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약의 알레고리, 그리고 특히 모든 신약의 상황적 알레고리는 말하는 이나 청중이 다같이 어떤 새롭고 비상한 상황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는 느낌에서 생겨났다. 이 느낌은 특히 신약에서 강하지만, 결코 신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상당한 정도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참여의 느낌을, 그들의 유대인의 조상들과 동시대의 유대인들로부터 배웠다. 유대인들에게는 목전의 미래가 아무리 암담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選民인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로 건국될 것이 自明하고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스라엘의 그리스도 교회로의 변화와 그 결과로 생기는 新舊 이스라엘 間의 平行과 대립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 보낸 편지의 도처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그 마지막에서 잘 볼 수 있다(6장, 16~17절).
6: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울은 그가 서 있는 時點으로부터, 옛 이스라엘을 새로운 왕국의 豫表로 보았으며 그의 이 連續의 느낌을 뒷받침해 주는 한 증거는 구약, 특히 구약의 후반부가 신약과 마찬가지로 예언적・상황적 알레고리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서 5장, 1~7절이 그 예가 될 것이다:
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 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5: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 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5: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여기 마지막 부분에 제시된 해석에 의하면, 이 알레고리는 이사야 자신의 시대, 즉 기원전 8세기의 정치 및 사회의 현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포도원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두 왕국이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뜻한다. 포도나무는 유다의 왕국과 왕가이며, 들포도는 유다의 통치자들이 국민들에 가한 압박과 압박받는 국민들의 부르짖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알레고리는 풍자, 그것도 정치적인 풍자의 수단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풍자는 강하게 상상력에 호소하는 이미지에 의해 구현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효과가 크다. 지중해 연안의 국민들에게는 포도원의 포도는 포도나무의 풍부한 결실과 동시에, 그 포도밭을 만들고 가꾸어 갈 수 있게 하는 질서 있는 사회를 나타내며, 풍작에 대한 기대와, 또 동시에 흉작의 가능성도 의미한다. 이 포도의 이미지의 여러 가지 용법을 시편 80장, 8~17절과 요한복음 15장, 1~8절에서 서로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적 알레고리를 이와 같이 풍자로서, 또는 적어도 외부의 적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한 예를 에스겔서 27~32장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귀절이 쓰여진 것은 아마도 기원전 6세기일 것이다. 페니키아의 港都 두로(Tyre)는 해상에서 난파하는 장려한 商船으로 표현되고 있다
겔27:26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름이여 東風이 바다 중심에서 너를 破하도다.
(東風이란,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느브갓네살을 말한다.) 이집트의 왕(Pharaoh)은 나일강의 악어로서, 갈쿠리에 걸려 사막에서 썩어 없어지게 내던져진다.
겔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9:4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네 강의 고기로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네 강들 중에서 끌어내고
29:5 너와 네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음을 입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식물로 주었음이라
商船과 악어는 분명히 두로와 애굽의 적절한 상징이다. 그러나 상징은 靜的(static)이다. 에스겔은 이것을 배의 난파와 악어의 비참한 멸망을 예언함으로써 상황적 알레고리로 전환시켰다. 더구나 이 두 사건을 다 같이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섭리의 계획에 의한 미래의 사건으로 예언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알레고리를 古典의 알레고리와 구별시키는 것은 역사가 하나님의 뜻으로 운영된다는 태도와, 그 역사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이며, 이것이 그 후의 유럽 문학에 있어서 성경의 알레고리를 그렇게 강력한 수단으로 만든 것이다. 로마의 시인 Horace(65~8 B.C.)도 풍자를 위해서 알레고리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풍자시 제 2권의 제 6편을 비교해 보면, 그의 시가 구약의 에언자들의 힘과 규모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시의 뜻을 광범위하게 확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의향은 개인적인 것이다:
오, 田園이여, 내 언제 그대를 볼 것인가? 또 언제 내가 때로는 옛 사람들의 책 속에서, 때로는 잠과 한가한 시 간 속에서 삶의 격정의 달콤한 망각을 누릴 수 있겠는가? (60~2)
Horace의 태도는, 도회지의 친구를 찾아가서 슬픔을 맛보는 시골 쥐의 우화(Aesop의)로 要約될 수 있다. 이 우화가 개에게 혼이 나는 두 마리의 쥐의 이야기라는 사실만으로도, Horace의 풍자의 객관적이고 신사적이고 유머러스한 차원을 유지해 주는 데 효과가 있다. 이 시에서는 알레고리와 豫言, 풍자와 역사 및 세계의 목적이 서로 아무 공통점이 없다.
Horace의 딴 시들 중에는 지금 금방 한 말이 적어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시도 있다. 예컨대 A.D 37~100년에 살았던 로마의 비평가, Quintilian은 《웅변술 교본》(Institutio Orator-
ia)에서 알레고리의 정의를 내리면서 Horace의 《頌歌》Ⅰ의14, 「오, 바다에서 흔들리는 배여」를 예로 들고 있다. Quintilian은 이렇게 설명한다. ‘배는 국가를 의미하고 파도와 바람은 내란을, 항구는 평화와 질서를 뜻한다.’ 이것은 그럴 듯한 해석이고 이에 의하면 Horsce의 시가 적어도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에스겔이 두로를 배의 이미지로 나타낸 것과 같은 처리를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또한 이 두 저자 간의 차이 및 그들이 태어났던 문화 배경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Horace의 알레고리는 상황적인 것보다 도형적인 알레고리 쪽으로 기운다. 배의 이미지는 육지에 기반을 둔 强大國인 로마에 적용시키는 것보다 海上 세력인 페니키아의 도시에 적용시킬 때 더욱 劇的인 展開가 가능하다. 또한 Horace에게는 이 이미지는 문학적인 상투어이며,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6세기의 그리이스 詩人 Alcaeus(C.600 B.C.) 의 政治詩, 「나는 바람의 투쟁을 알지 못하노라」(Oxford Book of Greek Verse, pp.167~8)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상투적 이미지를 Horace는 고상하고 솜씨 좋게 전개시킨다. 그러나 에스겔에게는 이 이미지는 하나의 살아있는 현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Horace는 이 상황을 인간의 分別力과 先見之明의 문제로서 취급하는데 반해서 에스겔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에 따라 세상을 형성해 나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Virgil은 《Aeneid》와 《牧歌》(Eclogue)의 제 4부에서 오랜 역사적 사건의 연속 속에 神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이스와 로마의 세계에서는 Virgil은 특유한 존재이며, 어떤 점에서는 그의 時代의 철학보다는 中世의 종교적 역사관에 더 가까운 점이 있다. 그러나 Virgil이 느낀 역사의 目的性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의 그것에 비하면 빛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출처= 문학비평총서. 19: Allegory 서울대학교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