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 5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해설하여 드리겠습니다.
범어 아바로기테· 슈바라의 아바로기테는
‘본다’는 뜻이고,
슈바라는 ‘자유, 자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본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말로는 그저 ‘본다’라는 말뿐이지만
한자로는 ‘본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
견, 관, 시, 찰見觀視察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견은 주로 육안으로 보는 것,
관은 심안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네 육안으로는 보는데가 한계가 잇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력이어도 담장 밖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담장 밖이라도 볼 수가 있습니다.
〈박암록〉에 첫 머리에서
원오 선사는 수시를 통해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산 너머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면
곧 거기에 불이 난 줄 알고,
담 너머로 뿔이 보이면 곧 그게 소인 줄 알며,
하나를 들으면 셋을 알고,
사물의 무게를 눈짐작으로 아는 따위는
선승에게는 밥먹는 일처럼 쉬운 일이다.
[隔山見煙, 早知是火, 隔牆見角, 便知是牛,
擧一明三, 目機銖兩, 是衲僧家, 日常茶飯]”
산 너머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육안이지만
그 연기를 보고 불이난 줄 아는 것은 마음의 눈입니다.
담장 너머로 삐죽이 보이는 뿔은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뿔 밑에 소가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육안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하나를 보는 것은 육안으로 가능하지만
거기서 파생된 둘 셋을 아는 것은 심안이라야 가능하고
저울질 하지 않고도 사물의 무게를 알아차리는 것은 심안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관’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걸림이 있어서는 마음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짐승도 이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산, 마음의 담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라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 아상, 인생상, 중생상, 수자상을 사상산(四相山)이라고 하고,
이 사상산을 넘지 못하면 도를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눈을 가리는 담벼락이요,
마음의 산입니다.
그러나 관자재보살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장애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자재로 마음의 눈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아바로키데슈바라 즉 ‘관자재’ 보살입니다.
관자재보살 다음에 나오는 ‘행’은 실천을 뜻합니다.
용수보살은 〈지도론〉에서
“지목智目과 행족行足으로 청량지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지목이란 지혜의 눈,
바로 앞서 말한 마음의 눈이요,
행족이란 실천,
청량지淸凉池란 일체의 번뇌를 초월한 구경지,
곧 우리 불자들이 이루고자 하는 행복한 삶을 뜻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혜는 쓸모가 없습니다.
따라서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혜는
참다운 지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십대명호 가운데
명행족明行足도
부처님은 지혜와 실천이 하나같이
완전한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음 ‘심深’은 ‘깊다’는 뜻입니다.
그럼 무엇이 깊다는 것일까요?
지혜가 깊다는 뜻입니다.
얕은 지혜로는 생사해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얕은 지혜로는 고해를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지혜라야 되기 때문에
‘심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입니다.
다음 ‘반야바라밀다’는
이미 지난번에 설명한 것처럼 반야는 지혜요,
바라밀다는 ‘저 언덕으로 건나간다’는 뜻이므로
‘지혜로 저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저 언덕’이란 공간적인 어떤 장소가 아니라
괴로움이 있는 현실을 이 언덕이라고 할 때의 상대개념으로
괴로움이 없는 곳,
열반 해탈의 경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반야는 보통 지혜가 아니라
중생 누구나가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는 선천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따라서 배우거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로는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이 있지요?
어설픈 지식은
오히려 근심 걱정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주리반타카는
바보소리를 들을 만큼 참으로 미련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비와 걸레로 쓸고 닦는 가운데
마침내 마음의 때를 말끔히 쓸고 닦음으로서
찬란한 선천적인 지혜를 개발해내서 아라한이 되었는데
이런 지혜가 반야요,
이런 지혜라야만 바라밀다를 이룰 수 있으므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여기까지는
관자재보살님께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 가운데
그 출발점이 되는 서론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은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괴로움을 벗어나 저 언덕에 이르게 되는 과정입니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 보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느니라.’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계속 올려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따끈따끈한 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이 오늘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오늘은 오늘 글을 만나신 인연으로
글 보신 이후로는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2022년 12월 04일 오전 06:45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雲月野人 진각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