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의 시대(15~16세기)
후발주자들의 합류(17세기)
쇠퇴(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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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또는 신항로 개척 시대란 유럽인들이 항해술을 발전시켜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고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는 등 다양한 지리상의 발견을 이룩한 시대를 말한다.
대체로 포르투갈 왕국의 엔히크 왕자를 주축으로 한 15세기 초중반의 대서양 방면 해외 진출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스페인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아메리카 항로개척, 바스쿠 다 가마의 아프리카 남단을 통한 인도 항로 개척, 그리고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가 이루어진 15세기 말-16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하였다. 이 영향으로 고대 이후 동서양이 교역하는 육상 통로였던 비단길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1]
그리고 대서양이 아닌 북유럽 일대에서 군소 규모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던 한자 동맹도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식민제국 건설, 뒤를 이은 후발주자들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설립을 끝으로 대항해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럽은 식민지 땅따먹기에 혈안이 되는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는 점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중세 아랍권과 중근동 지방 국가들의 중계무역을 통한 경제발전이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올스톱하게 되어서 현재에도 전근대적 요소가 남아있게 되는 결정타를 가져왔다. 사실상 유럽을 비롯한 범 서구권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한 이슬람권의 경제 및 사회문화적 격차가 점차 가시적으로 눈에 띄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랍권은 20세기 중반경, 대량의 석유 발견 이전까지 국력이 오랫동안 정체되었다.
요약하자면 지역적으로 한정된 교역만을 이어가거나 아예 서로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각 문명권과 대륙권들이 본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하고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게 된 진정한 의미로서 세계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대륙을 기반으로 한 범 서구권 국가들의 직접적인 탄생과 이들의 국제 무대 진출은 사실상 대항해시대가 자양분이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
2. 명칭[편집]
본래 대항해시대를 뜻하는 '에이지 오브 디스커버리(age of discovery)'는 직역하면 '발견의 시대'라는 뜻인데, 이는 순전히 서양인들의 일방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역사관이 투영된 말이다. 즉, '침략자이자 가해자'인 유럽인들이 자신들 입장에서 붙인 명칭일 뿐이고, 아메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와 다른 여러 지역의 피해 국가 입장에서는 '침략자들의 유입'[3]일 뿐이라는 점이다. 또 이를 번역한 '대항해시대'는 일본어 '大航海時代(だいこうかいじだい, 다이코우카이지다이)'를 중역한 말이다.[4]
이에 따라 최근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 등지에는 대항해시대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비교적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신항로 개척'으로 용어를 바꾸고 있는 추세이다. 검인정화 이전 중등과정 국정 사회교과서도 제5차교육과정 중인 1989년 '지리상의 발견'을 '신항로 발견'으로 바꿨다.[5]
3. 신항로 개척의 동기[편집]
3.1. 종교적 동기[편집]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기간 가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대립해왔는데, 레콩키스타로 불리는 이베리아 가톨릭 세력의 이슬람 축출 과정 이후 이베리아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해져갔다. 하지만 이슬람을 몰아냈음에도 이베리아의 왕조들은 이슬람 세력을 경계했고, 동방에 있다는 전설 속의 가톨릭 왕 프레스터 존을 찾아 동맹이 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지중해를 통해 동쪽으로 가는 것은 오스만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대서양을 통해 반대편으로 간다면 프레스터 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된다.
3.2. 경제적 동기[편집]
페스트는 봉건제를 무너뜨린 불씨가 됐다. 페스트로 인한 인구 급감이 노쇠한 봉건제를 빠르게 붕괴시켰다. 노동력 감소가 임금 인상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2~3배의 임금 인상으로도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임금을 10배 이상 올렸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소작농을 못구한 영세 영주들이 파산하기 시작하자 중세는 급격히 재편된다. 시장과 화폐 경제, 교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체적인 국가 경제 팽창은 대항해 시대의 실마리가 되었다.#
3.3. 향신료[편집]
대항해시대의 발생 원인 중 하나는 향신료, 그 중에서도 후추가 지대한 비중을 차지했다. 비록 중반 이후부터는 너도나도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어 수요보다 공급이 배로 급증하는 바람에 향신료 무역이 시들해져버리긴 했지만 대항해시대를 열게 만든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대항해시대 원양항해가 막대한 돈과 시간,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 함에도, 한번 향신료를 가져오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당시 유럽에서의 향신료는 비싸게 거래되었다.
이는 국왕, 귀족을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만한 요소가 되었고 덕분에 많은 탐험가들이 신항로 개척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자체를 열게 만든 기폭제 역할이었으며, 대항해시대 중반부터는 개척된 항로를 바탕으로 무역이 과열되어 향신료는 예전의 메리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 유럽인들의 시각에 들어오게 된 아메리카 대륙의 금, 은, 노예, 설탕과 같은 것들이 향신료 위치를 대신하였다.
흔히 알려져 있는 먼나라 이웃나라에 있는 설명은 오스만 제국의 성립이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막아버리고 이것이 대항해시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간 순서를 봐도 이것이 잘못된 통설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기존의 인도양-홍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제국에게 흡수된 것은 1517년인데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한 것은 1498년이다. 이조차도 맘루크 왕조가 멸망한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은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봉쇄해서 맘루크가 향신료를 유럽에 팔 수 없게 되자 재정적자로 병사들의 급여가 밀려 병사들이 태업을 한 것이었다.
오스만은 기존의 지중해 무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는 않았다. 단지 특혜와 관세라는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당시 지중해 무역의 주체인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견제한 수준이었다. 통계 자료에서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이 성립한 시기를 전후한 향신료의 가격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물론 그전이나 그 후나 향신료의 가격 자체가 높은 건 사실이나, 그 변화 폭이 두드러진 수준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유럽의 향신료 가격 폭등은 맘루크의 멸망 직전인 1510년대의 현상이었다. (출처: 남종국,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과 지중해 향신료 무역, 해항도시문화교섭학 제18호, 2018.04)
그럼에도 오스만의 동지중해 석권이 대항해시대 개막의 계기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끊임없이 유럽국가의 동지중해 거점을 차근차근 무력으로 정복하고 있었다. 시리아의 아크레나 크림반도의 조차지 같은 내륙거점은 일찌감치 털렸고, 그리스 반도, 크레타 섬 순으로 차근차근 정복당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막대한 투자로 구축해놓은 방대한 무역거점이 다 날아간 결과 그리스 공국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곤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는 완전한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 시기 동방무역로는 유지되었으나 베네치아의 거점에서 베네치아의 해군력에 의해 보존되는 교역로에서 오스만의 거점에서 오스만의 해군력에 의해 유지되는 교역로로의 변화가 생겼고, 이를 통해 술탄은 향신료를 대량으로 풀었기에 최종소비가격은 유지되었으나 중개수익은 고스란히 오스만의 손에 들어갔다.
이 중개수익은 단순 운송수익에만 한정한 게 아니라 그리스 공국 같은 해당지역 거점에서 사들이는 향신료 수익으로 요새를 유지하고 함대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것이 오스만으로 이전된 결과 오스만 해군의 막대한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고, 오스만군이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칠 수 있는 막대한 재정수입이 되었다. 이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재정수입을 잃었기에 쇠퇴를 면치 못했으며 유럽국가들은 주적인 오스만의 전쟁자금을 쥐어주는 향신료 수입에 대한 재정적자를 막고 새로운 항로를 뚫어야하는 군사적, 재정적 필요가 존재했다. 이 지역거점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 때문에 한번 가는 것도 힘든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획득하고 막대한 인력을 상주시켜야하는 식민지를 세워 향신료와 같은 인도산 물자를 수입했고 비로소 안정된 선단과 교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 한두 척이 잘 모르는 다른 지역에 무작정 간다고 물건을 대량으로 팔아줄 상인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만약 그런 물자와 그 물자를 지킬 군사력과 거점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운송업자보다 훨씬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잘 해온 향신료 무역이 어려워져서 신항로를 찾은 건 스페인 정도에만 해당하고, 오스만의 동지중해 석권 이전에도 영국이나 프랑스는 향신료 중개무역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신항로 개척도 스페인에 비해 늦었다.
실제로 당대에도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은 많은 이슈가 되었으며,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당 이슈에 매우 비관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신들의 지중해 무역 패권은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다수였으며, 심지어 오스만과의 분쟁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라는 평까지 나왔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포르투갈이 자신들의 경쟁자가 될 것임을 우려하여 여러 노력을 했으나, 포르투갈의 향신료 시장 참전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의 프랑스 우대 정책, 향신료 덤핑 정책 등으로 인해 베네치아의 향신료 시장의 독점적 위치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3.4. 포르투갈 왕국의 경우[편집]
대항해시대 전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지리적 입지 조건은 유럽 최대의 해상무역권이었던 지중해와, 그 다음가는 북해 및 발트해 그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고 농업이라도 잘 되냐면 그건 또 아니라 농지는 척박하니 결국 '상업중심지에서 동떨어진 변방'임에도 상업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6]
때문에 포르투갈은 유럽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강성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왕위계승전쟁에서 전통귀족세력이 지지한 카스티야가 패하고, 상업 부르주아 세력이 후원한 아비스 왕조가 들어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업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탄생한 아비스 왕조는 자연스레 해양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히크 왕자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단 국내 내부적으로 바다로 나아가야 할 정치적·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허나 당시 포르투갈의 국력으로는 유럽 대륙 안쪽으로 나아가기가 벅찼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포르투갈이 갈 수 있었던 곳은 대서양과 아프리카뿐이었다.
포르투갈은 14세기부터 마데이라를 발견해 개척했고, 15세기에는 아조레스를 발견했다. 또한 레콩키스타의 완료와 오스만의 팽창이라는 두 사건에 힘입어 이슬람 세력에 맞서 더 넓은 지리적 발견과 선교가 요구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금 무역에 대해서도 포르투갈인들이 흥미를 느꼈다. 이 두 요인은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탐사에 나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 항해가 성과를 거두자 '내친 김에 인도까지 갈 수 있나 가볼까?' 라는 생각에 바스쿠 다 가마의 탐험이 시작되었고,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의 성과를 이룩한다.
3.5. 스페인의 경우[편집]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달리 서지중해를 접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당대의 이탈리아 반도 국가들과 더불어 지중해 해상무역권 쟁탈에 일찌감치 참여하고 있었다. 먼저 이를 주도한 것은 스페인의 전신인 아라곤 왕국이었는데, 아라곤은 먼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고 이를 발판으로 지중해 각지로 뻗어나가 1311년 아테네 공국을 접수하더니 1442년에는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의 왕위까지 장악하여 지중해에 아라곤 해상국가를 완성시킨다. 아라곤 왕국은 이를 기반으로 베네치아, 제노바와 함께 지중해 3대 세력으로 거듭나려고 했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무너뜨리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직후 아테네 공국까지 흡수하면서 상황이 매우 안 좋게 바뀌고 만다. 오스만 제국이 제국 내부를 통하는 모든 무역 경로에 대해 아라곤 왕국을 차단해버린 것. 이는 아라곤이 오스만의 팽창과정에서 어깃장을 놓으며 적대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오스만이 패권을 쥐게 된 후 이루어진 보복행위였다.
대항해시대와 관련하여 잘못 알려진 통념 중 하나인 '강성해진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을 차단해서 유럽이 대항해시대에 열을 올리게 됐다'는 부분은 사실 반만 맞는 것으로 정확히는 아라곤 왕국만을 차단했다. 모든 유럽세력의 무역을 차단'한 게 아니라 '현 스페인의 전신인 아라곤만 차단'했으며, 아라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무역 루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후 오스만 세력은 중부 지중해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식민지를 모조리 점령하면서[7] 유럽 지중해 국가들의 해상무역권은 완전 날아가 버렸다. 오스만에 적대적이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까지 박살 난 이후에는 아예 지중해 해상 패권 자체가 오스만으로 넘어가버린 상황이었고, 오스만의 지원을 받는 바르바리 해적들까지 설치면서 무역은 더 어려워졌다.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국왕간 혼인에 따른 국가통합으로 탄생한 스페인으로서 이는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당시 어마무시한 패권을 가진 오스만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라곤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해양 부르주아지 세력은 왕가에 지속적으로 빼앗긴 지중해를 되찾든가, 아니면 이를 대신할 새로운 무역 루트를 개척하게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 시점에 이미 포르투갈은 신항로를 통해 인도로 다가가는 중이어서 스페인의 상업 부르주아지들은 포르투갈에 뒤쳐질지 모른다는 조급함에 자신들도 이에 따라 신항로 개척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결국 스페인도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서 신항로 개척에 참여하게 된다.
3.6. 기술력[편집]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럽인들에게 원양항해는 이때가 최초였다. 원양항해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은 전무했고, 현지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거의 없었다. 중국이나 인도의 존재는 그 당시에도 알려져있긴 했으나 몇몇 여행기에서 전해오는 오래되고 단편적인 지식이 전부였고, 아메리카는 일부만이 알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랐었다.[8]
그러나 과거 이슬람과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나침반, 아스트롤라베, 사분의 같은 각종 측정기구들은 태양과 별의 위치보다도 더 정확하게 방위를 알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그들의 원양항해술을 배울 수 있었다. 변방에 위치해 먹고 살려면 바깥으로 나아가야 했던 포르투갈은 가장 이에 관심을 보였고, 포르투갈의 1세기에 걸친 서아프리카 항해로 어느 정도 대양 항해를 위한 항해술과 해도 제작 능력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초적인 원양항해 능력과 때마침 강성해진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항해술은 급속도로 발달, 카락과 캐러밸 같은 본격적인 대양 항해용 선박들이 등장하였다. 후에 이는 다시 갤리온으로 이어져 어느새 유럽인들의 대양항해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한다. 정리하자면 수요에 의해 기술이 맞춰 발전한다는 말에 따라, 유럽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은 원양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후에 발전할 원양항해술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동방의 강성한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필연적으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은 포르투갈을 따라 원양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덕분에 대항해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 이렇게 유럽 세력은 좁은 유럽에서 넓은 세계로 시야를 확장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에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의 바탕이 된다.
4. 결과[편집]
4.1. 탐험의 시대(15~16세기)[편집]
대항해시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 상륙과 카리브 지역 탐험을 마치고 몇 명의 원주민들을 납치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원주민들의 존재를 확인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신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항로의 등장은 그들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 결과 국가 단위로 행해진 탐사가 크게 벌어졌고 곧 이는 국가 간의 충돌을 야기했으며 이를 중재하기 위해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신대륙인 아메리카와 함께 유럽인들의 원래 목적이었던 인도로의 항로 개척도 충실히 이루어져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드디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달하였고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더나아가 말라카까지 정복하여 동남아시아 진출로의 교두보까지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일련의 성과로 무역의 판도는 마침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지속된 탐험으로 드디어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이 인도가 아닌 또다른 대륙임이 확실해지자 유럽에 최초로 신대륙의 존재를 알린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게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정작 발견 당사자인 콜롬버스는 아메리카를 아시아라고 굳게 믿었다는 점이다.
아메리카와 인도가 다른 지역임이 알려지고 향신료 원산지인 인도와 동남아시아로의 진출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유럽인들은 '그렇다면 아메리카와 인도 사이에 또 뭐가 있단 말인가?'라는 궁금증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태평양이며, 태평양의 발견과 함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함대는 최초로 세계일주를 마치는데 성공한다.
4.2. 후발주자들의 합류(17세기)[편집]
이렇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눈을 대양으로 빠르게 돌린 덕분에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자, 북해의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대륙의 프랑스 또한 이에 동참하게 된다. 이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자 간의 합의인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간단히 무시해버렸고 몇 차례의 분쟁과 전쟁을 걸쳐 앞선 두 나라가 얻어낸 영토와 이권을 어느 정도 뺏어오는 데에 성공한다. 이중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과 거점 확보를 총괄하는 동인도회사를 각각 설치하여 본격적인 범세계적 무역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모두 활발한 활동으로 실질적인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결국 제한된 시장을 놓고 마찰이 잦아지던 와중 영란전쟁을 통해 충돌하게 된다. 여러 차례의 싸움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영국은 해양 무역로의 패권을 거머쥐고 대영제국이라는 전성기를 열게 된다.
프랑스 또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긴 했으나 시장 개척보단 식민지 개척(특히 퀘벡)에 더 중점을 둔 경우였다. 하지만 이후 영국 또한 식민지 개척을 시작하면서 두 나라는 아프리카, 남아시아, 북아메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자주 충돌하게 된다.
4.3. 쇠퇴(18세기)[편집]
대항해시대는 수십 년에 걸친 탐험과 개척, 정복 끝에 유럽인들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바다 및 육지를 발견하여 더이상 새롭게 찾아나갈 곳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끝나게 된다. 뒤이어는 내륙 탐험 및 정복의 역사가 주를 이룬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의해 아즈텍 제국, 마야 문명,[9] 잉카 제국이 차례대로 멸망하고 중남미 아메리카는 브라질을 제외하고[10]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한편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후발주자들은 이미 이베리아 국가들이 선수친 중남미[11]에서 눈을 돌려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로의 진출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어인과 영연방 회원국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의 기원이 된다.
대항해시대 중반인 17세기 무렵부터 유럽에서 먹고살 만한 나라들은 대부분 대양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너도나도 새로운 시장(사실상 식민지)을 개척하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때, 당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막대한 금, 은으로 인한 가격 혁명(Price revolution)이 발생했으며,[12] 이로 인한 신흥 자본 세력의 대두, 봉건 세력의 몰락과 함께 유럽은 계몽시대, 산업혁명을 거쳐 제국주의로 나아간다.
또한 앞서 말한 제국주의로의 발전과 연관되어서, 이 대항해시대는 유럽인들이 다른 세계, 문명에 비해 자신들이 더욱 발전했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 중심주의로 연결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지리 분야로만 한정한다면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기존에 국왕으로부터 명령과 자금을 받는 대규모 원정 대신, 정부와 의회의 통제를 받는 근대적 의미의 탐험(Expedition)의 시대가 열렸으며,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로는 개인, 혹은 상인단이 꾸린 중소규모의 탐험대, 또는 정부나 의회의 지원을 받는 상업조직, 지리학회(Commercial Geography) 등이 이끄는 민간조직이 탐험대의 주역이 되었다. 정부에서 출자해 조직한 원정대도 이전처럼 대규모의 원정대를 꾸리기보다는 보다 현지사정에 밝은 협력자, 선교사와 각 분야의 학자들을 앞세운 <탐험대>를 조직했다. 이들의 주요 성과는 대항해시대 이후로도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던 아프리카 대륙 내륙, 중앙아시아, 오세아니아의 남은 도서지역, 그리고 극지방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주었지만, 이들 또한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이들과 동반한 침략국가의 무력활동은 많은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 탐험가로 저명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콩고 착취로 악명높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수행한 헨리 모턴 스탠리와 같은 사례가 있다.
5. 목숨을 건 항해[편집]
각종 창작물에서의 묘사로 인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시대로, 미지의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라서 바다와 항해에 관한 작품들은 그때부터 수 없이 많이 등장했다. Antonio Pigafetta, George Best, Richard Hakluyt 같은 사람들이 이미 16세기에 항해기를 출판했으며 소설로도 The Life, Adventures & Piracies of the Famous Captain Singleton(1720), The Adventures of Roderick Random(1748)등 진작부터 해양 소설이 출판되었다. 또한 해적에 관한 낭만적인 묘사 역시 18세기가 원조다. 영국에서 출판된 A General History of the Pyrates(1724)가 처음인데 이 책에서 이미 검은 수염, 졸리 로저, 앤 보니, 윌리엄 키드 등 오늘날 유명한 해적들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들을 다 담고 있었고, 오늘날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도 이미 이 때부터였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해서, 당대의 항해자들은 불과 한강 유람선 크기[13][14]의 범선에 수십 명의 선원을 태우고 바람에만 의존해 세계의 바다를 누볐다. 당연히 몇 달씩 육지 구경도 못 했다. 볼일은 바다에 투척하는 것으로 해결했기에 화장실도 없었으며[15] 물이 많이 들어가는 빨래, 샤워는 육지에 정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꿈도 못 꿨다.
당시 범선 항해에서 선원들이 무서워했던 것은 쥐도 괴혈병도 아닌 바로 무풍지대였다. 차라리 맞바람이라도 불면 돛을 이용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지만[16] 바람이 안 불면 그냥 망망대해에서 선장과 동료선원들과 함께 사이좋게 천천히 말라죽어 갈 뿐[17]이었다. 이렇게 무풍지대에서 선원들이 전원 사망한 후 선박에는 사람의 해골들만, 바람이 안 부니 해류를 따라 배가 이리저리로 떠다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령선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러나 무풍지대는 무풍지대라는 말에서 의미하듯 특정한 지역에서만 발생하지 무작위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북위와 남위 30도 지점과 적도가 무풍지대가 발생하는 곳으로 그 외의 바다에서 며칠씩 바람이 불지 않는 경우는 없다. 또한 무풍지대라 해도 해류는 흐르기 때문에 한 달씩 발이 묶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사르가소 해는 해류조차 순환하기 때문에 공포의 바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대항해시대 초창기인 16세기에는 지리가 알려지지 않아 무풍지대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유령선 등 민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7세기부터는 세계의 무풍지대가 대부분 파악되어 문제가 해결되었다. 다만 이 문제로 당시의 범선 항해 경로는 최단 경로보다 훨씬 길었다. 예를 들면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를 왕복할 때 유럽에서 출발할 때는 서아프리카까지 내려가서 무역풍을 탔고, 유럽으로 돌아올 때는 보스턴까지 올라간 다음 편서풍을 탔다. 항해사들이 이를 이용해서 유럽(공산품)→아프리카(노예)→아메리카(플랜테이션 작물)→유럽을 순환하는 무역을 했는데 이를 삼각무역이라고 했다. 오늘날에는 레저용 정도를 제외하면 바람 외에 동력이 없는 범선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무풍지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중암초 또한 무서운 존재였다. 피해가면 그만인 무풍지대와는 달리 물 속에 잠긴 암초는 볼 수 없으니 피해갈 방법이 없다. 배가 수중 암초와 충돌하면 암초에 걸려 좌초하거나 선창이 뜯겨나가 침수된다. 피할 방법이 없으니 운 없으면 그냥 망망대해에 좌초해서 죽는 수밖에 없다. 수중 암초는 수백년간 해양 사고를 통해 위치가 알려져 해도에 위치가 표시되는 21세기에도 해양 사고를 많이 일으키는 주범이다. 2010년 오리엔탈 호프호는 5만톤급 화물선이었음에도 이어도 해역에서 수면 4.6m 아래 있는 수중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가 두 동강이 나서 침몰한다.#[18] 암초에는 수만톤급 화물선도 대책없이 침몰하는데, 수백톤급 범선이라면 어떻게 될지 말할 필요도 없다.
질병 통제가 잘 될 리가 없는 협소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 생활했기 때문에 선원들은 당연히 질병에 매우 취약했다. 특히 당시 위생 관념상, 각종 질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선 주기적인 목욕과 신선한 야채 공급이 필수인 것조차 몰랐으므로 이를 대처하기도 힘들었다. 수많은 선원들이 질병에 시달리면서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이는 거의 18세기가 되어서야 제임스 쿡이 선원들에게 강제로라도 절인 양배추를 먹이고 찬물 목욕을[19] 시키면서 해결되었다.
당시 식량은 비스킷, 염장고기, 썩은 물과 럼에 불과했다. 비스킷은 돌처럼 딱딱한데다 곰팡이가 피었고 가장자리는 쥐가 갉아먹은 것이었으며, 썩은 물에는 죽은 쥐가 떠 다니고 있었다. 나무통에 물을 담으면 물이 썩는다는 문제를 인지하고 그 대안으로 철제 통이 등장함으로서 해결되었지만, 이것도 상당히 늦게 도입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선원들은 물보다 럼과 같은 술을 더 선호했다.[20] 그런 썩은 물조차 부족해 씻기도 어렵고 옷을 세탁하기도 어려운 채 거지꼴 몰골로 땀 흘리며 육체노동을 했다. 당시 범선은 화재에 취약했으므로 추운 날에 물에 젖으면 오들오들 떨어야 했고 씻을 때도 물을 데울 수가 없었다. 이는 극지방 근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원들을 이끌고 항해를 하려면 선원들의 반항심을 씹어먹을 엄격한 규율이 필요한데 럼주 훔쳐먹은 놈 채찍 몇 대, 고기 훔쳐먹은 놈 채찍 몇 대 이런 식이었다. 오죽 혹독했으면 채찍을 맞다가 죽는 선원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식사가 배급될 때 자기가 음식 좀 더 먹으려고 동료 선원을 밀치거나 몸싸움을 벌여 다치게 한 경우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었을 정도로 통제가 매우 엄격했다.
아메리카나 인도 등지에서 교역품을 싣고 돌아올 경우, 단 몇 그램도 큰 돈이 되었다. 한번 항해에 성공할 경우 선장은 물론 그 아래 말단 선원들까지 큰 돈을 한 번에 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선원이 모이고 배가 계속 출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21][22] 그 반대급부로 출발 전에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교역품을 실었으며, 심지어 이로 인해 멀쩡한 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몰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23] 따라서 선원들에게 배급해야 할 물자마저 최소한으로 줄여서 항해했다. 이 때문에 비스킷이나 염장고기, 썩은 물 역시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무역선들은 중간에 함부로 정선하거나 상륙할 수도 없었는데, 해안 근처에는 해적선, 사략선들이 눈에 불을 켜고 무역선을 찾아다녔으며[24] 자국의 항구가 아닌 곳에 정박하였을 경우 항구에서 물자는 제공해주었지만[25] 그 대가로 모든 교역품을 항구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 인해 무역선들은 섬도 안 보이는 먼 바다를 측량에만 의지하여 빙 돌아서 항해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선원들이 죽어나간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항해의 악조건 때문에 현대 해군은 항해 도중에 멀미와 구토 등에 시달려서 정박 시보다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는 함정요원들을 위해 간단한 야식을 포함한 1일 4식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이다. 자세한 내용은 전투식량 항목 참조.
6. 의의[편집]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구대륙과 신대륙의 본격적인 최초의 교역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시대에 유럽과 신대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민족, 종교에 있어서 역사적인 대변혁을 맞는데 특히 이후 유럽 제국주의의 시발점이 되는 시대라는 점에서 대항해시대의 역사적인 의의는 매우 중대하다. 사실상 신항로, 신대륙 개척을 통한 막대한 금의 유입과 경제 발전이 없었더라면 이후의 빅토리아 시대, 벨 에포크와 같은 유럽의 전성기는 늦어지거나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론 당시 세계의 국제 무역로는 오스만 제국-인도-중국을 잇는 거대한 연결선이 주축이었고, 여기에 유럽이 새롭게 참여했을 뿐이며, 유럽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무역 규모도 컸던 곳은 기존에 있었던 국제 무역로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대항해시대 이전에도 이탈리아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지중해 무역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무역로 중 하나였으며[26] 굳이 세계의 문명 교류사에 있어서 지중해 무역을 무시하고 동방 무역만을 부각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역사를 정치적 수정주의 혹은 옥시덴탈리즘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또한 유럽의 신대륙 발견이 세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는 것은 많은, 아니 모든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일단 유럽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인해 구대륙에는 감자와 옥수수 등의 새로운 작물이 보급되었고 이는 구대륙의 식생활과 인구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신항로의 발견으로 인해 유럽은 중국 및 인도와 직접 교역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유럽은 아메리카의 광대한 토지를 바탕으로 대량의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었고 이는 유럽의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감자, 옥수수, 토마토, 카카오, 담배, 고무 등 신대륙의 작물과 원료는 세계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에서도 신대륙산 작물인 고추에 의해 그야말로 식문화의 대격변을 겪으며 영혼의 조미료인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탄생했다. 이탈리아인의 영혼의 채소인 토마토 역시 신대륙산 작물이다. 감자, 옥수수의 영향력은 그냥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다
현대산업문명의 필수품 중 하나인 고무 역시 남미에서 발견된 것이며, 현대 인류문명과 문화를 선도하는 초강대국 미국도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탄생했다.
6.1. 서구중심주의의 산물인가?[편집]
대항해시대가 가진 세계사적 의의는 백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며, 대항해시대의 의의를 다룬다고 해서 그게 곧 서구우월주의인 것은 아니다. 대항해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본격화된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심리에 비롯되는 현상으로, 특히 유럽의 신대륙 정복과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 정복으로 말미암아 현지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기에 실제로도 이런 어두운 면을 비판하는 취지의 논문들도 존재한다. 비슷하게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의 남태평양 항해나 명나라 정화의 항해 등이 유럽의 대항해시대 못지않게 대단한 일이었음에도 서구중심주의 때문에 유럽만 부각된다는 주장은 대개 비슷한 차원에서 전개된다.
하지만 이들은 국지적인 탐험에 머무르거나 단발적인 이벤트로 끝나면서 국제 경제나 외교, 문화적으로 세계사에 의미있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중국의 경우, 시장 확장을 통한 이윤 추구 동기가 강했던 유럽과 달리 이미 중원의 인구와 생산력만으로도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지속적인 개척 동기가 약했고, 따라서 정화의 항해 같은 본격적인 탐험은 단발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폴리네시아인의 경우 시대한계상 원시적 도구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개척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나마도 태평양 일대의 섬들에 정착하면서 더 이상의 탐험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반면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국가적 지원을 바탕으로 단발적인 사건에서 멈추지 않고 몇 세기간 지속되어 신대륙 발견을 통해 유의미한 인류의 세계관(worldview) 확장과 본격적인 대양무역을 활성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의의를 갖는다. 비슷한 차원에서 로마 제국의 헤론이나 송나라가 증기기관을 운용한다던지 석탄을 활용했다던지 하는 기록이 있어 산업혁명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근대 산업혁명의 모태가 되었다는 주장은 그다지 지지받지 못한다.
대항해시대를 폄하하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가 주로 거론되는데 프랑크의 관점은 매우 극단적인 반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으로 비판받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책 중에서 국제 학계의 정설에 가까운 중립적인 책들을 꼽자면 데이비드 랜즈의 '국가의 부와 빈곤'이나 조엘 모키르의 '성장의 문화', 김승욱의 '제도의 힘'이 있다. 교양서적 중에는 해양사의 확장 관점에서 바라본 주경철의 '대항해시대'도 있다.
7. 연표[편집]
일본의 역사학자 마스다 요시오(増田 義郎)[27]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끝을 포르투갈의 세우타 공략(1415년)부터 세묜 데즈뇨프의 베링 해협 최초 항해(1648년)까지로 규정했다. 반면 비투스 베링, 제임스 쿡을 대항해시대의 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오스만의 대두 이래 지중해의 항해자와 선원들, 조선기술자, 해도제작자 등이 상당수 실업자가 되어서 대서양 항해에 나서고 있던 이베리아 국가로 몰려 왔다. 다만 주요 이탈리아 국가들은 여전히 무역으로 적지 않은 부를 계속 쌓았는데, 지중해 국가들의 무역은 포르투갈의 인도양 정리와 아메리카를 통한 막대한 귀금속 유입으로 인해 가격 혁명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우수한 항해술, 천문학 자질을 갖춘 엘리트들이었고 실제 항해 경험도 상당했기 때문에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여 인구가 적은 이베리아 국가에게 항해에 나설 만한 충분한 인력, 기술을 확보시켜 주었고 아울러 항해인력 및 수준의 전체적인 질적 향상까지 가져다 주었다.
이 시대 초기 세계 최강국은 명나라였으나 해금령 때문에 바다에서 서양세계에 계속 뒤쳐지게 된다. 만약 해금정책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폐쇄적인 중국이 아니라 좀 더 개방되고 부유한 중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