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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조춘의 양광(陽光)
김 광 욱
1
‘보리다방’ 이층 창문으로 초봄의 햇살이 찬연히 내리쬔다. 햇빛은 탁자 위에 놓인 물컵과 재떨이에 긴 그림자를 만들며 아롱아롱 아지랑이 같은 김을 피워 올린다. 실내엔 가스난로가 피워져 있어 무더울 정도로 훈훈하다.
손님이 앉아 있는 곳과 카운터의 맞은편 벽 선반 위에 놓인 텔레비전에선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한국 대 일본의 8강전 경기가 녹화 중계되고 있다. 한국 선수들이 청색 유니폼을 입고 아슬아슬하게 멋있게 일본과 싸우는 모습. 일본의 옷빛깔은 도깨비처럼 칙칙하고 어둡다.
일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이면서 영원한 적이다. 일본을 꼭 이겨라. 이겨야 한다는 집념이 한국 선수들의 기상에서 넘친다. 손님은 8강전에서 한국이 승리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장면은 두 번 세 번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손님은 시계를 본다. 텔레비전 옆에 있는 큰 벽시계가 오후 네 시를 지나 있다.
다방엔 세 명의 손님이 있었는데 남자 손님 한 명과 한 쌍의 남녀 손님이다. 남녀 손님은 카운터 가까운 곳에서 도란도란 정담을 주고받고, 창 옆에 있는 남자 손님은 초조한 얼굴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다. 신문에도 한국이 일본을 꺾은 야구 기사가 첫면에 칼라로 실려 있다.
창 옆의 손님은 신문을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길 건너편 버스정류소 마당에 직행버스와 시내버스들이 멈춰 있다가 시간이 되면 떠나고 다른 버스가 들어온다.
신태인은 작지 않은 읍인데도 버스터미널이 시골 수준이다. 승객이 많지 않아서일까. 남자 손님은 고향의 버스터미널이 작고 초라한 데 적이 열등감을 느낀다. 만약에 군에서 새 터미널을 짓는다면 그 내장시설은 그가 무료로 희사해 줄 용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테리어 전문가이다.
그의 회사는 아파트의 시공을 수주한 유명 건설업체의 한 부분의 공사를 이차계약으로 떠맡은 협력업체이다. 그는 중소 인테리어 업자이다. 정규 사원만 팔십 명. 일용직 비졍규직까지 합하면 그 두 배가 될 것이다. 그는 그 인원을 가지고 두세 군데의 아파트 공사에 겹치기로 참여하기도 한다.
건설업계에서 서대현 사장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그는 약속을 잘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신은 전셋집에 살면서 부를 축적하지 않고 직원과 노동자들의 임금을 최우선으로 챙겨 준다. 직원보다 월급을 적게 받을 때도 있다.
이번에 신태인 근교에 건립한 ‘신세기아파트’ 공사는 그가 가장 하고 싶어하던 일 중의 하나였다. 그 아파트단지가 생김으로 해서 신태인의 이미지가 새로 바뀔 것이다. 그는 모든 사원과 기술자들을 이 공사에 투입했다. 공사가 끝나고 보니 2억원이 적자였다. 원래 건설업체 측과의 계약 금액은 5억원이었는데 7억원으로 는 것이다.
그는 추가 비용을 건설업체에 요구하는 걸 포기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억원씩 날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건설업체가 부도나서 돈을 뗀 적도 있었다. 무슨 일로 공사 기간이 지연돼서 몇 년씩 공사비가 밀릴 때도 있었다. 그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건설업체의 사장이 그의 죽마고우 친구였다. 그는 지금 그 친구를 만나려고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다.
2
‘신세기아파트’는 분양 가격이 싸고 실내 장식에 고급 제품을 쓴다고 소문이 나서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건설회사에서는 모델하우스와 똑같은 제품을 쓴다는 약속을 지켰다. 사장은 신태인 출신이고 애향심도 있는 사람이어서 부속품 하나도 눈속임을 하지 않은 걸로 알려졌다. 건설회사 사장은 젊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2월 말에 공사가 끝나면 인테리어 대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서대현 사장의 회사와 집은 서울에 있기 때문에 건설회사가 있는 전주까지 돈을 받으러 다녔다. 친구의 저택이 신태인에 있어서 신태인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친구가 좋은 소식을 줄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탄탄한 건설업체 사장이니까 죽마고우의 돈을 떼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대현이 초조해하는 건 오늘 또 허탕치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원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오늘은 결판을 내야지. 다 받지 못하면 절반이라도 받아야 한다. 친구의 체면을 생각해서 지금까지 참았지만 이젠 더 기다릴 수가 없어. 오늘 못 받으면 며칠간 신태인에 묵더라도 빈손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테다. 시계가 네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친구와 약속한 시간이다.
다방 문이 열리고 매끈하게 차려입은 거구의 사내가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건설업체 사장 친구였다. 그들은 반갑게 악수하고 창가에 마주앉았다. 처음엔 화기애애하게 정담이 오고가더니 차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우리 집으로 가서 저녁 식사 하세. 마누라에게 자네가 온다고 말해 놨어.”
대현은 필요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도 허탕이었다. 친구는 한 달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고 대현은 그럴 수 없다고 고자세였다. 친구는 한숨을 내쉬고 마련하는 데까지 돈을 마련해 보겠다고 했다.
친구의 회사는 지금 부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친구의 회사뿐 아니고 지방의 건설업체들이 다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다. 대현에게 친구의 넋두리는 엄살로 비쳤다. 친구 같은 갑부에게 5억원이란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마음만 먹으면 줄 수 있을 것이다. 친구의 이점이 어디에 있는가. 이럴 때 있지.
대현은 다른 협력업체보다 우선적으로 자기 돈을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다 주지 못하면 절반이라도 주라는 것이다. 친구의 사정을 생각할 만큼 대현은 여유롭지가 못하다. 임금을 기다리는 기술자와 인부들. 교도소에 갇혀 있는 아내. 대현은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힘에 겨웠다. 지쳐서 쓰러질 것 같다. 그는 아침밥을 굶고 점심은 기차에서 빵으로 때웠다. 밥이 문제가 아니다. 친구가 공사 대금을 절반만이라도 준다면 힘이 날 것 같았다.
대현은 친구 얼굴이 보기 싫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정류소 마당으로 직행버스와 시내버스들이 심심찮게 드나들었다. 다방에선 정류소의 마당이 다 보이지 않고 버스가 들어가는 쪽과 나오는 쪽의 통로만 보였다.
정류소 대합실 안에 슈퍼마켓이 있고 늙은 남자 주인이 의자에 앉아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뉘엿거리면서 거리에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두꺼워도 표정은 따뜻했다. 대현이 실내로 고개를 돌리니 앞에 앉아 있던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언제 소리없이 나가고 없었다. 친구가 피운 담배꽁초가 재떨이에서 아직도 타고 있었다. 대현은 그 담배를 집어들고 피웠다. 담배에서 친구의 우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릴 적의 지순한 우정은 간 곳 없고 생존경쟁의 치열한 피비린내가 필터 끝에서 알싸하게 전해 왔다. 그는 구역질이 나서 담배를 재떨이에 뱉아 버렸다.
카운터에서 레지가 물끄러미 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운터 앞에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다정한 친구나 애인 같았다. 나이든 마담은 카운터에 앉아 전화를 받고 레지는 주로 외부에서 주문한 커피를 배달했다. 레지가 직접 오토바이로 커피를 배달했다.
레지의 복장이 오토바이를 운전하기에 적합한 야무진 차림새였다. 몸에 꽉 붙는 청바지에, 상의는 빨간 가죽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상의의 단추가 열려 젖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대현은 다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레지 얼굴을 자세히 본 것 같았다. 처음 이 다방에 들어왔을 때 레지는 없고 마담이 커피를 갖다 주었다. 다방 손님은 없어도 외부에서 주문한 커피 손님이 많았다.
레지는 커피 배달하느라고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질 못했다. 레지가 커피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면 마담은 다른 커피 보따리를 싸 주면서 다음 배달할 곳을 명령했다. 여유 시간이 좀 있었던지 레지가 대현에게 더운 오차를 갖다 주었다. 레지는 대현과 친구가 다투는 광경을 눈여겨보았는지 대현을 위로해 주려고 했다. 마담이 시키지 않고 레지가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이었다.
3
남녀 손님이 나가고 다방엔 마담과 레지와 대현 세 사람만 있었다. 커피 배달 전화도 오지 않았다. 마담은 시장 보러 간다고 하며 레지에게 다방을 맡기고 외출했다. 텔레비전에선 주부열창 가요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 여자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열창하고 있었는데 그가 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돌이 되리라’란 노래였다. 그 어느 누가 나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피우나. 그 어느 누가 나의 가슴에 사랑의 눈물 뿌리나. 나는 여기서 나는 여기서 차라리 돌이 되리라. 슬픈 노래가 나오면 까닭없이 눈물이 나오고 센치해지는 걸 보면 그는 아직도 감정이 살아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더운 오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오차에서 옥수수 냄새가 고소하게 풍겼다. 레지도 주부열창 프로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는 레지가 왜 그의 앞에 앉아 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짐작컨대 그가 친구와 격렬히 다툰 걸 보고 위로해 주려고 왔을 게다. 레지의 얼굴에서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고, 지금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감옥에 갈 것을 아내가 대신하고 있다. 아내는 사기죄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두 해째 감옥에 있다. 남편의 부채를 막기 위해서 사채업자에게 일수돈을 빌린 게 사기가 될 줄 몰랐다. 그의 눈물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노래는 그를 슬프게 한다.
그는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나가 버린 친구가 몇푼이라도 돈을 마련해 주면 그걸 갖고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친구가 사업가의 의리를 지켜 줬으면 한다. 친구여, 제발 조그만 성의 표시라도 내게 해 다오. 그럼 나는 우리 사원들 볼 면목이 있을 것 같다. 우리 사원들은 내 뒤에 큰 빽이 있는 줄 믿고 있다. 바로 친구의 힘이다. 나는 친구를 믿는다.
대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시간과 레지가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는 시간이 일치해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레지가 쑥스러운 듯 옷섶을 매만지며 웃었다. 청바지가 낡아서 무릎이 금방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레지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요?”
“위하연이라고 해요.”
“하연 씨는 누구를 위해서 사요?”
“나를 위해서 살지라우.”
“산다는 게 뜻대로 되던가요?”
“뜻대로 되지 않지라우. 그러니깨 이 모양 아니겠어요?”
“돈을 벌어야 해요. 세상은 돈이 날개지.”
“예, 노력하겠어요.”
하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한숨소리가 대현의 귀에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가슴을 메스로 에어내는 듯한 한숨이었다.
“친구에게 돈을 받을 게 있소. 오늘 꼭 준다고 해서 영수증까지 써 갖고 왔는디 돈이 마련 안 됐다는구만. 나는 밤까지 마련해 달라고 했소. 밤까지 돈을 못 받으면 신태인에서 잘라고. 내일도 안 주면 내일도 신태인에서 자고. 줄 때까지 여그서 살아 부러야제. 그러니깨 날마다 다방에 오더라도 이해하시오.”
“다방에 오신 건 좋아요. 커피라도 한 잔 팔면 다방 매상이 오른깨요. 받을 돈이 얼마예요?”
“5억원이지.”
“와아, 사장님 부자다!”
“그 돈 받아서 다 임금 줄 거요. 신세기아파트 공사 대금이제.”
“그 아파트를 사장님이 지으셨구나.”
“내장 공사 일부를 우리 회사에서 했소. 난 인테리어업자요. 사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저씨라고 불러요.”
“싫어요, 사장님인깨 사장님이라고 부르겠어요. 그 뚱뚱한 사장님 빨리 돈 갚을 것 같지 않더라. 배짱만 퉁기고.”
“그 사람은 내 죽마고우요. 어릴 적에 개천에서 함께 미역 감던 내 단짝친구라오. 신태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신태인이 고향이시구만요.”
하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연 씨 고향은 어디요?”
“완도예요.”
“어쩐지 말씨가 되차더라니. 같은 전라도라도 신태인 말은 어줍고 능청스럽제. 완도 말은 거칠고 싸납더랑개.”
“제가 싸납게 보여요?”
“아니, 아가씨는 풋사과처럼 싱그럽소. 얼굴도 목련처럼 청초하고……”
“처음 듣는 칭찬이에요. 비행기 탄 것 같네요.”
“거짓말이 아니고 참말이요.”
하연은 부끄러운 듯 몸을 비비꼬고 웃었다. 대현도 웃었다. 그는 아가씨와 함께 있는 동안 잠시나마 고민을 잊었다. 이 신태인에서, 형제도 일가친척도 없는 이 쓸쓸한 곳에서 하연 같은 아가씨를 만났다는 건 다행이었다. 형제도 친척도 모두 고향을 떠나서 그에겐 신태인이 타관 같은 고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태인을 사랑하고 있다.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4
버스정류소에서 조금 걸어가면 신태인역이 있는데 플랫폼이 참으로 아름답다. 플랫폼에서 끝없이 긴 철로와 들녘이 보인다. 대현은 다방에서 나와 역사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방에 없더라도 친구가 핸드폰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니까 돈이 마련되면 전화해 줄 것이다.
그는 뱃속에 시장기를 느끼고 대합실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셨다. 커피가 뱃속으로 넘어갈 때 꼬르륵하고 공허한 소리가 들렸다. 커피를 마시며 역 울타리에 기대서서 저녁 하늘에 물드는 낙조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 기차를 타고 저 플랫폼을 떠났으면 좋겠다. 그가 친구한테서 돈을 한푼도 받지 못하면 떠나지 않고 이 신태인에 눌러 있을 게다. 친구가 돈을 줄 때까지 서울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회사는 부사장에게 부탁했다. 대현은 그가 신태인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기다리지 마라고 부사장에게 말했었다. 대현의 말처럼 장기간이 될지도 알 수 없다. 그는 빈 종이컵을 대합실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왔다. 방금 도착한 하행 열차에서 손님 몇이 내려서 역 광장으로 나왔다.
대현은 그 사람들을 뒤따라 길을 건너, 넓은 찻길을 따라 홀로 걸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라고 쓰인 식당 간판이 보였다. 대현은 식당으로 들어가서 김치찌개 백반을 시켜 먹었다. 신태인의 음식맛은 맵고 짭짤했다. 김치찌개로 배를 채우고 식당에서 나오니 거리엔 어둠이 내려 있었다.
신태인에서 오늘 밤을 묵는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여관을 찾았다. 찻길에 모텔의 네온사인 간판이 보였다. 그가 모텔을 향해 걸어가는데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오토바이에 탄 여자를 보고 그녀가 하연이임을 알았다. 하연도 대현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대현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자 하연은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탐스런 머리가 찬바람에 나풀거렸다.
“신태인에서 주무시게요?”
“그럴 것 같소.”
“저 모텔이 싸요. 거기 손님에게 커피를 배달하고 오는 길이에요.”
“고맙소.”
“밤에 제가 놀러가면 안 될까요?”
“싫소.”
“아이 사장님, 저 외로워요.”
대현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후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하연은 역사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하연이 어두운 길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외롭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과 딸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의 자녀들은 아직 어린 중학생과 초등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짜리 딸이 엄마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아버지 바람피우지 마세요. 딸이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식들을 생각해서 한 번도 외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옆에 있어야 할 아내가 없어 이따금 끓어오르는 본능을 참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에겐 본능을 억제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의지가 강한 남자였다.
“사장님, 저 외로워요.”
레지의 애절한 목소리가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 남아 떠나질 않았다. 왜 자꾸 레지의 생각을 할까? 이유는 그가 외롭기 때문이었다. 그는 굳건한 의지의 벽을 허물고 자신을 성욕의 노예로 만들 만큼 미련하지 않았다. 그 아가씨의 얼굴을 잊기로 했다. 잊겠다고 하면서 매춘부 아닌 한 청초한 아가씨의 얼굴이 그를 붙잡고 놔 주지 않아서 고민했다.
그는 모텔 방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내일 일을 생각했다. 내일 낮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가까운 내장산에나 다녀올까? 단풍도 없는 내장산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에 처녀였던 아내와 함께 걸었던 내장산. 피빛 단풍이 아내의 사랑처럼 아름다웠지. 그때 대현은 가난한 월급쟁이였다. 아내는 전주의 부잣집 딸이었다.
그는 처가의 신세를 지지 않았다. 그가 돈 많은 장인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더 크게, 더 떵떵거리는 사업가가 될 수도 있었다. 아내는 죄를 짓고 교도소에 있다. 장인이 살아 계셨다면 귀한 딸을 교도소에 그대로 놔뒀을까? 무슨 수로든지 꺼내 줬을 것이다.
대현에겐 아내의 형기를 단축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다. 아내도 그걸 알고 있다. 아내는 돈을 갚지 못할 바엔 몸으로 때우겠다고 무거운 형벌을 기꺼이 감수했다. 사실은 대현이 받아야 할 형벌이었다. 그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한시도 버리지 못하고 산다.
그 아가씨의 얼굴이 아내의 얼굴로 착각되었다. 이상한 착각이었다. 젊은 시절의 아내는 하연과 같은 복장을 즐겨 입었다. 빨강색 계통의 가죽정장과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는 옛날의 아내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 쓸쓸한 신태인에서.
5
노크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었다. 전등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어서 불빛에 눈이 부셨다. 그는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현은 하연이 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바깥 도어를 열었다. 도어는 잠기지 않고 닫혀만 있었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빗소리를 노크소리로 잘못 들은 걸까?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욕실에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만사가 귀찮아서 샤워는 하지 않고 간단히 세수하고 손발만 씻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해 보니 자기가 하연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싫다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빗소리를 노크소리로 착각한 건 꿈을 꾸면서 하연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그는 하연과 동침했다. 하연의 육체는 풍만하고 향기로웠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빗소리가 그의 달콤한 잠을 깨뜨린 주범이었다.
조그만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꺼내 마셨다. 냉장고 안에는 캔맥주와 음료수 등 몇 가지 서비스 용품이 들어 있었다. 그는 다른 것은 만지지 않고 물만 마셨다. 잠이 오지 않아서 텔레비전을 켜 보았다.
텔레비전이 낡아서 화질이 좋지 않았다. 재미없는 프로그램만 나왔다. 그에겐 모든 프로그램이 재미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열 한 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세 시간 동안 잤던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등 밑의 아스팔트가 많이 젖지 않은 걸로 보아 비는 방금전에 내린 것 같았다. 차들의 통행이 초저녁보다 뜸하고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신태인의 쓸쓸한 거리가 더욱 드넓어 보인다. 빗속으로 신태인 역사의 불빛이 아련히 반짝거렸다.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노크가 아니고 여자의 기침소리였다. 여주인이 지나가는 거겠지. 그런데 기침소리가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크게 들려왔다. 지나가는 인기척이 아니고 누군가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바지를 입고 바깥 도어를 열어 보았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복도 끝 계단까지 걸어갔다. 아래층 계단 끝에 한 여자가 숨어 있었다. 빨간 가죽정장을 보고 하연이란 걸 알았다. 하연은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왔으면 방으로 들어올 일이제 왜 여기 숨어 있단가?”
그는 부드럽게 나무랬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뻔뻔스럽게 따라왔다. 방안엔 동그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하연은 의자에 걸터앉아서 멋쩍게 텔레비전을 보는 척했다. 상의에 빗물이 묻어 있었다. 그가 상의를 벗겨 주었다. 가죽 상의는 얇고 가벼웠다. 상의 속에 감춰져 있던 하얀 살덩이가 불빛 아래 노출되어 그의 눈을 부시게 했다.
“저 옷 벗어도 돼요?”
“그러시오.”
“좀 씻고 오겠어요.”
하연은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늘 밤 저 여자와 자겠구나. 대현은 아내와 자식들 생각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죄악인 줄 알면서 그는 양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양심보다 하연을 버리는 게 더 괴로울 것 같았다. 샤워를 끝내고 하연이 알몸으로 방에 들어왔을 때 대현은 지금까지 견지했던 그의 의식을 허물고 하연의 관능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