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미희 씨가 카페에 올린 글을 내용이 좋아 여기에 전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독은 혼자있는 즐거움이고, 외로움은 혼자있는 고통이라는데,
지금 내 영혼의 쓰라림은 즐거움인지 고통인지
마음이 지르는 비명을 듣고도 모르는척
억지웃음으로 포장하며 견디다 치료의 쉼표를 찍고저 소백으로 향한다.
처음 만남에 반해버린 산
탁 트인 정상부에 서서 알수없는 눈물이
두볼을, 주름진 영혼을 골골 타고 흘렀던 기억.
그때 이후로 틈만 나면 기차표를 지르게 했던 소백.
이번 여행으로 단지 그 이유가 좋아서 만은 아니란걸 알았다.
난 순흥 안씨다.
비로봉과 국망봉이 병풍으로 둘러서서 순흥마을을 안고
있단건 알았지만, 나의 관향의 아픈 과거를 만져보고
소수서원을 둘러보니 소백과의 인연이 필연일 수밖에 없으리란걸 깨닫는다!
초암사
작은 암자지만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여기서 출토되었단다.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반짝별이 아니라 바짝 마른별이네.
석륜암터의 금방 이라도 날아갈듯한 봉바위 앞에서
눈 보러 온 내게 어雪픈 눈으로 맞이한게 미안했던지 서서히 소백이 하얀 눈을 부른다.
비가오나 눈이 오나 늘 웃고있는 돼지야!
그래 인생 뭐 있나.
한번 왔다 가는 인생, 뭐 그리 아등바등 거리는 겐지.
그냥 내탓이로소이다 하고 웃으면 돼지~~~ㅎ
정상에 다가 갈수록 눈발의 왈츠가 빨라지더니
이내 눈물나게 눈부신 눈꽃이 피어난다.
하얀 비단을 갓 입은 자연 앞에 서니 입은 있으되 그 무슨말도 꺼낼수가 없다.
난도질하는 비로봉의 칼바람 보단 착하지만
제법 날이 선 칼바람이 雪치는 국망봉.
12시가 훨 지난 시각!
비로봉을 찍고 자락길 통해 초암사로 원점 회귀하기에 늦은듯 하나,
허기진 마음만큼이나 고픈 밥통 채우는데 1시간 30분을 소요하는 간큰 영혼!
이번에도 소백에서 작지만 귀여운 '♡' 발견.
저~ 멀리 도둑질 대마왕 하얀 비로봉 조망!
내 마음을 얼마나 많이 훔쳐갔는지.
비로와 국망 사이에 서서 밟아온 흔적 찾기.
지나온 산의 흔적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지나온 삶의 흔적은 왜이리도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자연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괴로워하거나 NO~ 하지 말고
그저 받아들이자. 이또한 지나가겠지~~~ 이카면서.
비로봉(1,439m)
국망에서, 연화에서
비로를 향해 줄지어 밀려오는 산꾼들 틈에 나도 살짝 묻혀본다.
오늘은 비로가 긴칼 옆에 차지 않았나 보다.
분명 찬바람이 얼굴을 할퀴긴 해도,
지난날 눈조차 내 놓을수 없고 사진은 엄두도 못낼
칼바람을 수없이 맞아봤기에 이 정도는 봄날 괜찮은 바람이라 하겠다.
연화봉과 그 아래 천문대 조망
천상의 별장. 주목관리소!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등산화들이 둘러앉아 식도락을 즐기고 있을까?
소백의 등짝을 놓아주기 아쉬워
동,서,남,북 빙글빙글 돌며 사진기를 다그친다.
건전지 먹는 달님을 이마에 달기싫어
비로봉에서 달밭골까지 마라모드로 35분만에 도착. (3시 40분)
이제 소백의 치맛자락을 매만져볼 시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었다는
이기와 문명이 스며들수 없을듯 한 자락길로 들어선다.
구 한말 의병들이 드나들었으며 일본강점기를 전후로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때를 기다리기도 했다고.
이곳 사람들은 아직 아침, 저녁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산신제를지내고
집집이 움막을 파서 감자나 음식을 보관한다.
평범한 민가로 보이는 집 앞에 '수도중' 이라는 팻말과 함께 출입을 금지하는 줄이 처져 있다.
자락길은 비로사에서 초암사로 향하는게 조금 수월하다.
초반 오르막 치면 3km가까이 얕은 내리막이므로,
들머리 초암사에 날머리를 덫대며 등산화를 벗는다.
하얀 소백을 놓아주며 붉은 해넘이의 배웅에
심장이 So~100배 비바체 모드로 춤을 춘다.
소백발치에서 하루 유하고.
몇해 전 나의 관향 순흥마을이 소백발치에 있단 사실을 알았다.
마음은 있었으나 왜 그리도 발걸음이 안되던지.
오늘에서야 짬을 내어 나의 뿌리를 둘러본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코끝이 찡해오는 이유는 뭔지.
영화 set장 같기도 한 마을에는 세월이 멈춰 버린듯 하다.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역모하다 유배된 순흥마을
유배지에서 조차 역모를 단행하다 금성대군 비롯 이곳
순흥마을은 피바람이 불어닥쳐 안씨들이 떼죽음을 당하여
지금의 소수서원 앞 금계계곡에 무자비로 수장되어 그 핏물이
10리를 흘러 동촌리에서 멈췄다 하여 동촌리를 피끝마을이라 부른다.
그 후로도 순흥마을은 일제치하 속에서
가장 먼저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끝없는 독립운동이 일자
일본군에 의해 다시금 마을에 피바람이 일어 역사속 아픔이
아직도 배어있는듯 하다.
마을 바로 곁에 있는 10만평의 소수서원!
실은 소수서원이 순흥에 있는지 오늘에서야 알았다.
유학의 불씨 안향,
백운동을 세운 주세붕,
8년뒤 사액을 받아 백운동을 소수서원으로 발전시킨 이황에
이르기까지. 오늘 역사 공부 제대로 한다.
퇴계 이황의 친필
비로봉 국망봉이 품고있는 순흥마을의 소수소원~
옛날 이렇게 멋진 병풍앞을 거닐던 학생이 되어 소수서원 곳곳을 누벼본다.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 '지락재'
왼쪽은 총장방 (직방재), 오른쪽은 선생님방(일신재)
3,000권의 책을 뒀던 도서관 (장서각)
문성공묘... 보물 제 1,402호
조선시대 임금과 왕비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서울의 종묘처럼
안향의 위업을 왕에 버금가는것이라 하여 문성이라는 호와 묘호를 준것
백운동 현판 안에 소수서원
(주세붕) (퇴계이황)
성생단!
가운데 소를 올려놓고 각 전문의들이 진단해 합경여부 도장을 찍던곳...
날으는 소...ㅎ // 합격
경염정.
이황선생이 제자에게 현판을 쓰게 했으나 스승앞에서
떨리어 글이 안되자 이황이 자리를 피해주고 쓴 세글자가
마치 용이 하늘을 날으는 고귀한 필체였다한다.
허나 강점기 일분군이 도끼로 현판을 잘라
지금은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금계 계곡수에 떠 있는 '경'자 바위
주세붕이 남겼다는 경(敬)자 바위.
선비의 덕복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다고.
퇴계 이황이 터를 닦은 '취한대'. // 경자바위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
자연을 벗하고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고 곡차도 나누던 곳.
헌데 저 앞에 흐르는 계곡수에 그많은 안씨들이 수장을 당했다니.
소수서원 입구 350년 된 소나무 천그루.
500년이 되면 정확히 육각형의 옷을 입는다고 한다.
"안씨는 못됐다."
역사해설가께서 처음 내뱉으신 말에 모두 웃는다.
'안한강최'
최씨 여자가 안씨집안에 시집을 가게 되면
이제 죽었구나 한단다.
이몸이 순흥안씨라 했더니,
그럼 이제부터 자랑스럽게 가슴펴고 당당하시란다.
못됐다는 의미는 기개와 절개가 굳고
자신에게 투철해 의지가 강하다는 의미라고.
독하다는 말을 많이 들은 이유가 이 핏속에 있는건가?
이번 나들이는 소백의 향기도 좋았지만
내 뿌리를 알게 되는 귀한 시간을 가졌음에
알 수없는 사명감이 온몸을 뜨겁게 하는 묘한 경험을 한다.
조상님의 얼을 본받아 앞으로 더 독하게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