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 전 돈암 초등학교 입학식날 교장 선생님의 훈화.
"잘 자고 잘 먹고 똥을 잘 싸야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이제껏 살아보니 그보다 더 삶의 기본이 되는 말이 있을까 싶다.
난 1학년 12반, 우리 담임 선생님은 이경애 선생님.
선생님 따라 정면 본관을 둘러서 뒷쪽에 있는 교실로 가는데
우리 앞에 수백개는 될거 같은 계단이 있었다.
우리 모두 그 앞에 멈춰 섰고 소아마비 친구를 쳐다봤다.
그때 선생님이 등을 내어 그 친구를 업었다.
그 높은 계단을 그 친구를 업고 우리를 이끌고 올라 가셨다.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야지."
내게 처음으로 꿈을 주신 첫 선생님이셨다.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남녀공학 중학교를 추첨제로 들어갔다.
그 때 만난 국어 선생님들.
김문창 선생님은 1주일에 한시간 들어오시는 작문 선생님이셨다.
첫 수업 들어오신 날 칠판에 'RAINBOW'를 쓰시고 뭔지 아냐고 물으셨다.
우린 그때 ABC를 처음 배우던 때였다.
아무도 몰랐다.
아마 나만이 느꼈을 거 같은 선생님의 그 안타까운 표정.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암 워즈워스'의 시라고 하시며 칠판에 한글로 '무지개' 시를 써주셨다.
나탈리 우드와 워렌 비티의 '초원의 빛'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워즈워스(Wordsworth)' 시인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를 읊어주시며 영화 얘기도 해주셨다.
선생님이 좋아서 참 많은 시들을 암송했다.
유치환 시인과 이영도 시인의 글을 읽어주시며 그분들의 플라토닉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냈는지도 보여 주셨다.
우리에게 시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 알려주시곤
진해 해군대학 교수로 가셨다.
이인복 국어 선생님은 까만 개량 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웃음이 많이 없으신, 성격이 대쪽 같으신 분이셨다.
국어 숙제로 일기를 쓰게 하셨고 답 글을 꼭 써주시곤 하셨다.
본 수업 하기 전 돌아가면서 1분 스피치 시간도 가졌다.
각자 주제를 정해 글을 써오고 친구들 앞에 나와 읽는 것이다.
읽은 것에 대한 우리들의 의견도 물어보시며 짤막하게 평도 해주셨다.
나의 첫 글은 '러시아워'에 대해 쓴 것 같다.
칭찬에 인색하시고 예의를 중시하는 어려운 분이셨지만 참된 선생님이셨다.
교사가 되었을 때 선생님의 가르치는 방법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남조 시인의 시를 읽어 주시고 문예잡지에 실린 선생님의 글도 읽어주셨다
책을 읽고 소그룹 토론도 하며 열린 교육을 하신 진보적인 선생님.
어렵고 낮은 이들에게 마음을 쓰라던 선생님도 숙명여대 교수로 떠나셨다.
후에는 미혼모들을 위한 쉼터를 만드시고 YWCA 여성 지도자 상도 받으셨다고 한다.
우리 모두의 첫사랑, 유일한 총각 선생님이셨던 강수길 선생님.
피부는 까맣고 키도 자그마하셨지만 늘 웃는 얼굴에 노래를 참 잘 부르셨다.
수업 시간에 노랫말이 아름다운 가곡들을 가르쳐주시고 불러주셨다.
'선구자' '보리밭' '목련화' '사공의 노래'....
시가 노래가 됨을 선생님께 배웠다.
중학교 2학년, 데미안을 읽고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새는 알에서 깨어 나오려 한다 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책 속에 파묻혀 살던 말 없고 우울하던 때였다.
내가 깨어나오고자 하는 나만의 세계에 대해 참 많은 얘기를 하고 또 많은 얘길 들려 주셨다
헤르만 헷세의 작품들을 밤을 새며 읽은 날들이다.
눈이 가는 대로 손에 닿는 대로 찾아 읽으며 책에 빠져 지내던 나의 학창 시절,
선생님은 나만의 세계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길잡이 반딧불이셨다.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과 특별활동 문예반을 같이 했다.
문학의 밤 시화전도 하고, 각 학교의 문학의 밤 초대장을 받아 우리에게 주시던 선생님도,
그레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한국 순교자 현양 위원회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많은 선생님들이 나의 생각과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다.
"나중에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연극 공연에 투자를 해라" 하시던,
투자를 못해도 연극 공연을 많이 보라고 하신 이전영 국어선생님.
세익스피어의 비극 작품들을 읽게하시고, 새롭게 시도되는 실험연극, 참여예술을 알려주셨다.
우리들이 사회에 나가 해줬으면 하는 선생님의 바람을 많이 얘기해 주셨다.
청계천 헌책방에 가면 금지된 선생님의 책이 있으니 찾아보라고도 하셨다.
"영화 페드라(Phaedra)의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이다." 라고 하신 분.
세상이 무지개 빛만은 아님을 알려주셨던 선생님이셨다.
'Nat King Cole'의 'Too Young'을 칠판에 써주시고 가르쳐주시던 뺑코 수학 선생님.
방과 후 클래식 음악 교실을 열어 포터블 전축으로 들려 주시고 설명도 해 주셨다.
뮤지컬 영화 '7인의 신부'를 노래까지 들려 주시며, 그 영화 상영 시간만큼이나 생생하게 들려 주시던 사회 선생님.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EN POE)'의 '에너벨리(ANNABLE LEE)'를 원문으로 낭송해주시던 영어 선생님.
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 외우고 또 외웠었다.
구 본안 고3 담임 선생님
우리 모두 존경하던 그 분은 온화한 모습에 말소리도 자근자근하신 도덕 선생님이셨다.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 들어 오시면 많은 말씀 하지 않으시고 칠판에 좋은 글귀들을 써놓고 나가셨다.
예비고사 날이 다가옴에 긴장하고 지쳐가는 우리들을 위한 선생님만의 배려였다.
우린 참 많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가 험한 세상에 나가 상처 받고 꺾어질 때 무엇으로 위로 받으며 살 수 있는지를 알려 주셨던,
30대 중 후반의 젊으셨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고교 입시 대학 입시가 있던 때였어도 수업하는 틈틈이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하던 날들.
보충 수업 시간엔 주전자 들고 밖에 나가 아이스케키를 사와 선생님과 같이 먹기도 하던 재밌던 날들.
살벌한 입시 경쟁의 교실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터가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너무 삭막해져 가고 있는 지금의 교육 현실에서도,
웃음과 재미가 있는 교실 수업,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수십년이 흐른 후 학창 시절을 돌아볼 때, 그들에게도 분명 그리움으로 가득한
선생님과 친구가 있을것이리라.
내 친구들은 기억도 못하는 것들을 난 참 많이 기억하고 있다.
교과서 공부나 입시 공부한 기억보다 선생님들이 해주신 말씀들이
이제까지도 가슴에 새겨져 있다.
글로 쓰고 있으니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글을 쓰게 하려 하심인가 보다.
"하루에 한번씩 하늘을 보라"
"인생은 지우개 없는 그림이다"
"살면서 가정법(IF~ 라는 말)은 쓰고 살지 말자
"추억을 많이 만들어라, 늙어서의 기쁨은 추억이다"
지금도 가정법이 나오려하면 생각을 바꾸려 머리를 흔들어 본다.
내가 선택한 나의 삶에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는 없고 싶다.
똑같은 상황에 서 있었을지라도 우리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기억은 다르다.
그 순간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감정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곤 하니까.
하지만 아름답고 좋은 기억들을 간직해서, 힘들고 고달플 때 하나씩 꺼내볼 수 있다면
세상이,사람들이
답답하고 분이 나게 만들어 소리쳐 부르짖게 만든다는 그 마음들을 조금은 달래줄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꿈은 국어 선생님이 되고자하는 구체적인 꿈이 되었다.
중학교 교지에 '꿈을 먹는 소녀'라는 소설을 발표했을 때, 그 소녀의 꿈은 세가지였다.
첫째, 현모양처가 되는 것
둘째,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
셋째, 유리창이 많은 집을 짓고, 나이 들면 그곳에서 글을 쓰는 것
현모양처는 내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니 이루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고,
객관적 평가는 아니더라도 꿈을 주는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생각은 부끄럽지 않은 것 같다.
캐나다 킹스빌에서 유리창이 많은 집을 지었고, 그곳에서는 아니지만 지금 이 나이에
록키산이 있는 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의 꿈은 그리 허망한 것은 아니었나보다
모든 젊음이 그렇듯 힘들고 아프고 상처 받으며 바쁘게만 지나갔던 날들이었다.
그 시절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해주신 나의 선생님들과
그 날들을 버텨내고 난 후,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여유있는 시간들에 감사한다.
그 때 그 시절의 선생님들이 그립 듯,
나와 같은 때를 보낸 나의 아이들도, 문득문득 나를 그리워해줬음 하는 작은 바램이다.
'그리운 것은 그대인가, 그 때인가'
첫댓글 알버타문학제2호 원고 감사합니다.
늦게 올려 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