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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 시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폭력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아무곳이나 펼쳐도 저주 선언이 가득하고... 물론 축복을 말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저주들이 너무 많아 무섭다. 지키면 축복이고 어기면 저주인가?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있는거지?"
이에 대한 R.C. 스프로울의 주해를 번역해봤습니다. 오늘 날 교회는 축복을 주로 말하지 저주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스프로울 박사는 저주에 대한 설교가 우리의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주장합니다.
When the New Testament speaks of the atonement of Jesus, it does so in terms of substitution. It calls attention to a death that in some way was vicarious. We see that it speaks of the satisfaction of the justice and of the wrath of God. We see the metaphor of the Kinsman - redeemer who pays the bridal price to purchase His bride with his own blood, releasing her from bondage. We see the motif that is used in the New Testament that speaks of ranson that is paid. There is the motif of victory over Satan and the powers of darkness, when the serpent's head is crushed under the bruised heel of the Redeemer.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여러가지 모델들이 있는데, 첫번째 관점은 바로 '대속' 입니다. 대속은 예수님의 죽음이 타인을 대신한 대리적인 죽음이었고,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만족시킨 일이었다는 점을 잘 말해줍니다. 또한 성경은 구세주께서 자신의 핏값을 지불해 신부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속전'의 관점 역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상한 발꿈치가 뱀의 머리를 박살냄으로써 사탄과 어둠의 권세로부터 이기게 되는 '승리'의 관점 역시 잘 드러나지요.
But there is one image, one aspect of the atonement that has receded in our day almost in to total obscurity. That is the curse motif of the atonement. We heard earlier of those attempts to preach a more gentle and kind gospel. And in our efforts to cummunicate the work of Christ more kindly, we flee from any mention of a curse inflicted by God upon His own Son. We shrink in horror from the words of the prophet Isaiah in the fifty-third chapter that tells us, among other things, that "it pleased the Lord to crush Him". Can you take that in that somehow the Father took pleasure in crushing the Son, when he set before him that awful cup of divine wrath? How in heaven could the Father be pleased by crushing His Son, were it not for His eternal purpose through that crushing of Him to restore us as His own Children?
하지만 오늘날 거의 설교되지 않고 사라지다시피한 관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저주'의 관점입니다. 앞에 설명드렸던 관점들은 복음을 보다 교양있고 부드럽게 선포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부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을 좀 더 부드럽게 보이게 하려는 노력하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저주하셨다는 관점으로부터 도망쳐버립니다. 이사야 53장 10절, "주님께서 그를 짓밟으시기를 기뻐하셨다" (한국어 개역성경은 "상함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로 번역함) 는 구절을 볼 때마다 공포로 인해 질려버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에게 끔찍한 진노의 잔을 건내시고, 그를 짓밟아버리길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한 영원한 목적이 아니였더라면,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짓밟기 원하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But there is this curse motif that seems utterly foreigh to us, particularly in this time in history. We believe in a God who is infinitely capable of blessing people, but is utterly incapable of cursing them. And I would like to take some time with you this afternoon to explore the meaning and the significance of this idea of divne curse. If you really want to understand what it meant to a Jew to be cursed, I think the simplest way is to look at the famous Hebrew Benediction in the Old Testament.
이러한 저주의 관점은 우리들에게 있어 굉장히 생소한데, 특히 요즘 현대사회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은 무한하지만, 저주할 능력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을 만들어내어 믿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하나님의 저주의 의미와 중요성에 시간을 할애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시를 살던 유대인에게 있어 '저주받는다' 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우선 구약에 나타난 축도 의식을 살펴보시면 됩니다.
"May the Lord bless and keep you
May the Lord make His face to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unto you
May the Lord lift up the light of His countenance upon you and give you His peace."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풀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햐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But my purpose this afternoon is not to explain the blessing of God but its polar opposite, its antithesis, which again can be seen in vivid contrast to the benediction. It would be the supreme malediction that would read something like this.
하지만 오늘 제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 정반대에 위치한, 축복의 대척점이자 축도와 극명히 반대되는 저주 선언에 관한 것입니다.
"May the Lord curse you and abandon you
May the Lord keep you in darkness and give you only judgment without grace
May the Lord turn His back upon you and remove His peace from you."
"여호와는 네게 저주를 내리시고 너를 버리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너를 어두움 가운데 두사 은혜없이 심판만을 베풀기 원하며
여호와는 너에게서 등을 돌리사 그의 평강을 너로부터 제하기를 원하노라"
Let's not forget that other animal that liberal theologians try every which way to erase from the biblical record. Yes, I am speaking of the goat, the scapegoat who becomes the object of imputation, where the priest is now lays his hands on the back of that goat, symbolically indicating the transfer, or the imputation of the guilt of the people to to the back of that goat. So at the end of that ceremony the priest lays his hands on the goat and says, "May the sins of the people be upon this goat". and then says to the goat "Thank you very much for standing still during this, and people you are dismissed". No,no,no,no,no. The significance really reaches its crescendo after the imputation of the sin of the people to the back of that goat. When the goat is driven into the wilderness, outside the camp. You remember when God numbered the people according to the tribes and they pitched the tabernacle, the tribes were in a circle and what was in the middle, equidistant to every settlement of every tribe, was the tabernacle indicating God is in the midst of His people. And to be driven out of the covenant community, to be driven outside the camp was to be driven to the place where the blessings of God did not reach, sent into outer darkness, into the wilderness, into exile, into the curse.
대속죄일의 염소, 곧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기록에서 제거하고자 무단히도 노력하는 이 동물의 예시를 한번 살펴봅시다. 제사장이 염소에게 손을 얹고 안수하는 행위는 백성들의 죄악을 염소에게로 전가시키는 것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의식의 마지막쯤 됐을 때, 제사장은 염소에게 손을 얹으며 "백성들의 죄악이 이 염소에게로 옮겨졌다" 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입니까? 염소에게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한마디 해주고, "자, 이제 다들 집에 가세요" 라며 백성들을 해산시킵니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 죄의 전가 이후 행해집니다. 바로 죄를 전가받은 그 염소를 진영 밖 광야로 내쫒아 버리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을 지파별로 모아 성막을 건설케 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각 지파들이 둥글게 자리하고, 그 중앙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걸 암시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언약 백성의 진영 바깥으로 내쫓긴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축복이 더이상 도달하지 않는 광야, 바깥 어두운 곳으로 추방당해 저주 아래로 들어감을 의미했습니다.
When in the cross, not only is the Father's justice satisfied by atoning work of His Son, but in bearing our sins, the Lamb of God removes our sins from us as far as the east is from the west. Howe does He do that? By being cursed. Christ redeemed us from the curse of the law, not simply by being cursed for us, but becoming a curse for us. He who is incarnation of the glory of God now becomes the very incarnation of the divine curse.
아들의 속죄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짊어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인해 우리의 허물이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제거 되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가능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저 저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저주 자체가 되심으로써 (한글 개역성경에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 로 번역함)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의 화신이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Many many years ago, I was asked by the Quaker community of Pennsylvania, the Society of Friends. And as I spoke of Christ becoming cursed, my message was interrupted by a guy in the back who stood up and shouted outloud, "That's primitive and obscene!" I was taken aback and just to give myself chance to think, I said, "What did you say?" And with a great hostility, he said, "I said that's primitive and obscene!" And I said, "You are right. I really liked the second word you used, 'obscene'". If there ever was an obscenity that violates contemporary community standards, it was Jesus. Because after he became the scapegoat and the Fater imputes to Him every sin of everyone of his people, we see the most intense, dense concentration of evil ever experienced. Jesus was the ultimate obscenity. And so what happened?
오래전에 저는 펜실베니아에 위차한 퀘어커 교도들의 집회에 초빙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저주가 되심에 관하여 설명 중이었는데, 한 남자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제 설교를 끊었습니다. "너무나 미개하고 추악하군요!" 저는 깜짝 놀랐지만 잠시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되물었습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그러자 그 남자는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그런 설명은 미개하고 추악하다구요!" 저는 이에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참고로 당신이 사용한 '추악한' 이라는 표현이 참 마음에 드는군요".
만약 현대사회의 기준에서 용납되지 못할 정도로 추악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자들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에게로 모조리 전가시켰을 때, 그 분은 역사상 가장 강렬히 응집된 죄덩어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The Bible tells us that God is too holy to even look at sin, and He cannot bear to look at this concentrated, monumental condensation of evil and His eyes are averted from His Son. The light of His Countenance is turned off, all blessedness is removed from His Son whom He loved. And in its place was the full measure of the divine curse. And God adds to these details astronomical perturbations, where at midday He turns the light out on that hill outside of Jerusalem so that when His face is moved away, when the light of His countenance is shut down, even the sun won't shine on Calvary.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성경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고 기록합니다. 온 죄악이 송두리째 뭉쳐진, 역사에 유래없을 죄악의 결정체 앞에, 주님께서는 그 아들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그에게서 눈을 돌리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그의 얼굴빛을 돌리시고 모든 축복들을 제거하십니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건 완전한 위력으로 쏟아지는 하나님의 저주 뿐입니다. 그의 얼굴빛이 예수님에게서 가리워졌다는 것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정오에 태양이 빛을 잃고 예루살렘 성문 밖, 갈보리 언덕은 흑암에 뒤덮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계속)
첫댓글 아? 잘 올리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이 바쁘신가 했는데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이 유익하고 이 카페에 참여도가 높아서 더욱 좋습니다.
본문 중 퀘이커 에피소드는 이해가 됩니다. 천로역정의 존 번연이 석방 등에서 퀘이커의 물리적인 도움을 받았지만 교리, 신학적으로는 퀘이커에 동의하지 않고 거리를 두었고요. 개혁주의 거목 루이스 벌코프는 퀘이커 교리의 오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번역하면서 저 자신에게도 여러모로 유익이 되고 있어요. 너무 길어서 두번에 나눠서 올릴 생각이예요. 이 글이 카페에 계신 분들에게도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퀘이커 에피소드는 저도 번역하면서 의외였네요 ㅎㅎ 퀘이커 교단에서 스프로울 박사에게 강단을 내어줬다고 했을 때 의아했는데, 역시나 설교 중 브레이크가 들어왔나 보네요
@십자가 이 글은 내부 회원 외에... 외부 회원에게도 보여져요^^ 그 유익함이 확산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요.
자 보세요! 사진을 확대(핸드폰 확대는 더 쉬움)하면 시간 순서에 따라 십자가님의 글이 검색결과 맨 위에 올라가요 ^^
@십자가
@장코뱅 앗 그렇군요! 중요한 정보 감사합니다. 번역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겠어요
복음을 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아주 좋은 글이네요. 좋은 번역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프로울 박사의 복음 설교는 항상 유익이 되는 것 같습니다. 번역하면서 저에게도 도움이 됨을 느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습니다. 죄와 은혜는 불가분 연결된 관계인지라, 죄가 중하고 심각할수록 그러한 죄를 전가받아 죽으신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더 은혜롭게 느껴질 수 밖에 없지요. 따라서 죄를 경시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구원의 은혜도 경시되게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