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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직한 역사를 위한, 나의 외침 원문보기 글쓴이: 이드
맬컴X와 마틴 루터 킹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유색인들에게 교육, 취직, 거주지, 각종 시설물 등 여러 일상적인 범위에서 금지, 제한하는 식으로 가해져 왔었다. 이렇게 인종차별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상황에서 많은 백인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 들여왔고 그들의 생각과 양심도 변질되었다. 최근,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며 여러 제도가 바뀌었지만 개인의 정신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인종차별이 잔존하는 것이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선 투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1670년대,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지속된 차별과 불평등에 대하여 흑인들은 자유와 인권을 위하여 끊임없이 저항해왔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점차 흑인들의 사회참여가 증가하고 사회 내에서 그 존재를 인식시켜 나갔고 이 시기는 50년대와 60년대의 활발한 민권운동의 파종기로 인식된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인종주의와의 전투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인종주의의 위험성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대부분 흑인들의 기본 생활조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흑인들의 민권이 전국적인 관심을 지닌 문제로 출현하기 시작하였지만, 흑인들은 여전히 참정권의 박탈, 흑백분리법의 적용, 저소득의 생활조건 하에 있었고, 대부분의 가난하고 무기력한 흑인들은 완전한 시민법 획득을 위한 투쟁이나 기타 여러 가지 불평등을 철폐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흑인들은 1940년대부터 활발히 짐 크로우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하지만 그 무렵부터 백인들과의 직접적인 충돌도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사회의 주목을 끌고 실질적인 법안 제정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다.
그리고 운동의 중심에는 맬컴 X(Malcolm X, 1925-1965)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라는 두 명의 거인이 있었다.
마틴 루터 킹과 맬컴 엑스
맬컴과 마틴은 외모부터 사뭇 다르다, 맬컴이 날카로운 눈과 긴 이목구비의 카리스마 넘친 모습이라면, 마틴은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모습으로 친근하고 푸근한 인상을 풍긴다.
외모처럼 두 사람이 태어나고 걸어간 길과 그들이 선택한 사상과 투쟁 방법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흑인 해방과 인간 해방을 위해 일평생 투신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겸허하게 배우고 서로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우연하게도 만 40세를 채우지 못한 나이에 저격을 당해 죽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동지와 같았다. 하지만 맬컴이 흑인의 손에, 마틴은 백인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 두 사람의 대조된 삶은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면 맬컴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틴이 대학을 다니며 순조로운 삶을 즐기는 동안, 그 나이의 맬컴은 형무소 생활을 경험해야만 했다.
특히 맬컴의 유년 시절은 너무나 불우했다. 맬컴의 아버지는 광신적 백인우월주의 폭력단체인 KKK 단원들에게 참혹하게도 산채로 열차 선로에 놓여 져서 두 동강으로 살해되었고, 백인에게 겁탈당해 출생했던 어머니 루이즈는 이 일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 후 어느 날 주 복지국 직원들이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으며, 맬컴과 남은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에 맡겨졌다.
마틴의 멘토는 당시 저명 인사였던 모어하우스 대학의 총장이자 목사인 메이스(Benjamin Elijah Mays)였고 맬컴의 조력자는 이슬람 민족주의자 단체의 설립자이자 리더였던 모하메드(Elijah Mohammed)였다.
1957년 마틴이 남부 기독교 리더십 컨퍼런스를 설립할 때 맬컴은 1953년부터 1964년 사이에 이슬람 사원에서 봉사하였다. 1952년 가석방으로 출옥한 맬컴은 성을 X로 바꾸고 이슬람 전도사로 변신해서 할렘의 옛 이웃을 찾아다니며 백인의 인종정책을 비판하고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엑스`라는 성은 그가 회교(Black Muslims)에 입교하면서 원래의 성을 버리고 대신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원래 그들 조상의 것이 아니고 이들을 노예로 부리던 옛날의 백인 주인들이 멋대로 붙여주었던 것이니만큼, X자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이름을 상징한다는 것이 성을 바꾼 이유라고 한다.
흑인 해방을 위한 행동과 방향 역시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 마틴의 부모는 "기독교인은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백인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기독교신앙은 흑인의 존엄성과 인간의 평등함을 가르쳤다. 이런 과정에서 마틴은 고귀한 윤리적 기준, 혼신을 다해 일하기, 지적이고 강한 리더십의 필요성, 비폭력의 원칙을 강조한다. 마틴과는 달리 맬컴은 신의 정의, 흑인 간의 화합, 정신적인 자각, 자기방어, 흑백분리를 강조한다. 그가 진심으로 바란 것은 미국의 파멸이었다.
종교적인 관점도 달랐다. 흑인 기독교는 통합주의와 관련이 있는 반면, 이슬람 민족은 반(反)백인, 친(親)흑인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였다. 정의와 사랑, 희망은 흑인 기독교 전통과 마틴 신앙의 핵심이었다. 흑인 침례교 전통 속에서 자란 마틴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확신, 노예와 주인의 화해의 꿈을 갖게 되었다. 십자가는 분리에 대한 반대, 통일과 화해, 비폭력의 원천과 표현이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백인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 마틴과 달리 맬컴에게 백인의 천국은 곧 흑인의 지옥이었다. 그의 신념은 이슬람 민족주의와 어릴 적의 소외감으로부터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으로 내려갔으며, 흑인 하층민의 욕구를 반영했다. 그는 사랑보다 정의를 강조했고, 알라 신의 정의로운 심판과 백인의 임박한 몰락을 선포하였다. 그는 백인 지배의 종교인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고, "천성적으로 흑인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흑인(민족)성의 회복을 주창하였다. 맬컴은 기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도 있다.
"기독교가 미국에서 이룩한 가장 큰 기적은 백인 기독교도의 수중에 있는 흑인들이 비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2천2백만이나 되는 흑인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기적이다!”
1963년 8월 28일, 마틴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워싱턴 평화행진 연설’을 한다. 목적은 포괄적인 민권 법안의 제정이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지금 고난을 마주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건국 신조의 참뜻을 되새기며 살아가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이 연설은 미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4대 명연설’에 포함됐다. 킹 목사는 이듬해인 35세 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그러나 맬컴은 이 행진을 비판했다. “살아 있을 때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백 년 전에 죽은 대통령의(링컨) 상(像) 앞에서 백인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왜 흑인들이 열광해야 하는가?” 맬컴은 백인들을 ‘악마’라 칭했고, 이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공적(公敵) 1호가 되었다.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기에 소총을 들고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변하게 된다. 맬컴은 무하마드의 정치적 무관심, 그의 타락과 위선을 목도한 후로 그와 서서히 결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통합주의, 흑인 민족주의와 시민운동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생애 마지막 한 해 동안 그는 인종과 종교에 관한 흑인 무슬림의 믿음을 서서히 버리면서, 미국에서의 흑인 자유 투쟁에 대한 자신의 헌신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류애를 위한 보편적인 시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 목표에 이르기 전에 그는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맬컴 엑스의 치열했던 삶은 늘 백척간두에 선 위태로운 삶, 어떤 의미에서는 비틀거리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흉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억압받는 자들의 저항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그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한다면, 그는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맬컴의 죽음 이후 마틴도 비로소 '아메리칸 드림'에서 급진적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고, 맬컴이 꾼 악몽의 공포를 서서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백인의 무자비한 폭력과 흑인의 비참한 현실을 점점 더 심각하게 깨닫게 된 후로 미국에 대한 마틴의 낙관적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법적, 형식적 평등보다 실질적, 경제적 평등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블랙 파워'를 목도한 후부터 그는 흑인의 자부심과 자기 결정권을 위해 흑인 분리주의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을 통한 미국의 폭력성과 경제적 모순에 대한 실망감은 미국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그도 미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고, 그 결과로 맬컴이 사망한 지 3년 후에 마틴도 백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맬컴 액스와 마틴 루터 킹, 너무나 다르면서 너무나 닮은 이 두 거인의 삶과 꿈은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왜 지금도 없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주고 있다. 아래에 아메리카 이주 이후 미국 흑인들의 삶의 궤적을 정리해본다.
아메리카 이주 흑인인권 이력서
1619~1776 식민시대 |
네덜란드 상인이 1619년 20명의 아프리카 사람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처음 데려왔다. 이 후 흑인수가 증가했고 1705년 버지니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는 노예법을 제정했다.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던 1776년까지 약 50만 명의 흑인이 미 대륙에 있었고 이들은 자유를 기대하며 양쪽에서 싸웠다. 약 2만 명의 흑인이 자유를 약속받고 영국군에 대항했지만 전쟁 후 살아남은 1만 2,000명은 서인도로 팔려갔다. |
1780~1860 노예시대 |
대다수 미 건국의 아버지와 초기 8명의 미 대통령들은 많은 노예를 갖고 있었다. 당시 노예제 폐지를 위한 다양한 저항이 이뤄져 1787년 압살롬 존스는 흑인해방단체를 설립, 1800년 의회에 노예거래를 중단하고 노예제의 점진적 폐지를 촉구했다. 의회는 1807년 그 다음해 이후에는 노예를 수입할 수 없다는 법을 통과했다. 이에 대규모 농장주 등은 마감 전 가능한 많은 수의 노예를 수입했고 밀수도 성행했다. 1860년 미 대륙에는 400만 명의 흑인노예가 있었다. |
1860~1900 남북전쟁 |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으로 매사추세츠 54연대 등 약 20만 명의 흑인 군인이 양산됐다. 이들의 용기는 13, 14, 15차 헌법 개정을 가져왔다. 13차 헌법 개정으로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프리드멘 사무실이 창설, 이를 통해 4,000개 이상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흑인들은 그들 자신의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1877년까지 60만 명 이상의 흑인계 미국인들이 학교에 등록했고 흑인남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지방 및 연방정부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
1900~1950 대이주 |
1915년과 1920년 사이 약 50만에서 100만 명의 흑인들이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D.W. 그리피스의 1915년 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은 음란한 흑인남자와 그들의 부상이 위협이 된다는 인종차별 생각을 강조했다. 이에 독립 흑인 영화제작자들은 1919년 ‘인종의 탄생(The Birth of a Race)’이라는 영화를 제작해 대응했다. 1925년 알랜 로키의 ‘새로운 검둥이(The New Negro)’라는 영화는 할렘의 르네상스를 가져왔고 라차드 라이트의 저서 ‘토착인의 아들(Native Son)’은 첫 달에 25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1950~1970 인권운동과 베트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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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행동가들은 통합을 거부하고 흑인 분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주된 내용은 동등한 권리와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요구였다. 랄프 엘리슨은 1953년 ‘보이지 않는 남자(Invisible Man)’라는 책으로 전국서적상을 수상했다. 1955년 말 흑인여성 로자 파크가 버스 내 백인자리 양보 거부로 경찰에 체포되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 시작되었다. 로자 파크의 멘토인 엘라 베이커는 1960년 학생비폭력위원회를 조직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워싱턴 시위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연설을 했고 1964년 시민권법안, 1965년 투표권법안이 통과되었다. |
1970~2006 주류 교체 |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자 흑인들에게는 전례 없는 기회와 성장이 이뤄졌다. 1973년까지 80명 이상의 흑인 시장이 있었다. 흑인 중산층이 놀랍게 성장했다. 1974년 행크 아론이 베이비 루스의 홈런 기록을 갱신했다. 1983년 대규모 캠페인 후 마틴 루터 킹 목사 생일이 국가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84년 제시 잭슨은 민주당 대통령 결정자 선거전에서 3,200만 표를 얻었다. 1989년 흑인 더글라스 윌더가 버지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마이클 잭슨부터 마이클 조던 등 스포츠와 연예계에서 흑인 명사들이 등장했다. 2004년 일리노이에서 흑인 바락 오바마가 같은 흑인 알란 케이스를 누르고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공화·민주 양당 후보 둘 다 흑인인 첫 사례였다. 2009년 미국제44대 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 취임 |
맬컴 엑스와 마틴 루터 킹으로 상징되는 20세기의 치열한 인권 투쟁을 통하여, 이제 법적으로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민권운동이 흑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흑인 빈민층으로 드러난 점에서 보듯 흑백의 빈부격차와 흑백차별, 인종차별은 여전히 큰 문제로 남아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인들의 선민의식이다. 함, 야벳, 셈 이 세 형제에 관한 신화를 깨뜨리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성서와 노예제도
1791년 2월 26일,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Rev. John Wesley, 1703-1791)는 노예무역제도 폐지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영국의회의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편지를 썼다.
“하나님의 힘이 당신을 키우지 않았다면 당신은 종교와 영국, 더 나아가 인간 본성의 적인 혐오스러운 그 죄악에 맞서 영광스러운 투쟁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해 아래 가장 사악한 노예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노예제도가 인류가 만든 제도 중 가장 사악하다는 웨슬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노예제도는 북아메리카 연방에서 가장 더러운 오점이다. 노예제도는 한 인간을 노동의 도구로 삼고, 그들의 자유를 통치해야 한다는 기만으로부터 왜곡되어 왔다.”라고 주장한 미국 제6대 대통령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1848)의 의견에도 공감을 표시한다.
문제는 가장 더럽고, 가장 사악하다는 노예제도가 인종차별이라는 용서할 수없는 옷을 입고 지금도 생존하고 있으며 그 서식처는 애덤스의 고국 미국이 가장 혐의가 짙고,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무기가 웨슬리가 그렇게 신봉했던 성서라는 점이다. 창세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배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이 세 사람이 노아의 아들인데, 온 세상 사람이 그들에게서 퍼져 나갔다. 한편,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는데,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마침 가나안의 조상 함이 아버지가 벗은 것을 보고 밖에 나가 형과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깨어 작은아들이 한 일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그는 또 말했다. "샘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하느님께서 야벳을 흥하게 하시어 셈의 천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어라."》(창세기 9:18-27)
술 취한 노아와 그의 세 이들, 셈·함·야벳
1511년 Giovanni Bellini 작품
중세를 거쳐 현재까지 기독교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내세우고 있는 성서 구절이다. 미국 남부의 기독교도 백인들은 위의 구절에서 야벳은 백인, 함은 흑인 그리고 셈은 홍인종(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해석하였다. 즉 하느님의 축복에 의해 백인(야벳)은 흑인(가나안)을 노예로 부리며 아메리카 토박이들(셈)의 삶의 터전을 정당하게 빼앗아 산다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다.
백인이 될 수 없는 한국의 개신교는 셈이야말로 하나님이 축복하는 정통 종속이라며 셈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다. 아무튼 문제가 되는 것은 함의 자손들이다. 신에게 저주를 받고 셈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불운한 함족, 그렇다면 그 함족은 오늘날 어떤 민족일까?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 즉 셈, 함, 야벳의 후손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6절에 함의 네 아들이 등장한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가장 많이 보는 개역한글에 따르면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다. 하지만 공동번역에는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으로 표기되어 좀 더 알기 쉽게 번역되어 있다.
창세기 저자가 셈, 함, 야벳의 후손들을 기록할 때, 흑·백·황 등 피부 빛깔에 의해 구분하지 않고 지역에 의해 종족을 구별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함의 족보는 이집트와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된 종속들로 구성되었다. 구스의 어원은 검다는 의미인데 통상적으로 에티오피아를 뜻한다. 그리고 미스라임은 이집트, 붓은 리비아를 포함한 북부 아프리카, 가나안은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족속이다. 가나안 사람은 가나안 정복 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단 서쪽의 땅에서 거주하던 원주민을 의미한다. 또한 넓은 의미로는 시리아 지역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한다. 아무튼 바이블과 성경인명사전 등을 참조하면 함족은 흑인종만의 조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인들이 함, 셈, 야벳족의 기원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풀이하여 자신들의 침략성을 합리화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야벳족도 순수 백인종의 조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기로 하겠다.
창세기 10장 2절에 따르면 야벳의 아들은 “고멜(멜), 마곡, 마대(메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 등 일곱 명이다. 요세푸스는 야벳의 자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아의 아들 야벳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타우루스와 아마누스 산맥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를 거쳐 타나이스 강까지, 그리고 유럽을 거쳐 카디즈까지 걸쳐서 전에 사람이 살지 않던 땅을 차지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따서 국명을 지었다.
고멜은 헬라인들이 지금 갈라디아인(갈스)이라고 부르나 그 당시에는 고멜족이라고 부르던 나라를 이루었다. 마곡은 자기 이름을 본떠 마곡족이라고 불렀으나 헬라인들은 스구디아라고 부르는 나라를 이루었다. 마대에서 마대라는 이름이 나왔고 헬라인들은 메데라고 부르고 있다. 야완에게서는 이오니아와 모든 헬라인들이 나왔다. 두발은 지금 이베레스라고 부르는 두발을 이루었으며 메섹은 지금 갑바도기아라고 부르는 메섹을 이루었다. 디라스는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를 디라스라고 불렀는데 헬라인들은 이 국명을 트라키아라고 고쳤다.”
즉 고멜은 오늘의 독일지역, 마곡, 두발, 메섹은 러시아, 야완은 그리스, 마데는 페르시아, 디라스는 이탈리아 등을 뜻한다. 야벳족은 순수한 백인족의 조상이 아니며 더욱이 앵글로-색슨족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저자가 알고 있었던 지역은 중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뿐이었기 때문이다. 함은 흑인,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라는 일부 개신교의 해석이 얼마나 어이없고 무책임한 행태인지 이해되리라 본다.
성서가 악용된 사례는 무수하게 많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단일한 목소리를 갖는다고 믿고 있는 성서는 사실 워낙 다양한 목소리들을 담고 있는 텍스트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는 평등에 관하여 설파하고 있다. 반면 신약의 에베소서 6장이나 골로새서 3장 등과 구약의 레위기 25장, 신명기 15장 등에는 노예제를 옹호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성서보다 좋은 재료가 어디 있겠는가? 맘먹고 이용해 먹으려 든다면 어떤 주장에든 사용될 수 있는 게 성서다. 사실 그 짓이 수천 년 동안 종교권력자들이 해온 역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