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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코린트”(코린또스)라는 도시는 아카이아 본토(本土)에 있는 수도로, 상업과 부, 문학과 예술, 수사학과 철학의 연구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수사학(修辭學)”이라는 한자어는 “말을 닦는 학문”을 뜻합니다.
스테판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스테판 집사님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신성모독을 범하는 죄인들로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박해하고,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른 도시들로 도망하자, 파울은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하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에서 전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그리스의 도시들에서 전도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은 그리스 방식의 이름인 “파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코린트전서는 파울이 기록한 편지입니다.
1. 파울은 코린트에 있는 교회에게 권고하였습니다.
코린트전서 1장 10-17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고하니, 너희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안에 분열들이 있지 아니한 것이나, 너희가 같은 정신(same mind)과 같은 의견 안에 완전하게 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너희에 관하여 분명하게 함을 받았기 때문이니, 글로에의 자들에 의하여 다툼들이 너희 안에 있는 것이 그러하였음이라. 너희 각자가 이야기하기를, ‘나는 파울의 것이라’ 그러나 ‘나는 아폴로의’ 그러나 ‘나는 베드로의’ 그러나 ‘나는 크리스트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크리스트께서 나누어졌느냐 파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렸느냐 혹은 파울의 그 이름 안으로 너희가 세례를 베풂을 받았느냐? 두 사람을 아니면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였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니. 너희가 나의 이름 안으로 세례 받은 것을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나. 어떤 다른 자에게 내가 세례를 베풀었는지 아닌지를 알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세례를 베풀게 파송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도하게 그런 것임이니, 말의 지혜에 아니니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라”라고 하였습니다.
코린트전서 1:10-17은 ‘코린트 교회의 파당 보고’입니다.1) 코린트 교회 안에 있는 가장 두드러진 어려움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 상호간의 문제였습니다.2)
구원받는 사람들은 십자가로부터 사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으므로 신자들은 크리스트의 정신에 의해 가르침을 받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지혜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연약하고 미련하다고 여겨지는 사도들을 통하여서 메시지를 선포하시고 별 볼일 없는 자들일 뿐으로 간주되는 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창조하시며 그들을 크리스트께 연합하게 하십니다.3)
지금 파울은 그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권고합니다(고전 1:10). 우리의 주 예수 크리스트(Christ)의 이름을 통해 권고하였습니다. 그들이 같은 것을 말하고 그들 가운데 분열이 있지 아니하기를 권고하며 그들이 같은 정신과 같은 의견 가운데 완전하게 되기를 권고하였습니다.
파울은 주 예수 크리스트의 이름에 의해 코린트 교인들을 권고하는데, 파울이 권고한 내용은 그들 가운데 분열이 있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분열(division)”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스키스마)는 “쪼개기”(split), “잡아 찢기”(tear), “분열”(division)을 의미합니다.
“분열(分裂)”은 “나눌 분(分)”과 “찢을 열(裂)”입니다. “찢을 열(裂)”에 “옷 의(衣)”자가 들어갑니다. 옷을 찢어 나누는 것이 “분열”입니다. 옷을 찢으면 이쪽도 못 쓰고 저쪽도 못쓰는 것처럼, 분열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파울은 분열되지 말고 같은 것을 말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의하여야 합니다. 서로가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같은 정신을 가지고 같은 의견을 가져야 완전하게 결합되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하나가 되려면 같은 정신과 같은 의견을 소유하여야만 합니다. 같은 정신과 같은 의견 가운데 완전하게 맺힐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로 통합하려는 에큐메니즘(Ecumenism) 운동은 저들과 같은 정신과 같은 의견을 가지지 못하기에 불가능한 운동입니다. 같은 정신과 같은 의견은 올바른 교리까지 양보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가 되는 전제조건으로 같은 정신과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합니다.
정신과 의견이 일치될 때에 교회도 하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교리 안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통해 나누어지거나 찢어지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그의 권고 이유는 그에게 그들에 관해 알려진 까닭입니다(고전 1:11). 글로에의 자들에 의하여 다툼들이 그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는 지도자들을 치켜세우는 분열주의를 꾸짖었습니다(고전 1:12).4)
그들의 각자가 말하기를 ‘나는 파울의 것이라’ 그러나 ‘나는 아폴로의’ 그러나 ‘나는 베드로의’ 그러나 ‘나는 크리스트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 누구의 것이며 누구에게 속하였는지를 두고 다툰 것입니다.
파울이 코린트를 떠나고 난 후 아폴로가 코린트에 와서 가르쳤습니다. 둘은 같은 크리스트를 가르쳤으나 코린트 교회 안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파울에게 속하였다는 자들과 아폴로에게 속하였다는 자들이 다투었으며 베드로에게 속하였다는 파와 크리스트께 속하였다는 파도 있었습니다.
크리스트께서 나누어졌는지 파울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는지 혹은 파울의 이름으로 그들이 세례를 받았는지 질문합니다(고전 1:13).
파울은 그가 그들의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니, 그는 다만 그리스포스와 가이우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고전 1:14).
그들이 그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 말하지 않기 위한 것이며(고전 1:15), 파울은 어떤 다른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고전 1:16).
파울이 직접 세례를 베푼 그리스포스는 유대교 회당의 통치자였는데, 회당의 통치자는 회당을 지은 사람 혹은 유지비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의 온 집과 함께 주께 믿었고 코린트의 많은 자들이 믿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로마서 16장 23절에 나오는 “가이우스”와 동일합니다. 파울은 코린트의 가이우스의 집에 있을 때에 로마서를 대필시켰습니다.
코린트전서 1장 17절에 “이는 내가 복음을 전도하게 파송된 것임이니, 말의 지혜에 아니니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아니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17~2:2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가 언급됩니다. 이 찬송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의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지혜로운 말과 지혜로운 자들은 부적합합니다(고전 1:17-20).5)
그가 세례를 베풀게 파송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도하게 그런 것이니, 말의 지혜로써 아니니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파울은 말의 지혜로써 복음을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십자가”가 가려질까봐 “말의 지혜”로써 복음을 전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파울은 미련함과 지혜에 대하여 말합니다.
코린트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자들에게는 미련함이나 구원되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장 18절~2장 15절은 복음이 인간 지혜와 모순된 것을 말씀합니다.6) 십자가의 말씀을 수락하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대조되어 나옵니다.7) 1장 18-25절은 십자가의 메시아가 하나님의 미련함이라고 합니다.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셨습니다. 파울은 크리스트의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였으며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않도록 말의 지혜로 전도하지 아니하였습니다.9)
“복음(福音)”, 즉 “복(福)된 음성(音聲)”은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그 밖의 많은 말과 구별되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주 예수 크리스트를 믿는 자만이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셨습니다.10)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요 3:16).
십자가에서의 단번의 희생이 기쁘게 헌납되었고 속죄가 완성되었으며 죄가 제거되었고 화목의 사역이 성취되었습니다.11)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로마 군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창이 없으며 (No more the bloody spear,)
더 이상 그 십자가와 못이 없으니, (The cross and nails no more;)
이는 지옥 그것이 그 이름에 떨고 (hell itself shakes at his name,)
모든 하늘이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And all the heavens adore.)
(Isaac Watts, Come, all harmonious tongues 6절)
이유는 그 십자가의 그 말씀이 확실히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함이나, 구원되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8).
찬송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은 윌리엄 쿠퍼가 작사한 것인데, 원래 후렴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나는 믿고 믿을 것이네, 나를 해방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흘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계시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육체에만 관심 있는 자들은 “십자가의 말씀”을 “미련함”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자들은 내세에 별 관심 없고 현세에 관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인격적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12)
우리가 깨닫고 맛보고 다룬 것을 죄다 망상이라고 그들이 주장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스스로가 미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13)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처음이기 때문이며(잠 9:10),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지혜의 처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구명정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14) 찬송가 500장처럼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도 그들은 미련하다고 합니다. 자기가 볼 때에는 구명정에서 던져 주는 밧줄이 미련하게 보여서 그 밧줄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힘이 빠져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 생각에는 십자가의 말씀이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줄을 붙잡지 않는데 그러다가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데, 이렇게 십자가의 말씀을 미련하게 여겨 믿지 않아서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련한 것입니다.
반면에, 구원되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던 모든 것으로부터 매일 해방됩니다. 만일 십자가의 말씀이 우리 안에 새로운 힘을 부어 주지 아니하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변화된 체험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15)
우리는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인 사실을 믿어야 하겠으며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전하여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16)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먼저 믿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코린트전서 1장 19절에 “내가 현명한 자들의 지혜를 멸망시킬 것이고, 내가 이해력이 있는 자들의 이해력을 헛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파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코린트전서 1장 19절과 같이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29장 14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17)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백성이 그 입에 접근하고 그 입술에 존경하고 그 마음은 나에서 멀며 나를 그 경외는 가르침을 받은 인간의 계명이라. 그러므로 보라 그가 이 백성을 기이하게 하기에 기사에 더하게 하겠으며 그의 지혜자의 지혜가 멸망하고 그의 이해자의 이해가 숨겨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29:13-14).
구약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반대됨을 가르쳤습니다.18)
잠언 9장 10절에 “야훼의 경외가 지혜의 처음(beginning)이고, 성별된 자의 지식이 이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여 실패하였습니다.19)
시편 33편 10절에 “민족들의 계획을 헛되게 하셨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계획을 헛되게 하십니다.
19절에 미래시제가 사용되었는데 미래 행동에 대한 예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을 통하여 미래에 행하실 일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망시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자들은 십자가의 말씀을 미련한 것으로 여겨 십자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멸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린트전서 1장 20절에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학자가 어디에 있느냐, 이 시대의 토론자(debater)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반대됩니다. 세상은 그 지혜로 메타버스 세계를 창조하였습니다.
‘메타버스’는 ‘가상’, ‘초월’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입니다.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의 가상 세계를 가리킵니다. 메타버스는 가상현실(假想現實)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개념입니다. 아바타를 활용해 단지 게임이나 가상현실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현실과 같은 사회·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20) 현실에서는 다리를 다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닐지라도, 메타버스 세상 속에서는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 가상 세계 속에 들어가서 가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메타버스는 1992년 미국 SF작가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이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에 언급하며 등장한 개념입니다. 메타버스는 아바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다 2003년 린든 랩(Linden Lab)이 출시한 3차원 가상현실 기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게임이 인기를 끌며 널리 알려졌습니다.21)
특히 5G 상용화와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유행병 상황에 메타버스는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상현실·증강현실·혼합현실 등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였고 비대면·온라인 추세가 확산되며 메타버스가 주목받고 있는 것입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란 자신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아 아바타를 통하여 가상공간에 들어가 다른 사람과 교제를 나누며 예배한다는 것입니다.22)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교회의 전 담임목사인 이ㅈ철 목사는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찾아온 새로운 세계 질서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의 변신을 꾀해야 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이제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을 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메타버스 교회’를 말하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23)
그러나 우리는 얼굴에 얼굴을 대하여 교제하고 함께 예배하여야 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야만 하겠습니다.
과연 가상공간에서 ‘아바타’라는 가면을 쓰고서 나누는 교제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큰 문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이 매트릭스 세계를 만들고 관리하는 AI 컴퓨터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god)으로 군림하는 것처럼 결국 메타버스 교회의 신(神)은 AI 컴퓨터가 될 것입니다.24)
가상공간에서 제2의 삶을 사는 메타버스 세계에 익숙하여진 사람들은 가상공간에서 머무르게 되는 매트릭스 세계를 동경하게 될 것입니다.25)
메타버스 교회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들을 3차원 가상공간으로 옮겨 하나님의 모습을 한 AI 컴퓨터를 신(神)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미혹하는 배도의 포털(portal)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26)
세상은 메타버스 가상 세계를 창조할 만큼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의 지혜로는 구원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유일한 구원영생의 길인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가 다 됩시다!
1)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BECNT 성경주석, 69.
2)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BECNT 성경주석, 66.
3)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BECNT 성경주석, 66.
4)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BECNT 성경주석, 74.
5)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103-105.
6) Fee, 『NICNT 고린도전서』, NICNT 성경주석, 111.
7)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129.
8) Fee, 『NICNT 고린도전서』, NICNT 성경주석, 113.
9) C. H.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28, 모수환·김원주 옮김 (서울: CH북스, 2020), 11-12.
10)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13-16.
11)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17.
12)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21-23.
13)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24.
14)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25.
15)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26-27.
16)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28.
17) 박윤선, 『고린도전후서』, 22.
18) 박윤선, 『고린도전후서』, 22.
19) 박윤선, 『고린도전후서』, 22.
20) https://blog.naver.com/esedae/222556732249
21) https://blog.naver.com/esedae/222556732249
22) https://blog.naver.com/esedae/222556732249
23) https://blog.naver.com/esedae/222556732249
24) https://blog.naver.com/esedae/222556732249
25) https://blog.naver.com/esedae/222556732249
26) https://blog.naver.com/esedae/222556732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