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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高 句 麗 ) 2 |
ㅇ 11대 동천왕 : 227년~248년(산상왕의 아들)
․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
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음.
․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ㅇ 12대 중천왕 : 248년~270년(동천왕의 맏아들)
․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ㅇ 13대 서천왕 : 270년~292년(중천왕의 둘째 아들)
․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ㅇ 14대 봉상왕 : 292년~300년(서천왕의 태자)
․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ㅇ 15대 미천왕 : 300년~331년(서천왕의 손자)
․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함.
․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ㅇ 16대 고국원왕 : 331년~337년(이름은 사유다 국강상왕이라고도 함)
․ 314년 태자로 책봉됨.
․ 331년 아버지 미천왕이 죽자 왕위에 오름.
․ 즉위하자 평양성을 증축 국내성을 쌓고 342년 환도성으로 옳긴 뒤 수차례 중국 연나라의 칩입을 받음.
그리고 선비족 모용괴가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와 미천왕의 묘를 파고 아버지의 시신과 왕비를 납치함.
․ 343년 동생을 연나라에 파견 미천왕의 시신과 왕비를 찾아옴.
․ 369년 백제의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쳤지만 패하고
․ 371년 평양성에서 싸우다 죽음
ㅇ 17대 소수림왕 : 337년~384년(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
․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 371년 10월에 부왕 고국원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
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
․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
ㅇ 18대 고국양왕 : 384년~391년(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
라고도 함)
․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
다.
․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
(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
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을
․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북으로는 후
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ㅇ 19대 광개토대왕 : 391년~413년(고국양왕의 아들)
․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는데,
․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
용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전하는 바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ㅇ 20대 장수왕 : 413년~491년[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
․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
․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
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 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
립하였다.
․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
의 풍홍 소환 요청을 거절한다든지,
․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
었고,
․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
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
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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