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천재를 기르다(2)
그중에서도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해 북학의 필요성을 역설한 북학파의 기수는 초정 박제가였다. 이제 정조는 박제가로 하여금 자주 연경을 내왕하면서 북학을 도입해 들이게 하니, 박제가는 연경학계의 태두인 기윤(紀?, 1724~1805), 옹방강(翁方綱, 1733~1799), 손성연(孫星衍, 1753~?), 나빙(羅聘, 1733~1799), 이병수(伊秉綬, 1754~1815), 철보(鐵保, 1752~1824), 장문도(張問陶, 1764~1814), 완원(阮元, 1764~1849) 등과 사귀며 이들을 통해 청조고증학을 본격적으로 전수해 온다.
그러니 이미 연암문하에 종유하며 북학에 경도돼 있던 추사의 큰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인 김노영이 추사의 교육을 박제가에게 맡기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추사와 박제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추사는 애기때부터 학예에 대한 남다른 포부와 웅지를 가지게 되는 듯하니 벌써 7세 때 그의 입춘첩(立春帖) 써 붙인 것을 당시 좌의정이던 번암(樊岩)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지나다 보고 장차 명필이 될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초정 박제가 초상, 청나라에서 사귄 벗 나빙의 그림, 큰아버지 김노영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선생의 스승으로 추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침)
그러나 하늘은 일세의 사조를 뒤바꿔놓을 큰 인물을 만들어 가는 데 주어서는 않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정조가 외척세력을 일단 꺾어놓고 나서 내척세력을 정리하려는 계획으로 도위가(都尉家) 자손들의 작은 잘못도 추호를 용서치 않으려 한다.
이에 추사가 8세 되던 해(1793) 개성유수(開城留守)로 가 있던 큰아버지 노영은 간부살록(奸夫殺獄)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로 파직되면서 그 서정(庶政) 일반이 철저히 조사되어 공화(公貨)를 함부로 빌려주었다는 죄로 원지정배(遠地定配)를 당하게 된다. 이때 전유수(前留守)로 있던 이시수(李時秀)와 이가환(李家煥)도 함께 삭출(削黜)되거나 삭직(削職)되는 것을 보면 노영만이 저지른 실수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 원지정배(遠地定配)의 일이 추사가 9세 되던 해 1월 9일에 일어나는데 뒤미쳐 2월20일에는 이미 4년전에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유민안집(流民安集)을 잘못한 죄에 의해 곡산부(谷山府) 금고충군(禁錮充軍)까지 당했던 둘째아버지 노성이 41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대상(大喪)이 겨우 끝난 11세 때에는 할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가 가운이 기우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8월8일에 68세를 일기로 떠나고 다음해(1797) 7월 4일에는 조모의 소상(小喪)을 치르기도 전에 뜻밖에 월성위궁(月城尉宮)의 소주인인 큰아버지 노영이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그러더니 곧 셋째아버지가 남겨놓은 아들로 불쌍하게 자란 사촌형 관희(觀喜)가 역시 4세 밖에 안된 상일(商一)을 남겨 놓고 25세의 젊은 나이로 10월 2일 요절한다. 이렇게 되니 조부 이주(?柱)도 그 참혹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12월 26일에 곧 뒤따라 돌아가서 두어달 간격으로 월성위궁의 남자들은 추사 4부자와 둘째아버지 댁, 사촌형 교희(敎喜, 1781~1843) 그리고 조카 상일(商一)만을 남겨 놓은채 모두 돌아간 결과가 됐다. 4년전부터 끊이지 않던 곡성이 이제는 일과가 되다시피 했을 터이니 그 참담한 분위기는 짐작하고도 남을 만 하다.
이런 와중에 추사는 큰아버지 노영에게양자로 들어가 정식으로 월성위궁의 새 주인이 된다. 아마 할아버지의 뜻이었을 것이며 큰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의 바램이기도 했을 것이다. 비록 신동 소리를 듣는 처지였으나 아직 열두살 밖에 안된 소년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오히려 무딘 소년이었더라면 차라리 모르고 지났을 터이나 감수성이 지나치게 예민했기에 더욱 인생과 죽음, 사랑과 허무 등을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추사는 예술적 감성을 사변적 이성으로 자제할 수 있는 엄청난 극기수련을 거친 것 같다. 그래서 후일 그의 예술론은 항상 냉철한 이성 위에 전개됐으며 그의 예술작품에는 감성과 이성이 혼연일치되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혹독한 시련을 학예수련과 내면적 사유로 겨우 극복하고 나자 월성위궁 종손(宗孫)이라는 막중한 위치 때문에 결혼을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추사의 소년기는 매우 단축되는데 14세의 연말에야 조부의 대상이 끝났으므로 결혼은 아마 15세 되는 해 봄에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사촌형 교희(敎喜)의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 1780~1821)의 당질녀(堂姪女, 5촌조카딸)를 신부로 맞아들이는데 추사와 동갑나기였다. 이해 도위가(都尉家) 세력을 견제하려던 정조가 갑자기 돌아가고 12촌 증대고모(曾大姑母)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월성위궁은 거연히 활기를 뒤찾게 된다.(계속)
첫댓글 이른아침 감사히 머물렀습니다...
지향님, 제일먼저 들르셨군요. 무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길....
추사의 유년시절... 잘 읽었습니다
네 정교수님, 감사합니다.
박제가..그가 등장하니 그분의 뛰어난 문장력이 돋보이는 묘향산 기행문이 떠오릅니다. 당대의 풍류객들의 여행은 유별나기도 하더군요. 이유야 어쨋든 그분의 묘향산 기행은 감성적이고 뛰어난 표현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중 한 구절만 올려봅니다. ----------------------------------------------------외로운 등불 고요할 제 범패 소리 울린다.돌 시내는 좔좔, 나무숲은 더북더북 달빛은 누각에 가득 찼는데 누각은 말없이 섰구나! 이때 나는 외로이 앉아 홀로 생각하노라. 온갖 새들은 제각기 나무에 의지해 깃들어 자거늘 날리는 서릿발이 둥지를 엄습하니 그 깃이 응당 차리로다! 새들도 오히려 심란하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추사 선생의 스승으로 아마 아버님이 박제가의 중국과의 교류를 알고 스승으로 삼았나 봅니다. 추사선생이 중국의 옹방강, 섭지선, 오숭량 등에게 미리 추사를 각인시칸듯 합니다.
제가 가지고있는 문중의 추사 할아버지의 역사부분을 비교 검토하는 좋은 시간이 되고있읍니다.고맙고 감사 드립니다.좋은 연구를 하시는 무림선생님께 찬사와 갈채를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계속 공부하겠읍니다.
상정님 좋은 자료가 있으면 함께 소개해 주셔요.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었다고 하면 실례일까요? 책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닙니다 가헌 선생의 글은 주를 달지 않고 옛날 이야기처럼 엮어가는 맛이 더 재미있지요. 정독해 주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