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파주 명학산(鳴鶴山)을 향하여 경의 중앙선 홍대역에서 3월 27일(일) 09시 40여분에 위짜추 조단스 서류바 또파파 씨모우 까토나 여섯이 승차하였습니다. 오늘 산행지는 파주에 있는 명학산(177m) 무지개산(175m) 미사일봉(175m) 봉서산(213m) 연계 산행을 하렵니다. 파주역에서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와 법원리 방향으로 가는 600번 버스를 탑니다. 민방위 교육장 앞에서 하차하여 연풍 초교를 오른 쪽에 끼고 직진합니다. 윤곤 선생 묘소가 나타나며 바로 명학산 등산 안내 표지판이 보입니다. 계속 오솔길을 따라서 오르노라면 좌우 전후 모두가 소나무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피톤치드(phytoncide) 향기를 폐포 깊숙이 마음껏 들여 마십니다. 걷노라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스치는 산객이 한명도 없이 오로지 우리들만의 오롯한 산행입니다.
200여 미터 전후 높이의 나즈막한 산행을 하면서 친구들도 너무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떠듭니다. 언제나 이런 산행이었으면 좋겠노라고 말입니다.
가는 곳 마다 민방위 대원들이 훈련을 받는 여러가지 훈련 기구가 곳곳에 설치 되어 있습니다. 인공 암벽타기 외봉 다리 건너기 외줄타기 철봉 한손으로 건너잡기등 여러가지 체력과 담력을 키우는 유격 훈련장입니다. 물병대 출신인 위짜추도 땅군 출신 조단스와 체력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왕년에 날고 기고 이 정도 쯤은 누워서 쏘주 마시기라며 큰소리 치는 녀석도 나이 앞에선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잠깐 매달리면서 스냅 한컷 찍었지만 팔다리 관절에는 뚜두득 하는 소리와 뻐근한 통증만이 체력을 증명해 줍니다. 날씨도 청명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등허리에 땀샘을 자극하여 흥건한 느낌입니다. 명학산 정상이래야 동네 뒷산 정도의 높이지만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산세가 제법 큰 편입니다. 정상 팻말을 옆에 두고 각자 가져온 간식으로 잠시 두 다리를 쭉 뻗어 기(氣)를 충전합니다. 군데 군데 여러 곳에는 전쟁 잔해로 보이는 벙커를 비롯하여 연발 기관총신이 바알갛게 녹이 쓸어 있습니다. 북(北)으로 향하고 있는 총구에서는 지금도 사수 조수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몰려 오는 적들을 향하여 불을 뿜을 것 같은 착각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 때 이 자리에서 총구에 불을 뿜어 주던 그 병사는 지금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적의 흉탄에 맞아 그리던 부모 형제 처자식을 그리다가 쓸쓸히 숨을 거두었는지 모릅니다. 조국을 끝까지 못 지켰다는 죄책감으로 병사들의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고고(孤高)한 학(鶴)의 울음 소리로 변하여 명학(鳴鶴)산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외로운 영령(英靈)은 아직도 이 곳을 떠나지 못하고 산허리를 헤매고 있지나 않은지 답답한 마음일 뿐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꽃다운 청춘을 불사르며 산화하신 장병들의 명복을 잠시나마 빌어 봅니다. 아직도 병사들의 통곡 소리와 학의 서글픈 울음 소리가 이 노객(老客)의 귓전을 흔들고 있는듯 합니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걸음은 무지개산으로 향합니다. 무지개산 전망대에 오르니 문산읍과 임진강이 한 눈에 들어 오며 북한 땅도 희미하게 시야에 잡힙니다. 임진강만 건너서 몇십리만 가면 바로 어릴 때 내가 살던 고향 산천 황해도 봉산군입니다. 북에 계신 내 할머니는 하얀 치마 저고리를 입으시고 환한 웃음을 머금고 앞 뜰에 나와 계십니다. " 손주 녀석아!, 이놈아, 어서 오너라, 이 핼미가 맛 있는 거 해줄테니 나랑 함께 살자꾸나, 어서 어서 오려무나, 이 핼미가 보고 싶지도 않으냐, " 버얼겋게 충혈된 할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목 놓아 부르는 소리는 바람에 비켜 가지만 안타깝게 손짓하는 모습만은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손자 녀석은 이미 칠십을 훌쩍 넘긴 나이로 할아버지가 된지도 오래입니다. 헤여질 그 때 당신 손자는 일곱살이었으며 할머니는 회갑을 막 지나신 연세였으니 할머니 연세가 지금 몇이신지 생각키도 서글픈 현실입니다. " 할머니 !, 정말 보고 싶어요,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 나의 아버지이자 당신의 금쪽 같은 아들은 명절 때 마다 북쪽으로 차례상을 차려 놓고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고 죄송하다고, 할머니 ! 그런데 당신의 아들 며느리이며 나의 어버이는 저 세상으로 떠난지도 사십 여년이 넘었습니다, 할머니! 통일이 되는 그 날 당신의 손주 증손주 고손주 모두 데리고 당신께 큰 절을 올릴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 그날까지 오래 오래 사셔야 돼요, 백세 아니 이백세 까지 사셔야 됩니다." 허공을 향하여 읊조리는 나의 가슴은 허탈한 마음 뿐입니다. 언제나 그 날이 오려는지, 내 살아 생존에 그 꿈이 이루워지기나 하려는지, 그리고 할머니가 잠들고 계시는 곳에 가서 술이라도 한 잔 따라 드릴 수 있으려는지 그저 먹먹할 따름입니다. 내 할머니의 처절한 모습이 홀로 울고 있는 학의 날개짓으로 다가 옵니다. 산 정상 주위 바위 여러 곳에는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글귀들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허상일랑은 접어 두고 조금은 경사가 있는 비탈길로 내려 갑니다. 미사일봉을 밟으려고 했으나 벗들의 하산(下山) 희망 사항을 받아 들이고 다음으로 미뤄봅니다. 명학산 캠핑장 입구를 거쳐서 향양2리 버스 승강장에 다달았지요. 문산 터미널행 버스에 몸을 맡기고 보니 아들이 군의관으로 몸 담았던 부대 앞을 지납니다.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추억은 새록 새록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 군에 입대한 신병들은 주어진 환경에 쉽사리 적응을 못 할거야. 어쩌면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너는 군인이기 이전에 의사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의사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몸이 불편한 신병들에겐 큰 위안이 될 것이야, 병사와 장교가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간적으로 대해 주어라," 신병 교육대 군의관으로 복무할 당시에 아들에게 조언을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요. 애비 말을 얼마나 염두에 두고 실천을 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물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니면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버스가 문산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우리들은 서둘러 하차를 합니다. 터미널 근처에서 문산역 방향으로 조금 내려 가서 회식 장소로 접어 듭니다. 언제나 첫 세잔까지는 거푸 건배가를 목청껏 부르지요. 그래야 무거워진 팔다리 어깨 허리 모든 관절과 근육을 이완시킵니다. 부족한 알콜의 농도는 전철을 타고 공덕역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근처에서 생맥과 후레쉬로 흡족하게 마무리 합니다. 우리들의 권주가에 주위 손님들이 박수로 공감을 표시합니다. 항상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배낭을 메고 일어섭니다. 갈곳은 오로지 한 곳입니다. 항상 꿈을 꾸고 사랑을 품을 수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바로 삶의 보금 자리인 집으로 마무리를 하지요.
하지만 오늘처럼 허탈한 마음은 어찌해야 합니까. 무엇으로 달래며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2016년 3월 29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