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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 성화의 독특성: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四季 朴埰同 (2020.12.06.22:5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예수께서 그를 보시며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1~22)
고넬료가 주목해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돼 기억하신 바가 됐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행 10:4~6)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하)
중생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들이지만 죄와 허물로 죽은 속된’ 자들을 깨끗하게 하셔서 살리시는 사역이다. 그리고 ‘깨끗(거룩)’하게 태어난 중생자는 ‘그리스도의 의(공효)’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한 발걸음을 내딛는 회심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의지해 하나님께 돌이킨 이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중생자로 의로 여기시며 중생자를 “의롭다.”고 칭해 주신다.
인터넷 {합동신학원} {사이버신학연구소} {개설강좌} {송인규 구원론} [제17강: 칭의, 성화] 동영상을 보면, 송인규 교수님께서는 ‘성화’를 설명하시면서 이 동영상 20분부터 25분 30초까지 ‘20세기 개혁신학 거목 존 머레이 목사님 위대한 업적’인 ‘Definitive sanctification, 확정(결정, 단회, 근본) 성화’에 대해 설명하신다. “Definitive 성화가 한국에는 거의 소개가 안 돼 있어요.” 하시며 “제가 조직신학 책을 쓰면, 성화에 대해 혹시 쓴다면 Definitive sanctification 존 머레이 견해에 대해 좀 더 알기 쉽게 여러 가지 설명을 하겠어요.” 말씀하신다. 또한 “이것(Definitive sanctification)은 Reformed(칼빈 신학, 개혁 신학) 다른 교리와 굉장히 잘 들어맞습니다. 특별히 이것은 신비 연합, 칭의, 객관 칭의, 이러한 Reformed 독특한 교리와 아주 연계성을 가져요.” 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실천적이다.”고 정리하신다. 또한 “안타깝게도 벌코프는 존 머레이 이전 사람이기도 하고 해서 Definitive sanctification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아요. (그의 {조직신학}) 여기서···. 존 머레이가 이제 언급했고, 후크마도 존 머레이 다음에 언급했고, 후크마도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하신다.
존 머레이 목사님이 확립하신 확정 성화 교리에 굉장히 감동하신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께서는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168쪽에서 ‘거룩한 불신자: 하나님의 거룩한 씨로 중생했으나 회심하지 않은 불신자’ 개념을 가진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 가정假定 중생론’을 ‘확정 성화’를 뜻하는 성령의 검劍, 요한 사도 구절들로 단칼에 베어 버리신다.
중생이 회개와 믿음으로 연결되기 전에 여러 해 동안 중생이 한 사람 속에서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바 있다. ···(중략)··· 그러나 이 가능성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요한의 구절들에 의해 받아들일 수 없다.
다음은 ‘존 머레이 {조직신학 제2권}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 297쪽에서 옮긴다.
중생은 확정 성화에서 극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확정 성화를 ‘중생’이라는 주제에만 포함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확정 성화에서 매우 특징적인 것, 그리스도 죽으심과 연합함에 따른 죄에 대한 죽음, 또한 그리스도 부활과 연합함에 따른 새 생명은 성령에 의한 중생으로 적절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로서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에게 복음을 듣기 전 예수 그리스도 “화평의 복음”을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다.(행 10:36~37) 그러나 에티오피아 내시(행 8:26~39)와 똑같이 {구약 성경}의 복음서 [이사야]서,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어린 양’이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했다.(행 11:14) 즉, 영생을 위해 수많은 선행(이웃을 향한 사랑)을 베풀었음(막 10:17~19 참고)에도,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은 구원(중생, 영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고넬료 집안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창세 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로서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언제 깨끗하게 하셨을까?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실 때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던 그들’(엡 2:1~4)을 하나님께서 정말로 깨끗하게 하셨다. 육사陸史에서 실제 일어난 객관의 구속 사실로서 이미인 이 확정 성화 시 연합을 나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원리(근본) 연합: 그리스도와 우리의 실제 연합을 가져오는 근본(원리)이 되는 연합”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원리 연합을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구원의 복음을 들을 때(⇨외소) 성령께서 그들 마음을 여셔서(행 16;14 참고) 그들에게 적용하심으로써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내소: 중생) 나는 이를 “그리스도와 우리의 실제 연합”이라고 말한다. ㅡ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실 때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났다는 것(확정 성화)이 바울 사도 증거임(롬 6:6~7)에도, 적절히 표현할 말이 없다.ㅡ 또한 창세 전 연합을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원 연합”이라고 말한다.
영원 연합의 당연한 귀결로서 원리 연합을 생각할 때 ㅡ“현대판 여호와의 증인”이라 말할 수 있는ㅡ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비(경건)한 마음으로 행한 흠 많은 선행과 기도’를 하나님께서 흠향(행 10:4)하신 까닭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생을 구하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에서 “선생님이여, 이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 대답했던 부자 청년, ‘흠 많은 구도자’를 주님께서 사랑(막 10:21)하신 까닭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 삭개오를 만나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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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 가져온
확정(결정, 단번, 단회, 근본) 성화의 독특성:
그리스도 ‘단번의 죽으심’과 ‘단번의 부활’ 시에
‘정말로’ 죄와 함께 죽고 의와 함께 살아난 우리
四季 朴埰同 (2020.12:03.22:1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6~9)
하나님께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났음이라.(요일 3:9)
무릇 하나님께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나님께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 나신 분이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다음은 ‘존 머레이 {구속} 장호준 역 (서울: 복 있는 사람, 2011)’ 209쪽에서 옮긴다. 아래에 옮기는 여러 인용문 안 배경색은 강조하려고 내가 칠한다.
유효한 부르심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마서 6장 14절과 요한일서 3장 9절, 5장 4절, 18절이 말하는 승리를 가졌다. …(중략)…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와 관련해, 죄의 권세에 대한 이런 승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가는 것도 아니다.
다음은 ‘존 머레이 {구속}’ 210쪽에서 옮긴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고, 거듭남을 통해 죄의 부패로부터 건짐을 받았다고 해서 신자의 마음과 삶에 남아있는 모든 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존 머레이 {조직신학 제2권}’ 304쪽에서 옮긴다.
사도 바울은 단번의 역사적 사건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가장 명백한 진술들과 신자에게서 죄에 대한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죽음에 관한 가르침을 끊임없이 교차해 말한다. 죄와 결정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단절, 새 생명으로 옮기심에 대한 바울의 논증들은 예수님 죽음의 단회성單回性과 결부돼 있다.
“그분께서 죽으심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심이요.”
다음은 ‘존 머레이 {성경과 기독교 윤리} 김남식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0)’ 248쪽에서 옮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회의 역사 사건이다. …(중략)… 그리스도께서 죽고 소생하셨을 때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존 머레이 {로마서 주석} 아바서원 번역팀 역 (서울: 도서출판 아바서원, 2014)’ <로마서 6장 6절 주석>에 담긴 글로서 이 책 304쪽에서 옮긴다.
바울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했다. 그 시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같이 단번에 이뤄진 완성된 행위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 가운데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신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욱이 이미 언급한 대로 바울은 이 문맥에서 죄와 결정적 결별을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존 머레이 {성경과 기독교 윤리}’ 247쪽~252쪽에서 옮긴다.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진 일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신자들에게만 실재하는 죄에 대한 죽음과 의 안에서 사는 생명이다.
…(중략)…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죽고 소생하셨을 때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자들은 참으로 갈보리와 삼 일만의 부활이라는 단회 사건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신자는 신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은 아니다. 또 이 죽음과 부활이 그들을 사실상 신자로 만든 것이 아니란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를 효과 있는 은혜의 작동 전에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고 또 인식해야만 하는 다른 측면들이 있다.
…(중략)…
바울이 특히 강조하고 있는 바는 사람이 복음의 유효한 소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죄와 죄의 세력과 단번으로 결정적 단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의 인생사에서 발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고 다시 사셨을 때 발생한 일과 비슷하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 번 죽고 오직 한 번 다시 살아나셨다.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실현의 영역에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다. 이 경우 죽고 소생하는 것은 주님 경우와 한가지로 결정적이고 최후적인 것이다. 이 사실을 모호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음은 ‘존 머레이 {조직신학 제2권}’ 305쪽~306쪽에서 옮긴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동일시돼 죽으셨다. 그리고 바로 오직 그 까닭 때문에 그분은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죽으신 것은 바로 그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죄에 대해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죄의 권능을 멸하셨으며 죄에 대해 심판을 집행하셨으며 의와 생명의 주로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영역을 설정해 놓으셨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께서 승리하고 심판을 집행하셨을 때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또한 하나님의 구상, 지혜, 계산, 은혜의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기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은 것으로 인식돼야 한다. 기본과 중심은 바로 이 사실이다. 그것의 기이성奇異性은 하나님의 계산 속에서 그 실재성, 그리스도와 그분 백성과 연합 안에서 하나님에 의한 실제적 작정 속에서 그 실재성을 손상하거나 약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나셨을 때 우리가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화된 것은 오직 과거의 완료된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 덕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본이고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삶의 시초에 일어나는 죄와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정적이고 확정적이라는 사실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취소하거나 반복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바로 그 까닭 때문에, 우리는 모든 신자가 죄에 대해 죽었고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살 수 없다는 교리에 관해 어떤 양보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죄는 더 이상 신자를 주관하지 못한다. 여기서 모호한 태도를 갖는 것은 그리스도 죽으심의 확정성을 공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자에게서 새 생명으로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진입은 그리스도 부활이 결정적이고 확정적이라는 사실에 따라 요구된다. 부활의 취소나 반복을 용인할 수 없듯이 우리는 모든 신자가 새사람이며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죄의 몸은 멸해졌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 새사람으로서 그들은 성령의 거소와 성전이 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리에는 어떠한 양보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나눔 감사합니다. 책이 없거나 읽지 못한 분들에게는 더욱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시초에 일어나는 죄와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정적이고 확정적이라는 사실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멘!
아멘!
잘 읽고 공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