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록
김동규 (명예교수, 생활과학대학 체육학부)
(1) 사서 하는 고생
석사학위 논문을 학점취득으로 대체하는 규정이 있음에도 애써 논문작성에 도전하는 대학원생들이 있어 때로는 ‘사서 하는 고생’을 택했구나 하는 애틋한 마음이 든다. 은퇴 후 텃밭 가꾸기에 재미를 붙인 동료들도 제법 있다. 한 여름 무더위에도 밭에 나가 채소재배에 여념이 없다. 천지에 널린 게 채소인데 ‘사서 하는 고생’이 신기하다.
백설이 뒤덮인 험준한 산을 힘겹게 올라가는 이들을 보면 왜 저런 위험한 등반을 하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이 또한 ‘사서 하는 고생’을 스스로 택한 것임에 틀림없다. 간혹 골목이나 산지에서 쓰레기를 줍는 노인을 본다. 운동 삼아 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긴 하나 그들에게는 당연하고 의미 있는 봉사로서의 ‘사서 하는 고생’이다. 명예나 금전과 무관하게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이나, 전시에 관심 없이 그림 그리기에 심취되어 있는 아내도 그냥 즐기는 ‘사서 하는 고생’이다.
이렇듯 ‘사서 하는 고생’, 즉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은 행위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맛과 멋을 지니고 있다. 외재적 가치에 뜻이 치우치면 보람과 환희는 요원해진다.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외에서 목숨 걸고 구국을 위해 분전한 애국지사들의 열망이 각자의 이익에 연연했다면 그들의 ‘사서 하는 고생’이 가능키나 했겠는가?
인간이 의식주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이 자명한 이상 부질없을 듯한 발상이나 행위가 신세계를 꿈꾸게 하고, 수단적 가치에서 내재적 가치로의 변환은 삶의 터전을 기름지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2021년 3월 2일)
(2) 유배지가 된 광역시
일평생 대구에 살아온 노객이 언젠가부터 유배지에 귀양 와서 사는 꼴이 되었다. 공직자의 중앙 진출은 영전榮轉이고 지방 전근轉勤은 유배流配라고들 법석이니 소도시는 물론 광역시 시민들조차 유배살이를 하는 셈이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할 것 없이 수도권 집중화 현상은 선진국의 행로에 걸림돌이 된다고들 입을 모으면서도 여전히 지방地方은 촌뜨기들이 모여 사는 시골이자 공복公僕들이 좌천左遷되어 떠밀려오는 변방邊方 취급이다.
문제는 유배라는 표현이 한순간의 실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주요 국사國事는 중앙관료들의 전유물이라는 오만과 편견이 지방거주민들로서는 무망無望하고 모욕적이다. 공무수행자와 공공매체 출연진들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해설이나 토론 시 어휘선택에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거짓이 난무하고 말 돌리기, 네 탓 타령이 관행인 세태에 무분별한 용어구사는 백성을 향한 결례缺禮이자 행패다.
지방민들도 정당한 권리쟁취에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 유배지라는 망언에도 무감각함은 지방의 왜소함과 천시賤視를 용인하는 처사로 비춰질 수 있다. 평소 지방을 향한 거드름과 무례無禮가 어찌 이뿐이랴! 중앙부처의 위정자들은 지역별 계급구조가 국가적 공권의 붕괴로 가는 길임을 직시하고, 지방민 또한 기성질서와의 대결을 통해 입지가 확보됨을 통감해야 지방도 살고 나라도 바로 선다. (2022년 6월 4일)
(3) 패티김의 기품 있는 이별
본명이 김혜자인 패티김은 1959년, 요즘 같으면 비교적 늦은 22세에 데뷔한 대중가수다. 2012년에 은퇴를 했으니 가수경력이 54년이나 되는 셈이다. 페티김은 당시 트로트 일색이었던 가요계에 처음 스탠더드 팝 스타일 음악을 소개하고, 한국 최초로 ‘리사이틀recital’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1978년 대중가수로는 처음인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필두로 1989년 뉴욕 카네기 홀, 2000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누빈 최초의 보컬리스트였다.
패티김은 여타 대중가수들과는 다른 삶이었다. 우선 그녀는 75세에 은퇴를 하면서도 군살 없는 몸매와 젊은이 못지않은 맵시를 유지하였다. 흉한 모습으로 사라져 감은 팬들에 대한 무례라고 여겨 허리 살은 물론 턱밑의 군살도 그녀에게는 흠이었다. 비만관리를 전투기질로 대응했다는 고백은 놀랍기만 하다.
패티김은 흔해 빠진 TV 여담프로에도 출연한 적이 없다. 콧대가 세다는 비난이 있었음에도 자존감으로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지켰다. 더욱 돋보이는 건 고매하면서도 냉정한 은퇴였다. 열창하는 모습이 보고픈 범인凡人들의 아쉬움이 컸지만, 그녀는 공수신퇴功遂身退의 결단을 내렸다.
“은퇴 번복의사가 없느냐?”
“NO! 절대 없다”
노을빛의 아름다운 자태가 그녀의 꿈이자 멋으로 다가온다. (2019년 5월 28일)
(4) 올림피즘의 사상적 맥락
기원전 776년부터 1,200여 년간 쉼 없이 개최되었던 고대올림피아 제전경기는 ‘평화증진’ ‘문화교류’ ‘아마추어리즘의 고수’라고 하는 사상적 맥락이 근간이었다. 1,500여 년이 지난 1896년 올림픽을 부활한 쿠베르탱도 국가 간의 이해와 세계평화라는 청사진을 기반으로 ‘올림픽은 승리보다 참가’라는 이상에 의의를 두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올림픽은 이념논쟁의 장이 되어 ‘개최무산’ ‘테러’ ‘반쪽대회’라고 하는 변고變故투성이였다. 20세기 중반부터는 국가주의에 편승한 과열경쟁이 심화되어 경기력의 고도화에 따른 일탈양상도 속출하였다. 약물복용, 인종차별, 환경훼손 등이 그러한 경우들이다.
이와 함께 올림픽의 개최에 의한 재정손실은 올림픽 개최 회피현상을 초래하기도 하였다.1972 뮌헨, 1976 몬트리올, 1980 모스크바올림픽 등이 적자를 면치 못한 대표적인 대회였다. 이의 만회를 위해 혜성과 같이 등장한 두 인물이 있었으니 사라만치와 위버로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스포츠마케팅 전략을 도입해 1984년의 LA올림픽이 반쪽 대회였음에도 200만 달러의 흑자대회로 전환시켰다. 흥행성공에 의해 올림픽의 재도약 기회가 무성할 즈음 난데없는 코로나19가 2020도쿄올림픽을 폐허상태로 몰았다. 올림픽은 팬데믹pandemic까지 염려해야 하는 판이 되었다.
피상적으로 보면 올림픽의 본질이 화려한 외관인 듯하나, 상업화에 의한 찬란함과 흥행은 부수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올림픽은 어떠한 경우에도 ‘스포츠제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올림피즘의 근본사상을 지켜나갈 때 세계인의 대축제로 맥락을 이어 갈 수 있다(2021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