마저 한계까지 채우고자 내달리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한 대라도 더 팔기 위해, 처음으로 이 차를 처음 접하는 홈페이지에서부터 웨이크의 다양한 사용법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입니다. 정말, 숨 막힐 듯한 경차의 제약 속에서 뭐라도 해보려고 브랜드들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모습이군요.
마치 식물을 항아리에 넣고 키우면 항아리모양으로 자라나듯, 온갖 제약 끝에 살아남고자 하는 일본 경차의 몸부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소비자로서는 좋은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