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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칙 不思善惡
本則原文
六祖因明上座至大庾嶺 祖見明至 卽擲衣鉢於石上云 此衣表信 可力爭耶 任君將去 明遂擧之 如山不動 踟躕悚慄 明曰 我來求法 非爲衣也 願行者開示 祖云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 明當下大悟 遍體汗流 泣淚作禮問曰 上來密語密意外 還更有意旨否 祖曰 我今爲汝說者 卽非密也 汝若返照自己面目 密却在汝邊 明云 某甲雖在黃梅隨衆 實未省自己面目 今蒙指授入處 如人飮水 冷暖自知 今行者卽是某甲師也 祖云 汝若如是 則吾與汝同師黃梅 善自護持
풀이
(장군출신의)혜명상좌가 (오조홍인이 전한 의발을 빼앗으려고)육조혜능을 쫓아 대유령까지 온다. 육조는 혜명이 이른 걸 알고, (급한 김에)의발을 바위 위로 던지며 말한다.
“이 옷은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격발한 깨달음에 대한) 믿음의 표상인데, 무력으로 다툴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이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있다면 가져가게.”
혜명은 옷을 집어 들려했으나(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려 했으나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마치 산처럼 옴싹달싹도 하지(않고 격발하지) 않는다. (이윽고)혜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말한다.
“나는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인 깨달음의)법을 구하러 온 것이지, 옷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네. 원컨대 행자가 좀 알려주시게.”
육조가 말한다.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선이나 악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는 때가 제대로 작동하는 이것이, 분명한 (사람성품인)명상좌의 본래의 모습(으로써의 진리의 진실)이지.”
혜명은 이 말을 듣고 큰 깨우침으로 온 몸에 땀이 흘렀다. 이윽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예의를 차려 묻는다.
“말씀하신 비밀스런 말씀과 뜻 외에, 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닙니까?”
육조가 말한다.
“내가 지금 너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랄 것이 아니다. 너는 분명 (너라는 隨照)返照로써의 (인식인)자기모습이니, 비밀은 (이렇게 수조반조한 인식으로써의 연기의 실상인)너의 주변(곧 모든 존재와 현상인 삶)이다.”
혜명이 말한다.
“저가 비록 황매산에서 대중들을 따라서 살고 있었지만, 실은 아직 (진리의 진실인) 내 진짜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어리석음이 곧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격발할 수 있는) 입처임을 가르쳐 주셨으니, 이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야, 그 차고 따스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행자께선 저의 스승이십니다.”
육조가 말한다.
“네가 분명 이렇다면, 나와 더불어 너는 황매산의 오조홍인을 같은 스승으로 한 것이다. (알아 지닌 것을) 스스로 잘 보호하여 살라.”
緣唱
본칙의 출처가 되는 육조단경의 저자가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육조와 혜명의 조우를 신비스럽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단경이 경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이므로, 옛날얘기의 상투적 수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본칙의 이 신비 정도는 약과다. 각종 경전이나 논소 따위들을 뒤져보면 참말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얘기들이 허다하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는 애들한테나 먹히는 얘긴데, 아예 멀쩡한 어른들을 대놓고 속이는 얘기들이 숱하다. 그야말로 깨달으면 부처가 돼서 육신통을 자유자재로 팡팡 부리며 살 수 있고, 불교의 진리를 알기만 하면 세상을 금은보화로 깔고 사는 부귀영화 따윈 댈 것도 아닌 천당이며 극락행 티켓은 따논당상이란 것이다. 이런 건 사실 진리의 진실인 불교완 아무 상관없는 진리의 진실이긴 하다. 헐!
불교는 이런 진리의 진실인 꿈이며 희망으로써의 일을 성취하는 기술이나 방법 따위를 가르치는 게 아니다. 이런 것들은 석가나 달마, 육조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의지(오온의 행)로써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그대의 삶일 뿐이다. 다만 이 삶, 일의 까닭인 진짜이치를 아는, 오직,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만이 불교가, 선이 구태여 선 까닭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본칙의 신비를 평범으로 변론해 보자.
필자가 어린시절 늘 듣던 “옛날옛날에 깊은 산골에 ······.”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는 신비스럽거나 무서운 느낌이 점점 더해진 비슷한 내용들이기 일쑤다. 엄마나 아버지, 삼촌들의 일상적인 사람 사는 얘기는, 설령 “하이고, 글쎄 붓들이 각시가 어제 뱅굴레한테 쫓겨났댜. 안적도 애가 없다고. 어이구, 참말.” 하는 얘기나, “강닝이가 지서에 끌려갔댜. 이북에 있다던 칠성이가 넘어왔다 잡혔는데, 강닝이가 그렇게 다 시켰다고 했다네. 에이, 써그랄놈.” 따위, 어른들에겐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얘길지라도, 우리들 애들한테는 귀에도 안 들어오는, 되레 귀신 씻나락 따먹는 소리의 아무 의미 없는 얘기들이었다. 애들은 일상적인 삶의 얘기가 아니라 비일상인 귀신이나 도깨비, 문둥병자가 등장하더라도 치명적으로 악랄한 수법을 구사해 사람의 눈이나 간 따위를 빼먹는 얘기를 하되, 서슬이 지펴 옹송그려 쥔 손에 땀이 나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게 얘기해야 애들은 귀를 곧추세우고 집중하지, 웬만한 공포와 신비한 얘기로는 어린 우리들의 七情을 사로잡는 삶으로써의 진리의 진실일 수는 없는 거였다.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에 사로잡힌 그때 어린 우리는 결코 그런 얘기들이 허무맹랑함이 아니라 심각한 사실로써의 평범한 현실이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는 어른들의 그때 그 삶은, 그럼 그냥 허무맹랑한 삶인 것인가? 그렇다.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허무맹랑한 삶이다. 사로잡힌 애들의 실제 삶만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실제 삶이 아니라 애들을 사로잡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의 이 삶도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완전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실제 삶이다. 아름다운 꿈과 희망의 상상을 중중무진 키워주는 동화가 허무맹랑하긴 하지만 분명 이 허무맹랑한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을 낳는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여인이 소박당하고 간첩 질하는 것은, 애들에겐 아무런 재미가 ‘없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애들의 삶이고, 어른들에겐 흥미진진한 살 떨리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삶이다. 다만 이런 이 삶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실재의 실체라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에 사로잡힌 有識으로 살지 말고 세계는 완전한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 등의 성품으로써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인 연기의 실상임을 안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여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실재의 실체로써의 유식이랄 것이 없는 무식임을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애들이 커서야 어른이 되는 것임으로, 어른이 관심 갖는 건 옳고 애들의 그건 쓸데없는 거라는, 애들의 이런 삶은 현실의 실제가 아니라 상상이나 꿈으로써의 헛것이라는 따위의 사유에 사로잡혀 집착하지 마시라. 바로 이런 모든 사유가, 말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우리들의 삶은 노상 이런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헛것으로써의 상상과 감격에의 사로잡힘으로 사는 진리의 진실이다. 귀신이며 도깨비, 아톰이며 라이파이를 꿈꾸며 우리는 지금 보이저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의 세계로 확장·팽창하는 삶이다.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허무맹랑한 꿈이며 상상이 우주선 보이저호라는 큰 눈을 만들어 우리의 이 작은 눈으로 태양계 밖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꿈이며 희망의 의미나 뜻으로써의 관념적 삶을 실제의 삶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관념적 삶인 과학적 논리적 인연·인과를 따지고 헤아려 인간의 육근이며 오온의 경계를 확장하는 일은 홍익인간의 훌륭한 중도·진리작동이긴 하지만 결코,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아닌 것이다. 우주의 생성이며 소멸이며 크기 따위에 대한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지식의 습득이 아무리 완벽하여 은하여행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허무맹랑한 꿈이며 상상의 얘기로 저도 모르게 땀을 쥐게 하며 눈물이 핑 돌게 한다 하더라도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완 십만팔천리의 일일 뿐이다. 비록 이렇더라도 우리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구라를 계속 쳐야한다. 오직, 이것이 진리의 진실이라고. 이 혜명이나 육조처럼. 헐!
케케묵은 달마의 의발을 바위에 붙여 산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한 혜능의 저 기적은 허무맹랑한 꿈의 구라로써 실제 삶이다. 신표라니, 믿음의 표상이라니 그렇다는 것이다. 달마의 의발이. 믿음의 맘을, 정신을, 관념을, 의식을 상징하는 거라니, 다만 믿음이라는 이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며 그 작동일 뿐이라니, 마땅히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허망이 아닌가. 이 허망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건 순 구라가 아닌가?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이런 말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임을 다만 바르게 보시라. 설령 ‘表信이라서 如山不動’이라는 이 말이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전혀 아닌 다만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기도하는 허무맹랑의 꿈의 구라라 한 대도, 또 모든 존재와 현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인연·인과로 하는 총체적 작동으로써 연기의 실상이므로 세계는 완전한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이며 믿음성품 등으로 수조반조한 인식의 삶으로 열반하는 진리의 진실임을 믿는 것이란 대도, 다만 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이 사유가, 믿음이 오직, 연기의 실상임을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또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선이나 악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는 때가 제대로 작동하는 너는 분명한 사람성품인 너로 本來한(마땅히 이렇게 온) 모습으로써의 진리의 진실”이라는 말소리에서,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삶은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이라는 큰 깨우침의 인식으로 수조반조케 하기 위한 무문의, 혜능의 호객의 소리일 뿐임을 벗이여, 다만 바르게 보시라.
본칙의 신비스런 거짓은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아는 이 관념(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에 대한 관심을 유발케 하려는 방편일 뿐이다. 사로잡힌 고정관념의 일상의 삶에 지쳐 웬만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고해의 사람들을 꼬여내기 위한 호객의 소리일 뿐이다.
본칙에 대한 도움말은 사실 여기서 끝나야 한다. 더 얘기해야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의 길을 복잡하게만 할뿐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분석과 이해의 군소리를 거듭거듭 주워섬기는 건, 관념으로써의 진리인식에 머물러 역사적 시대정신을 실천하지 않는, 다만 백척간두나 고고하게 즐기는 허망한 중도·진리작동으로 진일보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는 순 이기적 홍익중생의 자비심의 작동일 뿐이다. 헐!
첫째 이기심은 위에서 설명한 如山不動이다. 혜명이 육조를 쫒아 온 까닭은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다들 깨달음이라고 한다.)를 위해서다. 헌데 육조가 던져 준, 달마의 옷을 아무리 뒤져봐도 진리의 진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에구! 진리의 진실을 보고도 진리의 진실을 모르니,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꼴이다. 벗이여, 바르게 상상하시라. 옷이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너나 나는 연기의 실상으로써의 한 몸인 통합적 전체로써 중중무진의 너와 나로 작동하는 독립적 개체인 중도·진리의 진실임을 상상하여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라는 동화임을 벗이여, 바르게 상상하시라.
황매홍인이 제자들에게 교육하고 요구한 것은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이다. 이것을 증명한 것이 달마로부터 대대로 전수돼 온 달마가 입던 가사라고 하는 것인데, 그 가사를 아무리 자세히 뒤져봐도 혜명의 눈엔 이 진리인식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 옴싹달싹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혜능이 무슨 신통방통한 요술을 할 줄 안다고 달마가 전한 의발을 바위에 찰싹 붙여 떨어지지 않게 하겠나? 그때나 이때나 횡행하고 있는 시·공간적 실재의 실체로써의 물신숭배의 무식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헐! 혜명은 의발이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연기의 실상임을 모르는 삼매에 빠져 이것이 실재하는 실체로써의 법이라고 아는 사로잡힌 집착으로써의 선정, 유식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유식의 삼매, 믿음이 강열한 의지(오온의 행)가 활발발한 사람은 재수가 좋다. 이 유식에 사로잡힌 무식으로 디리대니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아는, 물의 차고 더움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지금 잡을 수 있지 않은가. 헐!
어린애들이 귀신이나 요괴라는 불가사의에 까닭 없이 홀려있듯이, 혜명이 실상인 달마의 옷이 진리의 진실로써 실재의 실체인 줄 굳게 믿고 있듯이, 현대인들도 까닭 없는 홀린 선정에 빠져 있다. 과학에의, 행복에의, 돈에의 선정·유식에 옴싹달싹 못하고 홀려있다. 벗이여, 이것이 다만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둘째, 육조의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선이나 악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는 때가 제대로 작동하는, 이것이 분명한 사람성품인 명상좌의 본래의 모습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란 말을 듣고 혜명이 대오하는 장면이다. 달마의 의발이 곧 법이라는 유식의 고정관념에 집착해, 육조 자신의 생명까지를 노리고 있는 칼잡이 장군 출신 혜명에게 선과 악이라는 생각이 잘 작동하고 있는 이것이 곧 인간성품으로써 혜명이라는 사람의 진리의 진실이란 것이다.
이 진리인식으로의 중도·진리작동의 수조반조를 혜능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자기 집에 틈입한 강도에게 ‘선도 악도 분별할 줄 모르는 너는 누구냐?’고 외치다니. 헐!
모든 존재와 현상은 절대자유연기하는 실상으로써 오직, 이 존재와 현상으로 수조반조한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독립적 개체며 통합적 전체로 작동하는 완전한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성품 등으로써의 삶으로 열반하는 진리의 진실이다. 오직, 이것을 아는 것이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이다. 육조가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이라고 말한 건, 이렇게 선악에 대한 개념도 없는 무식의 유식에 휘둘려 사는 그대의 지금, 이 삶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그대가 구하는 법이니, 이걸 구한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 자기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그냥 애원은 쪽 팔리니까 혜명의 무식한 유식을 까발려 더 큰 이익을 보려는 교활이다. 헐!
벗이여, 다만 이 말이, 이 사유가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이 한문문장의 해석이, 이해가 틀렸단대도 오직, 이 문자로써의 문장구성형식에서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아 모든 존재와 현상이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시라.
셋째, 모든 존재와 현상은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이므로 세계는 완전한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성품 등으로써의 삶으로 열반하는 진리의 진실임을 안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다들 깨달음이라고 한다.)에 대한 믿음을 표상하는 달마의 의발은 비밀스러워 지니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이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일어나 대번에 깨달아져, 저 손오공을 손바닥 안에서 갖고 노는 완전 무소불위의 자유로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는 무식이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아직 이건 어린애들의 꿈의 희망일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바라는 간절한 현실의 무식이다. 헐! 그렇다고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인)깨달음을 표상한 달마의 의발을 소유하면, ‘표상의 의발’이 아니라 신퉁방퉁을 부려 맘속의 근심걱정 따위를 누그려뜨릴 수 있는 것쯤으로 아는 것도, 저걸 지니기만 하면 소원성취가 된다는 믿음도 무식이긴 매일반이다. 이 무식 때문에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혜능이 이 신표제도를 아작 내버렸다. 그리곤 새롭게 만들어 파는 물건이 이 공안이라는, 좀 묵긴 했지만 신신표다. 헐!
공안이라는 이 신표도 의발과 눈꼽만큼도 다를 게 없는 완전한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연기의 실상이다. 오조홍인이 전한 것도, 달마가 전한 것도, 석가가 남긴 것도, 오직 이렇게 신표를 전하고 전해 받는 아름다운 삶으로써의 열반적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혜명도 이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잘 보호하여 전하라는 해피엔딩의 이 스토리는 역사적 사실이든 허구든, 그래서 선이든 악이든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우리의 삶의 한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해 보인 신표의 말이다.
그러나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이런 신표는 달마의 가사며 혜능의 말로써의 공안 따위, 불교적 사유체계나 술어, 유물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삶임을. 더구나 이 신표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이며 이해 따위는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관 전혀 다른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신표임을 바르게 보시라. 신표로서의 모든 존재와 현상인 삶은 진리의 진실을 표상하는 진리의 진실임이니, 오직, 이 신표의 이 삶인 공안이 연기의 실상임을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어떤 이는 이 공안을 이렇게 말한다. ‘육조는 혜명의 아픈 곳에 정확히 침을 놓는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럴 때, 어떤 것이 혜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 뚫어야 할 공안이다.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하는 모든 규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一念不起의 세계. 거기에 발을 디뎌라. 어디에 육조가 있고, 어디에 혜명이 있는가? 말하는 육조에는 육조가 없고, 듣는 혜명에게 혜명은 없다. 물에 물이 흘러드는 것과 같고, 하늘에 하늘이 합쳐지는 것과 같다. 오직 본래면목만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을 뿐이다.’라고.
이 말은 목석의 성품으로 인간의 성품을 멸살시키려는 자해의 말이다. 구태여 일어선 것이니 불교야, 선이야 멸살 당한대도 불교며 선이이라는 언어문자나 사라질 뿐, 불이며 선으로써의 모든 존재와 현상이며 삶이야 불이며 선으로의 여래로 열반하는 중중무진이다. 대박!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모든 존재와 현상은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이므로, 세계는 완전한 자유며 평화인 것이어서,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다. 이를 표상하는 언어를 무상무아라 하며 공이라 하는 것이다. 이 무상무아며 공이며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며 중중무진의 중도란 말들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 완전한 자유와 평화로써의 열반적정임을 표상하는 신표의 말이다.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은 선이나 악이 무상무아며 공이니 생각하여 일으키지 말라(一念不起)는 말이 아니다. 그런 걸 생각하는 너도, 그런 생각도, 그런 말도 어떤 아무 것도 없는 꽝, 절대무 따위의 세계가 있으니, 그 세계로 들어가야 가짜인 지금의 너가 아니라 진짜의 너가 된다거나, 그런 너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不思善 不思惡이며 思善 思惡이며, 명상좌며 본래면목 따위 그런 그것들은 독립적 개체로써의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인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대여, 이 의미가 이렇듯 이 문자도, 문자의 문장도 이것임을 바르게 보시라.
수조반조로써의 오온에 의한 인식작동이 멈춰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일념불기의 세계’가 본래면목이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절대자유연기하는 실상으로써 수조반조한 인식인 그대의 삶으로써의 중도·진리작동인 것이지, 이것이 중도·진리작동으로써 중중무진임을 안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아님을 그대여, 바르게 보시라.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은 인간성품인 사유, 생각, 의식, 관념 따위 선을 멸각하여 ‘일념불기, 아무 생각이나 의식이 없는 시·공간’으로 들어가라거나, 사람의 생각은 그런 것임을 알라는 데 있지 않다. 설령 멸각한다면 멸각한다는 이것이 선인 것이며, 멸각하지 못했거나 안 했다면 이 또한 이 선이다. 헐! 그렇다고 본래면목을 독립적 개체로써의 나의 생각이나 사유를 멸살시켜버리고 오직, 통합적 전체로써의 물, 우주에 꼽싸리 낀 한 방울로써의 나, 이런 나의 생각이나 사유 따윈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니, 거대한 우주와 한 덩어리가 된 나를 상상하여, 이 상상되는 게 본래면목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틀렸다. 그런 것도 아니다. 시비선악으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생각과 생각작동은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므로 무상무아한 공이라고 멸절시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꽝, 절대무로서의 허망을 본래면목이란다면, 이것도 틀린,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은 아닌 다만 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일 뿐인 그대의 삶, 사유의 중도·진리작동일 뿐이다. 헐!
그대여, 다만 이를 바르게 보아 그런저런 이 사유며 사유작동이 곧,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시라.
본래면목은 如來며 백척간두진일보며 중중무진의 중도며 진리의 진실이며 연기의 실상이며 선정지혜며 반야파라밀 등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은 중중무진의 중도로써 오직, 이 면목의 존재와 현상으로 작동해 온, 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임을 표상한 말이다.
‘말하는 육조에는 육조가 없고, 듣는 혜명에게 혜명은 없다. 물에 물이 흘러드는 것과 같고, 하늘에 하늘이 합쳐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一念不起의 세계’로 오해된 무심 따위가 본래면목이라고 말하는 이것도, 다만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임을 그대여, 바르게 보시라. 오직, 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이며 인식작동이 완전한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성품 등으로써의 삶으로 열반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중중무진의 중도·진리의 진실)의 나의 본래면목이니. 오직, 육조는 목이 떨어질까 두려움에 떨고, 혜명은 칼을 휘둘러 의기양양해 있는 이 진리의 진실이다. 대박!
또 혜명이 말한 密語密意에 대하여 육조가 대답한 汝若返照自己面目 密却在汝邊을 “내가 지금 너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니네. 네가 만약 반조하여 자기면목이면, 비밀은 너 자신에게 있는 거야.”라고 해석하며 이렇게 설명하는 이가 있다. ‘밀은 秘密의 밀이 아니라 親密의 밀이다. 설사 비밀이 있다 해도 그것은 타인에게서 배우는 게 아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스스로 거기에 눈 떠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래면목에 스스로 눈을 뜨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가르쳐 줄 수도, 남이 대신 깨달아 줄 수도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작자의 이 말은 자기자신은 본래면목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이걸 볼 수 있는 시절인연이 자기에게 와야 자기가 보아 깨달을 수 있는 거라고 말하는 것이지 싶다. 자기가 자기임을 아는 깨달음도 시절인연이 있어, 암만 용을 써도 이 인연이 오기 전엔 어림없다는 것이다. 헐!
汝若返照自己面目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의 생각, 하나의 개체는 이 생각과 개체가 아닌 다른 생각과 개체들의 이합집산 작동으로 탄생한 생각이며 개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과 개체, 몸과 맘 따위로써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한 중중무진의 중도며 진리의 진실이며 연기의 실상인 隨照返照(여약반조)로써의 認識(자기면목)임을 표상한 말이다.
汝若返照의 반조는 해석은 고사하고 이해하기조차 매우 까다로운 단어다. 선학사전에선 ‘저녁 햇살이 삼라만상을 비추어 그 숨은 모습이 나타나듯이, 자신에게 내재하는 本然淸淨의 빛을 돌이켜 보라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저녁 햇살만이 삼라만상을 비추는 것도 아닌데 이 비유라고 푸는 건,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에 미치지 못한다. 설령 이쪽저쪽을 다 보는 통찰이라고 푼대도 본의에 미치지 못하는 이해다. 더구나 나에게 내재한 나도 모르는 본래 그렇게 청정한 빛의 자기면목이 실재의 실체로 있다면 뭐 때문에 ‘달마의 의발’ 따위를 애써 찾고자 목숨을 걸 까닭이 있단 말인가. 이 반조는 저녁 햇살도 본연청정의 빛을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아는 이것은, 이 작동은, 이것이, 이 작동이 아닌 다른 것들이 서로 비쳐 충돌하여 일어난 一期一會의 새로운 빛, 곧 이 빛(隨照)이며 저 빛(返照)으로써의 이 존재와 현상이며 저 존재와 현상이 모든 인과 연이 되어 총체적으로 작동한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으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임을 표상한 말이 汝若返照(너는 너라는 인식으로써의 수조며 반조)인 것이다. 헐!
모든 존재와 현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인연·인과로 하는 총체적 작동,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으로써 오직, 너로써의 존재와 현상인 여약반조,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이다.
汝若返照自己面目密却在汝邊을 단순히 ‘네가 만약 너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비밀이란 것은 너의 주변에 있음이다.’라고 해석한대도 완전 진리의 진실이다. 다만 이 말이, 이 말의 의미나 뜻이 오직, 이 말이며 의미며 뜻으로 수조반조한 인식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라는 진짜까닭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密却在汝邊의 여변은 단순히 너의 몸뚱이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도 여약반조와 같은 용법으로 쓰인 말이어서 그 의미는 ‘연기의 실상’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록 단순한 의미의 말이지만 그대여, 모든 언어문자는 진리의 진실을 표상하는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시라.
이 말이 ‘자기라는 본래면목은 자기가 깨달아야 하는 시절인연이 도래해야만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안대도, ‘자신에게 내재한 본연청정의 빛을 봐야 한다.’는 뜻이란대도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써의 나, 자기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이므로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이다. 이 비밀은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 곧 너의 주변이다.’라고 이해한 대도, 또 어떤 다른 이해의 말들,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들이 소나기처럼 퍼붓는다고 해도 그대여, 오직 이것이 연기의 실상임을 보아 모든 존재와 현상이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시라.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은 오직, 이것일 뿐임이니.
評語原文
無門曰 六祖可謂 是事出急家 老婆心切 譬如新荔支 剝了殼去了核 送在爾口裏 只要爾嚥一嚥
풀이
무문이 말한다. 육조는 (가문의 병폐 때문에) 집에서 급하게 뛰쳐나와 (대유령에서) 이런 (차마 못 볼)꼴을 당하긴 했지만, (후사를 염려하는 맘)노파심은 간절하다. 비유하자면 신선한 과일 이찌(荔支)의 껍질을 벗겨 알맹이만 발라 그대의 입속에 넣어준 것과 같은 것인데, 넌 그냥 냠냠 냠냠만 하는구나.
緣唱
선향이란 선승들의 일상적 삶인 말이나 행위에서 묻어나는 향기다. 예컨대 원효가 파계를 하고 시정사람들과 함께 놀아대며 요석공주와 결혼하고 하는 따위는 승려가 아니라면 사람살림의 일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런 일상적 삶을 산 원효에게서 대자유의 선향이 물씬물씬 풍긴다고 하는 건, 쫌 웃기는 거 아닌가? 정해진 승려의 삶을 착실히 살았다고 전해지는 원효의 선배 자장이나 동창생 의상은 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알려져, 설사 애절한 연애사건으로 여인이 자결하고 용으로 환생하여 승가의 의리를 지켜 독신의 길을 가는 애인스님의 삶을 돕지만, 여기에 선향이 있다고 하진 않는다. 원효는 아니다. 설총이라는 후사까지 둬 철저하게 승가를 배신하지만 선사로써 선향이 강하다. 대사, 성사라고 호칭해도 이건 선사보다 한 단계 웃질로 쳐주는 호칭이라고 대개 안다. 정해 논 삶의 길(戒)을 벗어나야 대선사며 대자유인인가? 그래서 원효의 친구 사복은 노상 애들과 같이 놀다가 어느날 갑자기 풀잎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고, 대안 같은 이도 위아래 없이 제멋대로 놀아도 대선사라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거물과 같이 놀면 동급의 거물이다. 요즘 항간에 이렇게 놀다 큰코다치는 사람들이 더러 흔하다. 헐! 어쨌든 이 같은 행실이 선사의 행실이라서 선향이 있는 거란다면 이는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과는 아득한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이다. 저 선향이 보다 더 물씬물씬 풍기는 선문답이라는 걸 보자. 부처를 묻거나 달마를 거론하면 “똥막대기”라느니, “뜰 앞의 잣나무”라느니 라고 응대하여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이런 대답은 공안이라는, 화두라는 살아있는 선향이라고 한다. 선사가 이런 우리들 일상의 문답과 다른 상식 밖의 응답에 선향이라는 이것이 있는가? 서로 익숙한 인과관계의 문답엔 선향이 없고 논리적 상식적 인과관계를 무시한 문답엔 선향이 있단다면 어린애와 미친놈과의 문답은 선향이 물씬거리는 공안이기 십상이겠다. 개소리는 더하지 않을까? 헐!
원효의 무애행이라는 파계가 따지고 보면 사람살림의 상식적 일상이듯이 선사들의 비상식적 응답 역시 불통의 말로 수조반조한 인식으로써의 삶이다. 원효의 무애행에, 선사들의 응답에 선향이 있고 없고는 다만 그런 그것에 선향이 있다고, 또는 없다고 느끼고 아는 인식의 수조반조가 일어난 선, 사유의 향기가 풍긴다는 것일 뿐이다.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선악이며 사선사악이며 불사선불사악 따위 모든 상식이며 비상식의 이 삶은 오직, 이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드러나는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이므로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선, 사유임을 바르게 보시라. 선향이라는 이 느낌이, 이 앎이 실재의 실체가 아니라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원효가 승려로써의 삶을 거부한 비상식적 삶으로써의 파계조차도 오직,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나(我)로써의 선,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상식적 삶, 선이므로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의 진실인 선임을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모든 존재와 현상이 온통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알게 하는 선향, 사유임을 벗이여, 바르게 보시라. 대박!
육조는 이 선향을 드라마틱하게 내뿜고 있는 것이다.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은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가 묻는 상식적 질문은 질문의 형식이며 내용을 통털어 온통 다 진리의 진실임에도 불고하고 이를 모른단다면, 이 상식의 인습을 잠깐 쉬고 전혀 비상식적인 이 선, 이 사유의 대답이 곧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임을 보아 모든 존재와 현상이 이 선, 사유로써의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격발하기를 기도하는, 다만 육조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선정지혜의 진리의 진실일 뿐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삶은 온통 선향의 선, 사유다. 분명 이럼에도 불고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적 삶엔 선향이 없고 소위 선사라는 이들의 삶에만, 그것도 진짜 ‘한 소식’했다고 하는 깨달은 이들,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격발했다고 하는 이들에서만 선향이 물씨물씬 풍긴다는 말은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헐!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상상이다. 상상의 날개를 펴는 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삶으로써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다.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바른 상상,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그러나 말이 쉬워 상상의 날개지 바르게 펴기란, 꼭 내 엄마 뱃속이어서야만 내가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같은 엄마의 뱃속으로 낳은 자식(상상·수조반조로써의 인식)들이 다 나(상상·수조반조로써의 인식)와 꼭 같은 자식들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엄마의 뱃속으로 낳은 쌍둥이라도 다 다른 자식이잖은가. 혹시 현대과학의 복제를 상상한다면, 이 상상조차, 복제 이것조차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연기의 실상임을 벗이여, 다만 이것임을 바르게 보시라.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아무리 훤하게 꿴다해도 이것이 곧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이라는 상상이 작동하지 않으면 진리인식으로의 중도·진리작동은 격발한 것이 아니다.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은 이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의 형식으로 있는 이것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 어느 형식에선들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일어나지 않을까. 무문이 본칙의 육조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건,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엔 아득한 아름답고 위대한 삶을 즐기는 행복이다. 대박!
무문이 평어에서 ‘只要爾嚥一嚥. 넌 그냥 냠냠 냠냠만 하는구나.’라고 쉽게 말을 하는 건, 자기만 아는 편견이다. 마치 황새가 여우를 식사에 초대해 놓고, 음식을 목이 긴 호리병에 넣어 내놓는 꼴이다. 본칙을 보기만 하면 누구나 다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격발할 수 있다는 거야, 아니면 격발하든 말든 온통 진리의 진실이니, 음식을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냥 냠냠 입맛이나 다시며 살라는 거야 뭐야. 참말 자기 편할 대로만 말하는 웃기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이 아닌가?
벗이여, 이렇게 말한대도, 또 이 말은 이게 아니라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이라는 깨달음을 알기 쉽게 알려준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의 말이란대도, 다만 이것이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무문이 이 공안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육조가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선이나 악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는 수조반조의 때가 제대로 작동하는 이것이, 분명한 사람성품인 명상좌의 본래의 모습으로써의 진리의 진실이지.)’이라는 이 말이 분명 진리의 진실인 건 틀림없지만,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이라는 바른 상상의 날개를 펴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잖은가. 알면 쉽지만 모르면 깜깜절벽이다.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이 이런 이것임에도 불고하고 혜능은 지금 명상좌의 칼 아래 목이 떨어질 지경으로 위험천만의 순간이다. 그러나 혜능은 이런 순간임에도 명상좌가 어떻게 하면 달마의 의발이 뭔지(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를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여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의 머리를 잽싸게 돌려 일상적 평범의 설법으로 ‘선이든 악이든 잘 작동하는 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이것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본래면목’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이것, 달마의 의발이 뭔지도 모르고 내 목숨을 노리는 명상좌, 그대는 선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그대의 지금, 이 행실이 곧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라고 외쳐,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외침이나 저 설법이나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임은 일반인데 思字는 그렇다 쳐도 부정사 不字까지 쓸 건 뭐있나? 혜능은 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 같은 백척간두의 상황에서도 잽싸게 머릴 굴려 자신의 구명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육조의 점괘가 꼭 들어맞은 거야. 대박!
벗이여, 이렇단대도, 이게 아니라 무문의 노파심이란대도, 껍질을 벋긴 알맹이의 껍질을 또 벋긴 리찌이긴 매 한가지니 그댄 어떤 맛의 향기로 냠냠했는가? 헐!
어떤 이는 이 평어를 ‘...., 궁지에 몰려 뜻밖에 나온 대답이라도 그의 체험에서 나온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육조의 역량을 칭찬하고 있다. ·····. 이것은 (혜명이 육조를 죽이려고 하는)극한 상황에서 혜능의 즉답은 매우 적절했고, 게다가 혜명의 大悟라는 좋은 결과까지 가져왔다는 것을, 선사(들) 특유의 어법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폄하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찬탄하는 抑下의 托上 어법이다. 자, 어떤 것이 혜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 반쯤 죽은 귀신은 천하의 무용지물이다. 좌복 위에 앉아 철저히 죽어보라.’라고 말하며 자못 큰스님 흉내를 제대로 내고 있다.
이 평어, 육조가 꿩 먹고 알 먹은 일을 육조가 육조자신의 본래면목을 체험(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一念不起의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도 정신 똑바르게 이 체험을 발휘하는 역량이 있는 거라고 이해한대도 그대여, 이 사유의 이 말이 다만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무문의 평어는 육조의 일(말)을 들어 일로써의 안팎, 즉 일(말)의 의미로써든 일(말)의 형식(말소리나 문자 따위)으로써든 모든 존재와 현상은 연기의 실상임을 보여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여, 육조만이, 무문만이 이 기도인 줄로 아는 앎에 사로잡혀 집착하지 마시라.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완전한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성품 등의 일(事)로 수조반조한 인식의 삶, 일(事)로 열반하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이니, 천상천하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완전 이 일로써의 기도이다. 헐!
무문은 육조가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자신의 상황과 꼭 같은 명상좌의 상황이 중중으로 수조반조한 인식인 지금, 이 상황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하여 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을 거듭거듭 보게 하는 건, 더구나 남의 일 말하듯 하는 객관적 형식의 법문이 아니라 명상좌의 지금 일, 진짜와 가짜로써의 선악도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의 명상좌 자신을 직접 거론하여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기도하는 건, 마치 리찌라는 과일의 껍질을 홀딱 벋겨 알맹이만 입속에 넣어주는 것과 같은 친절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오해하지 마시라. 진리의 진실은 리찌처럼 껍질이 있어 껍질 속에 감춰져 있는 게 아니다. 껍질과 알맹이라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이 리찌인 것처럼 모든 존재와 현상인 삶은 온통 다 진리의 진실이다. 진리의 진실이라 하니 진리의 진실이라는 알맹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껍질도 알맹이도 다 이 리찌이 듯,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언어문자의 형식인 껍질이며, 언어문자의 의미, 뜻의 알맹이며가 온통으로 전부 다 진리의 진실인 리찌이다. 무문은, 육조는 오직 이를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도와의 수조반조에서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인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알맹이)이 온전하게 성취(냠냠)하는 건, 오직 그대의 의지(오온의 행)일 뿐임을 그대여, 바르게 보시라.
어떤 이처럼 무문관을 거론함에 언어의 뜻이나 개념 따위 언어의 이중성을 활용한 우화 이솝이야기 같은 문학작품 평론하듯 한단다면 이 또한 진리의 진실임엔 틀림없는 중도·진리작동이긴 하지만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완 아득한 인식의 수조반조다. 다만 이럴 뿐이니 ‘좌복 위에 앉아 철저히 죽어보라.’는 체험 따위의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수조반조로써의 진리인식이 뭐라고 오직, 그걸 위해 ‘중중무진분의 일’인 一期一會의 평생을 좌복에 앉아 허비한단 말인가. 비록 이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는 기도가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이긴 하지만, 이일 또한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으로써의 한 작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한 작동은 저 배고픈 사람 밥 한 끼니 주는데도 있는 것이며, 직장 다니고, 사업하고, 정치하며 처자식 보살피는 우리의 일상에도 차고 넘쳐 있는 것이다. 오직 이것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것이지, 이 속에 진리의 진실이 따로 있다고, 그걸 찾아 체험해야 한다고 좌복을 깔고 앉아 허망을 더듬다 죽는 건, 차라리 한 알 곡식을 심어 이웃과 나누는 홍익중생의 일을 도모하는 인간성품의 한참 아랫길이다. 헐!
그대여, 바르게 보시라. 성품으로써의 모든 존재와 현상인 삶은 다만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인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으로 작동하는 대자비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아 오직, 이 자비행을 따르는 홍익중생의 善業을 의지하시라. 대박!
頌曰原文
描不成兮畵不就 贊不及兮休生受 本來面目沒處藏 世界壞時渠不朽.
풀이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이를)베껴도 이룰 수 없고, 그려도 취할 수 없고/ 도와도 미칠 수 없으니, (다만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사로잡힌 습관의)생각을 쉬(고 오직,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시게./ (다만 이)면목, 모습으로 오고감이 출몰하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이 작동하는)곳으로써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의)세계이니/ (이 면목의)모든 존재와 현상은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붕괴하는 때라야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으로)썩지 않는 거라네.
緣唱
무문은 평어에서 ‘넌 그냥 냠냠 냠냠만 하는구나.’라고 하여 육조가, 구태여 불교가, 선이 도모하고 있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너무 쉽다고 한 말을 뒤집고 있다. 평어에선 육조가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에 대한 말이 너무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마치 달달하고 신선한 이찌라는 과일의 껍질을 잘 까서 알맹이만 손수 입속에 넣어 주어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친절한 행실이라고 추켜 세우더니, 노래에선 아예 그런 헛수골랑 말라고, 본래면목으로서의 리찌는 껍질에 가려져 꼭꼭 숨어있어 알기가 어렵다고, 평어에서완 정반대의 소리를 외치고 있다. 베껴도, 그려도, 도울 수도 없는 거라고.
육조는 면목이란 말 앞에 본래란 말을 덧붙여 더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혜명이 이 말을 듣고 대오했다는 사실에 무문은 감동 먹고 평어에선 칭찬일색이었으나, 돌아보니 자기 조상 일을 자랑하는 것이어서 그런 건지 좀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 게송에선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싶다. 그러나 막판, 전결연에서 뒤집기를 하는 모습은 반전의 기술이 솔찮음을 보이고 있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이다. 헐!
기승연에선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설령 알았다고 한 대도 이 앎을 베끼고 그려서 성취할 수 있다거나, 이 앎을 알게끔 도와서 알게 할 수 있는 이런 게 아니라, 앎이라고 알아서 베끼고 그리고 또 이 앎을 알게끔 도와주는 이 습관적 생각, 사유는 잠깐 쉬고 바로 이 생각, 이 사유가, 아니다. 이 ‘잠깐 쉰다.’는 이것이 곧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중도·진리작동으로써 중중무진인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전결연에선 기승연으로써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수조반조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드러나는 작동임에도 불고하고 이것을 실재의 실체라고 착각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착각하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이 본래면목, 착각의 면목으로 오고가는 이 출몰의 현장인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으로써의 세계는 그래서 활발발하여 썩지 않는 선정지혜,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면목은 면목, 모습으로 오는, 가는 이것이 근본이다. 선정(모습. 관념) 지혜(오고가는 작동. 실제)의 다른 말이다.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며 백척간두진일보며 반야파라밀 따위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를 일컫는 다른 말의 같은 뜻이다.
벗이여, 본래면목이라는 언어는 진리의 진실을 표상하는 진리의 진실이므로 본래면목이라는 언어문자며 말소리로써의 형식도, 의미나 뜻의 내용도 온통 다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시라.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은 이를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인데, 이 인식으로의 수조반조는 이 말을 할 줄 안다고, 이 글을 쓸 줄 안다고, 또 이 걸 설명할 줄 안다고 격발하는 것이 아니라 베끼고 그리는 따위,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인 수조반조로써의 인식 중에서 오직, 이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베끼거나 그려야 하는 것이다. 할 줄 아는 이 말이며 글이며 설명 따위가 곧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가 격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기의 실상이므로 완전한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성품 등의 삶으로의 열반인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임을 아는,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은 썩지 않는 것이다. 대박!
어떤 이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본래면목은 베낄 수도, 그릴 수도 없다.(描不成兮畵不就) ·····. 말이나 시로 읊는 것도 불가능한, 필설을 끊은 소식이다. 본래면목에 대한 말과 글은 자칫하면 생명이 없는 그림자가 된다. ·····. 본래면목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면목이 어떻게 면목을 말하거나 그릴 수 있겠는가. 칼은 칼 자신을 베지 못하고 물은 물 자신을 적시지 못한다. 일체의 분별을 멈추고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자기가 그것이 되는 수밖에 없다. “본래면목은 어디에도 감출 수 없고.” 볼 때는 보이는 그대로가 진리, 들을 때는 들리는 그대로가 진리 ·····. 그러므로 “세계가 붕괴해도 그것은 썩지 않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一念不起의 본래면목에 壞, 不壞는 없다. 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다. ·····. 세계가 붕괴해도 본래면목은 썩지도 이지러지지도 않는 것이다. 심안을 가진 자는 세계가 붕괴되어 초토화되어도 초토화된 세계를 한 입에 삼킨다.’고 말한다.
헐! 심안을 가진 자는 저 세계와는 영 상관 없는 따로국밥인가 보다. 그러니 저 명상좌의 본래면목만 보이지 ‘어떤 이’자신의 본래면목은 영 깜깜무소식이여서 보질 못하넹. 헐!
그대여, ‘본래면목 아닌 것이 없다.’면서 ‘볼 때는 보이는 그대로가 진리, 들을 때는 들리는 그대로가 진리’라면서 ‘세계가 붕괴해도 본래면목은 썩지도 이지러지지도 않는 것이다.’라면서 ‘본래면목은 베낄 수도, 그릴 수도 없다.(描不成兮畵不就) 말이나 시로 읊는 것도 불가능한, 필설을 끊은 소식’이라면서 어째서 이런 본래면목을 본래면목으로 베끼고 그리며 말하면서도 이것이 본래면목임은 까맣게 모르시는가? 어째서 ‘본래면목에 대한 말과 글은 자칫하면 생명이 없는 그림자가 된다.’고 펄펄 살아있는 본래면목으로 말하면서도 이것이 본래면목임은 까맣게 모르시는가? 어째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一念不起의 본래면목’을 말하는 말로 완전한 생각의 본래면목을 깨벗고 보여주면서 어째서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은 까맣게 모르시는가?
‘세계가 붕괴해도 본래면목은 썩지도 이지러지지도 않는 것이다. 심안을 가진 자는 세계가 붕괴되어 초토화되어도 초토화된 세계를 한 입에 삼킨다.’고 뭐가 뭔지 모를 말을 함부로 하여, 저 혜능의 분명한 말에 어긋나는 진술태도는 이제 그만 ‘休生受(사로잡힌 습관의 생각인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일랑 잠시 쉬고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시라. 다만, 모든 언어는 진리의 진실을 표상하는 진리의 진실이니, 이 말의 의미를 알려고 좌복을 깔지 말고 이 말의 언어문자 형식에서 곧바로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진리인식으로의 수조반조를 격발하시라. 헐!
그대여, 바르게 보시라. 심안을 가졌거나 말거나 그댄 세계와 연기의 실상으로써 바늘 끝도 들어갈 틈이 없는 완전 상관의 전체며 동시에 불상관의 독립적 개체로 작동하는 중중무진의 중도·진리작동임을,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인연·인과로 한 총체적 작동인 중중무진임을 바르게 보시라.
入室
방장스님 앞에서 본칙전문을 외우고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럴 때 어떤 것이 혜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 공안에 대해,
제자: (좌선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똑바로 앉는다.)
방장: 머리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어버린다. 이 공안에 딱 들어맞는 혜명상좌의 본래면목 을 보여라.
緣唱
육조는 수조반조로써의 인식인 너가 본래면목이라고 했다. 혜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모골이 송연해져서 횡설수설했다. 제자는 좌선으로 베꼈다. 방장은 이미 공안과 평어와 노래에서 마르고 닳도록 다 써먹은 말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판을 두둘기고 있다. 뜰 앞의 솔가지가 흔들흔들, 바람을 그리고 있다.
어느것 하나,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다. 연기의 실상으로써 오직, 이렇게 수조반조한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작동하는 이 본래면목일 뿐이다.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중중무진 작동하는 진리의 진실로써의 본래면목이며 성품인 삶으로의 열반일 뿐이다.
방장은 딴소리하지 말고 저러는 제자를 한 대 줴박았어도 이 일,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이 끝날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니 제자는 점점 더 어둠에 빠져 허우적댄다. 지금도 보라. ‘머리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생각의 말을 하니까, 생각하지 않는 흉내를 베끼는 생각을 하고 있잖은가.
생각하라. 사유하라. 의지하라. 오직, 이것이 性의 性品인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다.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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