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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치유기도 프로그램의 이론
3)원리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법만물은 연기적 법칙에 의하여 나타나는 생주이멸과 성주괴멸의 현상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며, 사람들의 생애도 또한 생로병사의 무상한 인생 속에서 현상학적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제법의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찰나 생, 찰나 멸을 거듭하는 것이지만 현상의 나라는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작용에 혼란이 생기면서 감정이나 의식들이 괴리를 일으키면서 심리적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살아가면서 감정과 이성 사이의 괴리가 생기고 아픔이 심한 상처나 기억을 의식이 감당하지 못하면서 의식의 기능이 잘 못되거나, 불만족에 의해서 생긴 현실과 자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많아지면서 현실과 자아를 외면하고 부정하면서 심리적 장애들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인 문제는 명확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도 현실과 자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 이런 불만족이 심해지면서 일반적으로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나면 심리적인 문제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불만족이 심하여 현실생활을 잘 영위하기 힘들 때 스스로 심리적 장애가 있음을 시인하는 사람도 있으며, 현실 생활 속에서 일반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 수 없음에도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기 때문에 심리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판단이나 자아와의 괴리감을 기준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사이버세계라는 또 하나의 자기의 창출 공간이 생긴 현재에 있어서는 사이버 세계와 사이버 자아에 비교해서 현실과 현실 자아에 대한 불만족이 더 강하게 생겨나서 자아 속에서도 괴리가 생겨난다.
나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내 개인적 자아와 사이버 세계에서 주는 지식과 판단, 감정, 공감대 등등을 바탕으로 한 집단 지성이라는 두 개의 판단점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개인지성과 집단지성의 두 가지 기준점을 바탕으로 판단내리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모습은 양 기준점을 가지고 있어서 불만족은 심화되어 괴리에 대한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개인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현대에 이르러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가치관들 때문에 자신 내부에서 내면적 모습과 외면적 모습이 기준을 채우기 위해 증대되어 나타나면서 감정과 의식과 무의식의 괴리도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해결점은 불교의 일체개고의 진리에서 얻을 수 있다. 자신의 불만족에서 기인한 의식적 본능이던지 무의식적 본능이던지 상관없이 그 고통이 일어나는 습관을 바라보면서 고통도 생멸하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함을 철저하게 체험하여 무상함을 깨달으면 불만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고통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불만족과 불완전에 대비되는 만족과 완전함에 대한 집착이다. 이 집착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과 바르지 않는 인지의 습관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불교치유기도는 그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습관을 관찰하여 알아챔으로써 습관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자연스럽게 의식과 무의식의 일치감을 회복하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치유의 과정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여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 본능을 의도적으로 통제하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오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을 일치해야겠다는 의도를 가지면 그 순간 왜곡이 생겨나면서 또 다른 괴리감을 키우게 되어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균형을 잃게 한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의식이 알아챔을 반복하면서 무의식화되고 무의식이 의식화되면서 알아챔을 반복하는 중에 무의식의 변화도 생겨나면서 일치감이 생기고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서양의 많은 철학 심리학자들이 의식만으로는 인간의 정신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게 되면서 무의식이란 부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존 로크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1646~1716)와 허버트 요한 헤르바르트(1776~1841)에 의해 의식과 의식이전의 중간단계의 고찰은 지그스문트 슬로모 프로이드(1856~1939)에게 영감을 주어 의식과 전의식 무의식으로 구별되는 분석심리학의 창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개념은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에 이르러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분류되면서 비로소 분석심리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융은 집단무의식과 그 내용인 원형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무의식의 자기실현과정인 개성화과정의 시각에서 심리치유를 다루고 있다. 즉 우리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만이 아니라, 개인의 의식과 사회 문화 환경의 원형을 지닌 집단무의식의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후 많은 심리학자들은 자기실현은 무의식의 영향이 더 크며 전의식(잠재의식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을 경계로 하는 의식은 표층의 일부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의식이나 의식을 형상화하고 고정화하여 '무의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개발 영역을 두는 주장이나 자아실현과 자기실현에 대한 차이를 두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대적인 집단무의식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며 항상 그 요구점도 달라지기 때문에 결코 의식적인 어떠한 노력도 조화나 균형이라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미지의 영역으로 항상 변함이 없거나 항상 변해가는 영역이라고 두 가지 가정을 토대로 개성화과정을 진행하더라도 불균형을 이루는 일정부분의 무의식을 개발하여 의식화하였다고 하더라도 개발하지 않은 무의식의 영역은 그 기준이 새롭게 제시되거나 균형점 자체가 고정되지 않은 것이므로 개성화의 과정과 상관없이 항상 의식과 무의식은 불균형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성화 과정을 통해서 심리치유나 원만한 정신건강을 얻으리라는 가정은 개인이나 집단무의식이 고정된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 원형을 모든 사람들이 변하지 않은 사회 속에서 똑같이 지니고 있으면서 개성화과정을 모두 이룰 때를 가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은 불교의 일체의 제법현상은 특정한 고정된 것이 없는 변화 속에서 연기하면서 인식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는 관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한편으로 이렇게 마음을 분석하여 인간의 정신현상을 보는 입장은 불교의 유식학적 관점과 비슷한 면이 많은데 이러한 점은 시대적으로 유식(3C~7C)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러나 수행목적의 일심3관의 체험을 위한 근거로서 시작한 유식과 심리치유의 병리학적인 입장에서 정신현상의 근거를 찾기 위해 시작한 차이만큼 그 내용은 본질적으로 큰 입장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의 원형과 아뢰야식이 함장식의 개념이 유사하고, 개인무의식은 아뢰야식의 신훈종자와 집단무의식은 본유종자와 그 내용이 비슷하며, 개성화과정의 자기실현이 아뢰야식에 함장된 종자를 정화함으로서 불과에 이른다는 주장과는 어느 정도 통하고 있다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수행법인 기도법에 심리치유기법을 응용할 수 있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또한 불교치유기도 프로그램을 의식과 무의식의 현대 심리의 개념을 적절히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불교치유기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치유목적인 개성화과정의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서구에서 이야기하는 자기개발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인 것에 비해서 불교의 명상은 현재의 자신의 불만족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서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기준을 두고 의식적 노력을 하면 그만큼 심신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도적인 노력은 무의식에 대한 예측의 가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에 대한 여타 예측의 가정은 무의식에 대한 성찰이 아닌 의식의 왜곡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대와 문화를 만나더라도 자연스럽게 특정 무의식이 의식화가 이루어지고 반대로 특정의식이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화되기도 하는 것을 수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불교치유기도에 있어서 변화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와 균형의 문제는 어차피 의식의 활동영역인 아닌 무의식부분을 제외한다면 서양심리학의 의식부분과 전의식의 부분일 것이다. 이 전의식부분에 대한 현대 심리학의 연구는 충분하지 않지만 불교는 아뢰야식의 소집장인 말나식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왔기 때문에 의식, 무의식의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설명하기에 용이하다. 말나식의 끊임없는 사량 작용에 비해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는 사량 작용을 통해서 전의식과의 의식의 괴리를 이해하는 것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부분을 제외한 전의식부분과 의식의 차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생존과 본능에 작용하는 말나식의 역할은 지속적이므로 단절되는 의식보다도 신체나 감정 및 사고를 포함한 정신적 측면에 우선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마음의 생멸 역할을 하는 심소의 작용은 의식에서 보다 더 깊고 다양하게 인식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인식과 무의식의 드러나는 표상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알면 '내가 예전에 알고 있었는데도 실천하지 못했구나.'와 같은 자기비하의 감정을 만드는 대신에 자연스럽게 '인식이 끊기는 것이라서 무의식적인 반응에 따라서 이렇게 행동이 생겨날 수도 있지. 다음에 확실히 알았으면 좋겠다.'라는 무의식을 수용하면 괴리 때문에 생기는 무의식에 대한 불만족의 감정 활동이 추가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의식적인 알아챔이 깊어지면서 무의식의 괴리를 수용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생겨나는 감정과 인식이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전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잠재의식의 사량(생각하고 헤아리는 방식)작용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집단무의식에 있어서도 개인의 의식과 차이점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의식의 반발이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집단 무의식을 서구심리학에서 지정하는 인류의 패턴뿐만이 아니라 불교관점에서의 아뢰야식과 같은 모든 생명존재들에게 있는 생존을 위한 본능과 같다고 받아들였을 때 개인과 집단의 무의식의 작용은 쉽고 빠른 선택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로서 나타나는 반면, 의식이라는 인식작용은 합리적인 결과를 얻고자 선택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양자의 차이를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심리적 장애를 분석심리학에선 의식이 개인무의식을 단절하면서 무분별하게 집단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자아팽창에 의해 집단무의식이 의식과 동화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본 논자의 입장은 의식이나 전의식의 끊임없이 생멸하는 사량 작용으로 일어나는 경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부분이 착각하고 왜곡하는 인식작용을 하게 되면서 개인무의식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파악한다.
모든 중생들은 이러한 착각과 왜곡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적 장애나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무의식(전의식이자 잠재의식)적으로 나오는 감정과 행동을 인식이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생겨난다. 첫째는 의식과 개인무의식이 일치하더라도 왜곡된 인지 때문에 집단무의식과 차이가 생겨난 경우이다. 둘째는 왜곡된 의식이 무의식(개인, 집단)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반응이다. 셋째는 왜곡된 의식이 전의식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려고 하는 경우로서 개인 무의식간에 차이가 생겨나는 경우이다. 넷째는 왜곡된 무의식(개인, 집단)에 의식이 왜곡되어 가는 경우이다.
이해하기 쉽게 위의 네 가지 경우를 예로 보인다면
첫째의 경우는 어느 한 사람이 옷을 잘 차려입는 사람에게서 실망하거나 상처가 있은 후에 왜곡된 의식은 겉모습이 속마음과 다르다는 왜곡된 인지를 하게 되고 무의식도 이러한 의식에 동조하여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보면 거부감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마음은 무의식이 되어 옷을 대충 입는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개인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그 모습이 사회 속에서 지내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로 옷을 더럽게 입거나 아예 입지 않고 지낸다면 이 사람은 심리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될 것이다.
두 번째는 충격적인 일을 당해서 기억을 하지 못하거나 거식증처럼 음식을 먹고자 해도 몸이 음식을 거부하여 뱉어내는 것과 같은 경우도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될 것이다. 또한 의식은 개인의 편안함과 안전과 관련된 상황에 안주하려고 하지만 무의식의 불안한 감정이 지속되는 거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는 착한 마음보다는 이익을 우선해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죄의식이나 자괴감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여 자기부정을 하는 경우처럼 행동이 따르지 않을 때도 심리적 장애가 될 것이다. 이 경우는 사회적인 요구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과대시하거나 하여 생긴 자아팽창을 포함하며, 집단무의식의 영향을 받은 의식이 스스로 부과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개인무의식이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거나 의식적인 행위를 거부하는 경우이다.
네 번째는 무의식적 충동에 의한 범죄행위에 뒤따라 의식이 범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사람은 심리적 장애가 있다고 판단될 것이다.
본 불교치유기도 프로그램은 심리적 장애의 작동 원인인 의식과 무의식이 일어나는 습관을 관찰함으로서 자연스럽게 현실에 대한 의식의 왜곡이나 감정의 불일치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신념처를 통한 의식의 변화 과정(혹은 자기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과정)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감정들이 모두 자기 안에 가득함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면서 자기의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단골감정들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수념처 과정은 감정변화를 알아채는 과정으로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표-7, 표-8, 표-9, 표-10과 같이 감정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배우면서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채고, 알아챈 감정들에 이름을 부여하여 무의식에 단골 감정들을 각인해서 일상생활 중에 그 감정이 일어나면 놓치지 않고 자신을 관찰하는 습관을 형성하여 자신의 마음 변화를 알아채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감정 절제를 스스로 해 나갈 수 있으며, 명명된 감정에 대한 원인과 행동과 의식 들을 해석하면서 스스로 그 감정의 통제로부터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감정, 소중한 감정을 떠올리고 적어보고 하나씩 지워보는 체험(표-11, 표-12)을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자신 스스로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확인하여 행복을 스스로 찾아내고자 하는 긍정적 습관을 만들어 가게 하는 것이다. 심소들을 찾아내는 과정을 이해하여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과 역할을 찾아보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의식, 무의식 외에 참된 자아가 있음을 인지하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과정이 고통의 감정이 변하여 행복한 감정이 되어가는 것을 인식하게 함으로서 긍정적인 모습의 한 면인 부정적 모습, 부정적인 모습의 한 면인 긍정적 모습의 양면성의 현상이 결국 한 모습임을 체험하게 하여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이나 긍정적인 감정이 모두 한 마음의 일부분으로서 동시에 자리하면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때로는 인식에 의해서 한 면만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자동적으로 습관화되어 나타나는 단골 느낌, 감정, 인지의 별명을 지어주는 것이다. 그냥 아는 것과 별명을 불러줄 때 알아챔의 힘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별명을 부르게 되면 자신의 감정은 좀 더 객관화하여 살필 수 있다. 무의식적인 습관에 의해 생겨나는 감정이 일어날 때 알아챔의 인지작용이 별명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감정을 신호로 하여 인지의 작용이 일어났던 습관에서 벗어나 감정의 생겨났을 때 무의식적인 인지가 일어나면서 생각을 선택하는 의식적인 인지가 함께 작용할 수 있다.
이 때 의식적인 인지작용은 반응에 대한 선택이라는 큰 차이를 만들며, 이 후 긍정적인 인지와 감정의 습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달마의 벽관을 이야기 할 때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벽이 보는 것이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객관적인 시각을 얻는 경험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을 알아채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이 아니라 감정에 대해 살피고 별명을 주어서 나타났을 때 자동적으로 인지작용이 작동되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감정을 알아채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일어날 때 알아챔의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 수념처 과정의 체험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프로그램이라고 할지라도 그 프로그램이 기도인의 외면을 받는다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지녔더라도 결국은 프로그램으로서 가치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서는 효과적이면서 흥미를 끌고 쉽게 할 수 있는 면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불교치유기도법도 이러한 점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감정의 체험을 이끌기 위해서 미술치료, 놀이치료의 형태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성격분석의 과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격분석은 자신의 성격과 기질을 알아가면서 단순히 좌선 등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에 비해서 흥미를 가지고 분석하면서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대한 판단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 대한 흥미를 끌고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장점과 단점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성찰이 만능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흥미로운 과정을 통해서 프로그램에 대한 재미를 느끼게 하면서 자신에게 있는 긍정적인 감정이나 사고, 부정적인 감정과 사고과정을 적극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면 어려워서 그만둔 수행자를 보는 것보다는 적극적인 포교의 방법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성격분석의 과정 속에서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성찰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이 성격분석의 과정이 가족이나 주위의 사람들에게 확대되면서 가족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도모하여 상대방을 이해하고 진정 변화시킬 수 있는 가족치유의 프로그램 효과를 얻는 것이다.
거의 심리적인 불안 요인의 출발은 자신의 약점만을 크게 보고 강점을 보지 못하거나 장점을 과소평가함으로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격분석을 통해서 다른 성격을 가진 타인들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강점의 긍정적인 부분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격분석을 통한 긍정의 심리는 부정적 감정을 찾는 수념처 명상에서 오는 부작용을 긍정의 자신감으로 없애는 것이다.
본 프로그램에서 행하는 성격분석의 과정은 DISC행동유형검사, Enneagram성격유형검사, MBTI성격유형검사, MMPI검사, HTP검사, Rorschach Test등 여러 가지를 활용한다.
그렇지만 본 프로그램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성격분석 과정이 결코 기도인의 성격을 규정지으려는 의도로서 행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의 성격을 몇 가지의 측정 기준을 가지고 나눈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각각의 성격은 제각기 다른 유전적 형질, 환경적 요인들이 인연으로 만나고 화합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또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고유의 성질이나 기질은 없는데 몇 가지 성격으로 고정시키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부류로 나누어지는 성격분석법을 이용하는 목적이나 목표는 성격분석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을 순간을 갖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성격분석에서 제시하는 성격유형별 특징을 참조하여, 보기는 하되 성격유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나타내고 있는 현재 모습인 특히 긍정적 모습과 부정적 모습, 감정, 장단점, 개선점 등의 여러 가지 치유의 내용들을 얻기 위함이 그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아성찰에 과정에 있어서 성격분석 방법을 선택할 때 어느 것이 좋다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도 좋고, 여러 가지를 해도 참조한다고 보면 굳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 성격분석 과정은 자아를 성찰함에 있어서 흥미를 가지게 하는 참조 도구이며, 특히 자신의 장점을 확신하여 긍정적인 자신감을 찾게 하는 것이다. 또한 부정적인 습관들이 성격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게 하여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분석은 프로그램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고 가족에 대한 이해를 얻는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놀이치료나 성격분석이 흥미진진하고 프로그램 참가도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불교치유기도의 프로그램의 진행이 중요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격분석에 빠져서 성격분석을 맹신하고 자아를 고정시키려고 하려고 하거나, 기술적인 흥미로움만 찾게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를 주시하는 법으로 삼관(三觀)으로 설명한다. 그 삼관 중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의 삼관으로 성격이나 기질을 설명하면 좋을 듯하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자의 성격이나 기질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실제적으로 없는 공관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개인에게 있어서나 서로 비슷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정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가관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관은 항상 변해가는 것이며,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므로 이러한 공도 가도 아닌 중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삼관의 성격으로 나타나면서 고정된 성격이나 외부적인 환경에 따라 나타는 것이 아닌 일심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치우치지 않는 성격이나 기질로 나타나는 것이며 공과 가를 여의지 않으므로 성격이나 기질의 원만한 변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삼관의 입장에서 성격과 기질을 봄으로서 각자가 스스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습관이나 기질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치유기도 프로그램 연구/ 황명신(만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불교상담전공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