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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신씨(鵝州申氏)
13世 적도(適道)
父 : 흘(仡) 祖父 : 원록 (元祿) 읍파(邑派)호계공파(虎溪公派)☜
[정의]
조선후기 의성 출신의 관료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아주(鵝洲). 호는 호계(虎溪). 아주 신씨 의성읍 파조(派祖) 신광부(申光富)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동생은 신달도(申達道), 신열도(申悅道)이다.
[활동사항]
신적도(申適道)[1574~1663]는 청년기에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에게 배웠다. 학문과 효행이 뛰어 났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급제하였다.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이피난길에 나서고 국사가 어지러운데 신하된 사람으로 산하에 묻혀 구차하게 생활을 도모할 때가아니다.”하며 원근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밤낮 달려가니 이미 화의를 맺어 적이 물러간 뒤라 어전에 소장을 올려 장한 일이란 비답(批答)을 받고 나라로부터 상운도 찰방(祥雲道 察訪) 벼슬이 내렸다. 병자호란때에도 의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으며, 이를배척한다는 뜻에서 “척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 어찌 강화파들은 반대한단 말인가? 오랑캐가 겁나 두려워함이라. 망국꼴 보려는 왕손매의 심정이구나.” 라는 척화시(斥和詩) 읊었고, 군사와 양곡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의 벼슬이 내려졌다. 임금의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기 위해 서울에 가서 사은(謝恩)의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의 학소대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날마다 『춘추(春秋)』를 읽으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산곡에 대명(大明)의일월이 비친다고 했다.
[저술및 작품]
생전에쓴 글을 모은 『호계문집(虎溪文集)』 6권 3책이 있다.
[상훈과추모]
1867년(고종 4) 호조 참의 증직이 내려졌으며, 단구 서원(丹邱 書院)에배향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적도(申適道 ; 1574∼1663)의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 본관은아주(鵝洲)이다. 흘(仡)의 아들이며 의성(義城)사람이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합격하여 유성룡(柳成龍)의 칭찬을 크게 받기도 하였지만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 정묘호란과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학산(鶴山) 미곡(微谷)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서발(序跋) 등의 자료에따르면 아들 신채(申埰)가유집(遺集) 7책을 편집하여 후일에 간행하려고 종가(宗家)에 보관하였는데, 1874년에화재가 일어나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이에 후손들이 신적도의 유문(遺文)을 널리 수집하여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행장‧묘도문‧서발(墓道文‧序跋) 등을 받아 간행하였다.
권수에 류필영(柳必永)의서문, 권말에 신상헌(申相憲)‧곽도(郭鋾)‧이중구(李中久)‧신상하(申相夏)‧신돈식(申敦植)의 발문이 있으며 각 권수에 목록이 실려 있다. 권(卷)1에 가(歌)와 조(操) 각 1편‧시 42제(題) 50수(首)‧소(疎) 3편‧서(書) 16편, 권(卷)2에 잡저 12편‧잠명(箴銘) 4편‧제문(祭文) 6편, 권(卷)3과 권(卷)4에 창의록(倡義錄)이 실려 있다. 권(卷)5와 권(卷)6은 부록으로권(卷)5에 유사(遺事)와 행상‧묘표(行狀‧墓表) 등 17편, 권(卷)6에 사우유찰(師友遺札) 10편‧제문 3편‧만사 22수‧증은하장(贈恩賀章) 39수‧후서와 발문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평소 친족 및 사우(師友) 등과수창한 시편 내지 병자호란을 즈음하여 지은 시편이 많고, 류성룡‧정구(柳成龍‧鄭逑) 등을 애도하며 지은 만시도 14수가 실려 있다. 소(疏)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상소와 김엽‧김욱‧김찬(金燁‧金煜‧金燦) 삼열사(三烈士)의 포장(襃獎)을 청한 상언이 있으며, 편지는 정구‧장현광‧정경세‧이준‧이경석‧정온(鄭逑‧張顯光‧鄭經世‧李埈‧李景奭‧鄭蘊) 등의 사우(師友) 및자식들에게 보낸 것이다. 잡저에는 성‧심‧정‧의‧지‧인의예지‧태극‧음양(性‧心‧情‧意‧志‧仁義禮智‧太極‧陰陽) 등에 대하여 논변한 글, 집안사람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지은 글, 채미헌(採薇軒)을 건립하고지은 기문과 상량문 등이 있으며, 제문은 신우‧정구‧장현광‧신달도(申祐‧鄭逑‧張顯光‧申達道) 등 사우(師友) 내지집안사람들을 치제할 때 지은 것이다. 창의록(倡義錄)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 관련 기록을 모은 것으로 권(卷)3에는정묘호란 때 신적도가 사민(士民)과 의소(義所)에 보낸 글 및 호소사(號召使) 장현광(張顯光)과 정경세(鄭經世)에게 올린 글, 임금의교서(敎書)와 유서(諭書), 호소사(號召使)와 관향사(管餉使)의 관문(關文) 등이 실려 있고, 권(卷)4에는 병자호란 때 신적도가 의성현의 사민에게 보낸 글, 1636년 12월 20일부터 1637년 2월 9일까지 의병에 참여했을 때의 주요 일정과 주변의 동정을 적은창의일록(倡義日錄)이 있고,말미에 신점‧강난형‧장석영(申坫‧姜蘭馨‧張錫英)이 창의록(倡義錄)에 붙인발문 등이 실려 있다. 권(卷)5에는 신적도의 학행과 충절 등을 적은 유사‧행상‧묘표‧묘갈명(遺事‧行狀‧墓表‧墓碣銘) 및 단구서원(丹邱書院) 배향관련 봉안문(奉安文)과 축문(祝文), 1867년 이조참의(吏曹參議) 추증과 관련된 상계‧초계‧교지(狀啓‧草啓‧敎旨) 및고유문‧상언‧통문(告由文‧上言‧通文) 등이 실려 있다. 권(卷)6에는 장현광‧정온(張顯光‧鄭蘊) 등이 신적도에게 보낸 10편의 편지를 모은 사우유찰(師友遺札), 정유숙(鄭惟熟) 등이 지은 3편의 제문, 김응조(金應祖) 등이 지은 22수의만사, 강난형(姜蘭馨) 등이 1867년 신적도의 이조참의 추증을 기념하여 지은 39수의 축시(祝詩)가 실려 있다.
1 유사(遺事)
府君諱適道、字士立、自號虎溪、姓申氏、肇祖 於壯節公、十二世至鵝洲君諱益休金紫光
부군휘적도、자사립、자호호계、성신씨、조조 어장절공、십이세지아주군휘익휴금자광
신채(申埰)가 아버지 신적도(1574~1663)가 임종한 4년 뒤에 찬한 유사(遺事). 부군은 신흘(申仡)과 박륜(朴倫)의 딸 순천박씨사이에서 1574년(선조7) 12월 29일 도암리(陶巖里)에서 출생하였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에게수학하여 1605년(선조38) 향시에 장원하였고, 1606년 열도(悅道)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친과 모친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렀고, 1620년(광해군 12) 폐모론(廢母論)에가담하였던 관찰사 정조(鄭造)가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에 이름을 적고 가자 칼로 없애버렸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 장현광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어창의하였고, 대궐에 나가 상소를 올려 상운찰방(祥雲察訪)에 임명되었다. 1632년 제능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시 건원능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은숙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행재소로 가서 척화오국(斥和誤國)의 상소를 올린 뒤 임금이 끝내 항복하자 집으로 돌아와 미곡(薇谷) 아래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살다가 1663년(현종 4) 7월 1일 정침(正寢)에서 90세로 임종하였다. 부인은첨정(僉正) 순(淳)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 (1574~1660)로계란현(鷄卵峴)에 초장(初葬)하였다가 부군이 죽은 뒤 의성현 서쪽 안평면(安平面) 응봉(鷹峯)에 장례를모셨고, 슬하에 4남 2녀를두었다
2 행상(行狀)
先生諱適道、字士立、號虎溪、姓申氏。其先鵝 洲人也。勝國時有版圖判書、諱允濡、以淸直<
선생휘적도、자사립、호호계、성신씨。기선아 주인야。승국시유판도판서、휘윤유、이청직
김도화(金道和)가 후손상하(相夏) 등의 부탁을 받아 찬한 신적도의 행장. 선생은 1574년(선조 38) 12월 29일 의성현(義城縣) 도암리(陶巖里) 집에서출생하여 정구와 장현광에게 수학하였다. 1605년 향시에 장원하고, 이듬해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 부친과 모친의 상을 당하고, 1620년 관찰사 정조(鄭造)가빙계서원(氷溪書院)의 원안(院案)에 이름을 적고 가자 없애버렸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서울로 가서 상소를 올리고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에 임명되으며, 1632년 제릉(齊陵)과건원릉(健元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행재소로 가서 척화오국(斥和誤國)의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와 학산(鶴山) 미곡(薇谷) 아래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살다가 1663년 7월 1일 90세로 임종하였다. 12월 20일 안평면(安平面) 응봉(鷹峯)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첨정(僉正) 순(淳)의 딸 파평윤씨로 집‧균‧채‧점(㙫‧均‧埰‧坫) 등아들 넷, 김상각(金尙珏)과정부형(鄭復亨)에게 출가한 딸 둘을 두었다.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있으며 1867년(고종 4)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3 묘표(墓表)
先生諱適道、字士立、自號虎溪、鵝洲之申。其 源甚遠、在麗季有諱允濡、版圖判書。生諱祐、
선생휘적도、자사립、자호호계、아주지신。기 원심원、재려계유휘윤유、판도판서。생휘우、
홍만조(洪萬朝 1645∼1725)가찬한 신적도의 묘표(墓表). 신적도는 어려서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 부모상을만나 삼년상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량(兵糧)을 모집하여 출병하였으나 강화가 체결되자 대궐에 가서 상소를 올려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에 임명되었고, 이후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 참봉에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출병하여 행재소에 가서 상소를 올렸다. 전식(全湜)과 이경석(李景奭)이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하고 귀향하여 미곡(薇谷)에 초가를 짓고 거주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부인은 첨정(僉正) 순(淳)의 딸 파평윤씨로 4남 2녀를 두었다
4 墓表後識
右墓表、晩退洪公所述也。今至二百年所其 後、哲宗丙辰、士林建院于丹邱。今上丁
우묘표、만퇴홍공소술야。금지이백년소기 후、철종병진、사림건원우단구。금상정
이종기(李種杞)가 1901년 5월에 후손 상헌(相憲)의 부탁을 받아 홍만조(洪萬朝)가찬한 신적도의 묘표(墓表) 뒤에 붙인 글. 1856년(철종 7)에사림(士林)이 단구(丹邱)에 서원을 세워 제향을 올리고 있고, 1867년(고종 4)에 수의사(繡衣使) 박선수(朴瑄壽)가 장계를올려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5 묘갈명[병서]( 墓碣銘[幷序])
韶州縣西安平坊、鷹峯負兌而封者、故徵士 大明忠義贈吏議。虎溪申先生衣履之藏
소주현서안평방、응봉부태이봉자、고징사 대명충의증이의。호계신선생의리지장
이중철(李中轍)이 후손돈식(敦植)의 부탁을 받고 김도화(金道和)가 찬한 행장을 바탕으로 하여 지은 신적도의 묘갈명(墓碣銘). 어려서 종형(從兄) 정봉(鼎峯) 선생에게수학하고, 임진왜란 때에 할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켰으며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입산(入山)하고 난이 끝난 뒤에 장구와 장현광에게 수학하였다. 1605년 향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동생 열도(悅道)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14년 부모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거병하여 상운도찰방, 1632년 제릉참봉에임명되었고, 1636년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학산에 채미헌을 짓고 영재를교육하다가 166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우(孝友)와 충절(忠節)로 이름이 났으며 사림이 서원을 세우고 조정에서 이조참의에 추증하였다. 부인은파평윤씨로 4남2녀를 두었다
6 문소읍지(聞韶邑誌)
申適道孝子元祿孫。萬曆丙午、進士從遊鄭 寒岡張旅軒得聞淵源之學。丁卯亂、倡義旅。
신적도효자원록손。만력병오、진사종유정 한강장려헌득문연원지학。정묘란、창의여
신열도(申悅道 1589~1659)가편찬한 『문소지(聞韶志)』 중 신적도 부분을 발췌한 글. 신적도는 1606년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정구와 장현광에게 수학하여 연원지학(淵源之學)을 얻었다. 정묘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찰방에 임명되었고, 1632년 제릉참봉에 제수되고,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를주장하였다. 학산 미곡에 집을 짓고 살다가 임종하였다
7 단구서원상량문(丹邱書院上樑文)
鄕社有祭、古人重崇。報之儀藏、修以柌後學、 寓景慕之意奚。但推宗于宿德、抑將矜式於
향사유제、고인중숭。보지의장、수이사후학、 우경모지의해。단추종우숙덕、억장긍식어
1856년 단구서원(丹邱書院)을 지을 때에 유주목(柳疇睦)이찬한 단구서원의 상량문. 신적도는 충효가 뛰어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를 주장하였다. 신적도‧신열도(申悅道 )‧신채(申埰) 세 분을 단구서원에 모셔 경모)의 뜻을 부친다
8 봉안문(奉安文)
顯允先生、忠孝全德。雪立岡軒、澤麗桐石。本 之才資、濟以學力、厓老定評、義理明白。愚翁
현윤선생、충효전덕。설립강헌、택려동석。본 지재자、제이학력、애로정평、의리명백。우옹
1856년 신적도를 단구서원에 봉안할 때 지은 이돈우(李敦禹)의 봉안문(奉安文). 신적도는 충효를 겸하였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거의하여 척화를 주장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학산 미곡에 집을 짓고 서사(書史)로 자오(自娛)하였다. 신적도‧신채와 함께 가학(家學)을계승하고 충효가 뛰어나기에 단구서원에 모신다
9 상향축문(常享祝文)
學傳師訣、義扶邦綱。餘敎在人、報杞無疆。
학전사결、의부방강。여교재인、보기무강。
신적도를 단구서원에 모신 뒤 제향(祭享)할 때 올린 축문(祝文). 신적도는학문이 스승의 비결을 전하고 의리가 나라의 기강을 부축하였으니 제사가 끝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10 수의박선수계문[병인]( 繡衣朴瑄壽啓文[丙寅])
粤在仁廟丙子之亂、凡人士之忠義者、或 有倡義而赴亂、或有抗疏而斥和。雖在寒素
월재인묘병자지란、범인사지충의자、혹 유창의이부란、혹유항소이척화。수재한소
경상도 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가 1867년(고종 4) 조정에신적도의 증직(贈職)을 주청한 계문(啓文). 신적도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키고 상소를올려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교육에 힘쓰다 임종하였다. 그의 충의(忠義)를 포장(襃獎)해야 하니 해조(該曹)에서 품신해주기를청하였다
11 정원초계(政院草啓)
都承旨。臣趙性夏、爲草啓是白段、慶尙左右 道暗行御史、臣朴瑄壽、別單內義城、故察訪
도승지。신조성하、위초계시백단、경상좌우 도암행어사、신박선수、별단내의성、고찰방
승정원에서 1867년에 신적도에게 증직해주기를 청한 초계(草啓). 도승지 조성하(趙性夏)는 경상도 암행어사 박선수의 별단(別單)에 의거하여 초계를 올려 도학충절(道學忠節)이 있는 고(故) 찰방(察訪) 신적도에게 증직(贈職)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12 이조회계(吏曹回啓)
吏曹判書。臣曺錫雨爲稟啓事。慶尙左右道暗行御史 臣朴瑄壽別單議政府草啓。內義
이조판서。신조석우위품계사。경상좌우도암행어사 신박선수별단의정부초계。내의
이조에서 1867년에 신적도의 증직과 관련하여 임금께 올린 계문(啓文). 이조판서 조석우9曺錫雨)는 경상도 암행어사 박선수와 의정부 초계에 의거하여 신적도에게 특별히 증직(贈職)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13 교지(敎旨)
察訪臣申適道、贈通政大夫、吏曹參議者。 道學高明、忠節卓異、事承傳。
찰방신신적도、증통정대부、이조참의자。 도학고명、충절탁이、사승전。
철종이 1867년에 찰방 신적도에게 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 吏曹參議)에 추증한다는 교지(敎旨). 신적도는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고 충절(忠節)이 뛰어나기에 이조참의에 증직하는 전교를 내린다고 하였다
14 분황고유문(焚黃告由文)
吏判 韓啓源 惟公終始、惟學之積。高山寒旅、麗澤桐石。厓
이판 한계원 유공종시、유학지적。고산한여、려택동석。애
1867년에 신적도를 이조참의에 추증하는 교지가 내리자 무덤에 고하고副本을 태울 때에 이조판서 한계원(韓啓源)이 찬한 고유문(告由文). 신적도는 정구와 장현광의 학문을 이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효우(孝友)가 뛰어났다. 200여 년 동안 덕행이 드러나지 않다가 나라에서 이조참의에증직하니 자손에게는 영광이고 공에게는 보답이 있게 되었다
15 연증시고묘문(延贈時告墓文)
后孫相夏 恭惟府君、吾林名碩。炳日之忠、的源之學。九 旬任道、二亂委國。
후손상하 공유부군、오림명석。병일지충、적원지학。구 순임도、이란위국。
1867년에 신적도가 이조참의에 추증되자 후손 신상하(申相夏)가 무덤에 고할 때에 찬한 글. 공은 충절과 학행이 뛰어나 나라에서 증직의 은전을 내리니 후손들이 감격한다고 하였다
16 도유생청가증상언(道儒生請加贈上言)
右謹啓臣矣。身段伏以崇儒術、明正學、王 道之當、先奬忠節、立綱常ㅡ邦典之所尙、是
우근계신의。신단복이숭유술、명정학、왕 도지당、선장충절、입강상ㅡ방전지소상、시
경상도 유생들이 신적도에게 증직(贈職)을 더해주기를 청한 上言. 충신 신적도는 어려서 정구‧장현광에게 수학한사림의 종장(宗匠)이다. 정묘호란과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를 주장하였고, 학산 미곡에 채미헌을 세우고 은거하며 강학하였다. 200년이 지나도 나라의 은전이 없어 울적하였는데 1867년 박선수의장계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그러나 3품의 증직은 그의정충대절(貞忠大節)과 실덕정학(實德正學)에는 미치지 못하니 증직을 높여주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17 사림통문[단구서원타령시제통김석유]( 士林通文[丹邱書院妥靈時製通金奭裕])
伏以鄙鄕先軰虎溪 懶齋申先生、及虎溪胤子忍齋先生、兩世三賢、德學風猷、
복이비향선배호계 나재신선생、급호계윤자인재선생、양세삼현、덕학풍유、
단구서원에 신적도 등의 位牌를 모실 때에 지은 김석유(金奭裕)의 통문(通文). 신적도와신열도, 신적도의 아들 신채는 덕학(德學)으로 사림이 경모하고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충의를 떨쳤고평소 孝友가 뛰어나 양세삼현(兩世三賢)이 배출된 명문이다. 서원에 위패를 모시면서 사림에 통문을 돌리니 많이 참석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