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 묘역을 찾아서
시인 이종남
맺힌 삶의 매듭이 풀려지지 않을 때, 삶의 지향을 어딘가에 비끄러 맬 완곡한 집념으로부터 멀어질 때 시간이 나는 대로 어디랄 것도 없이 훌쩍 길을 떠나곤 한다.
고통의 심줄이 불끈 불끈 솟는 겨울 들판을 달리노라면 서러움을 노래로 다스려 줄 자연의 가락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팔당호 상류인 원당리 강변을 지나 정지리 고개를 넘어 양평 방면으로 들어섰다. 구비구비 나를 끌고 들어가는 염티 고개의 골짝은 그리 길지 않은 거리인데도 이대로 들어가서 영 되돌아 나오지 않아도 좋을 선계라도 있을 듯 매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무언가를 반쯤은 덜어 낸 듯한 해방감으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잠시, 고개 마루를 넘어서 내리받이 길로 접어들자 불현듯 정처 없음에서 오는 불안감이 마음을 흔들어 댔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신흠 묘역 입구 근처에 다다르자 문득 오늘은 그곳을 올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시조 공부를 하는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해서 외우던 100여 편의 시조 중 신흠 선생의 시조 몇 수가 기억에 떠올랐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푸돗던가 /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영화스럽게 살다 간 그의 생애에도 서민의 삶처럼 풀어야 할 매듭들이 많았던 것일까?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는 구절이 내가 한 말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차는 광주와 양평의 경계인 퇴촌면 영동리 마을 끝 부분까지 내리 치달았다. 4,5년 전 동백문학 임원들을 안내했던 기억을 따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 했던 것과는 달리 입구에 있던 신도비가 보이질 않았다.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된 유적지라 가두에 안내 표지판 하나쯤 서 있을 법 한데 근처 어디에도 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다. 인가가 드물어 딱히 물어 볼 곳도 없고 근처 식당이라야 필경 외지에서 들어 왔을 터, 지리를 잘 알 리 만무해서 기억이 희미해진 무참함 그대로 골짜구니 마을인 구룡동으로 들어갔다. 10여 년 전만 해도 듬성 듬성 누추한 가옥들이 시골 전형의 산골마을을 그려내고 있었는데 언제 들어섰는지 호화 주택들이 마치 별천지라도 되듯 아늑한 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 원주민인 듯 한 초로의 부부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알기 쉽게 길을 일러주었다. 역사와 전혀 무관할 수도 없겠으나 그것과 참 무심히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 뭐 땜에 자꾸 거길 찾는댜? 접때도 누가 길을 묻길래 거기까지 데려다 줬는데 사진을 찍고 난리더라구. 해 놓긴 잘 해놨어. 임금님 사위 아버지라나 뭐라나"......
변변한 농토가 많지 않은 산골의 가난으로부터 고봉 쌀밥의 풍요를 건너 이젠 서울 근교 어느 구석에서든 누릴 수 있는 금이빨 같은 부유를 누리는 이 낯선 시골 풍경을 돌아 나오며 자꾸 서운해지는 건 왜일까?
마을을 빠져 나와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구룡동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그제서야 몇 년 전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머리에 떠올랐다.
오른쪽 얕으마한 산비탈에 거북 모양의 머리를 이고 있는 신도비 옆으로 한 시대를 당당히 살고 간 신흠의 이력들이 안내 표지판에 씌여져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본관이 평산이고 자가 경숙, 호가 현헌, 상촌, 현옹, 방옹, 시호가 문정 인 신흠은 개성 도사 승서 인 아버지와 좌 참판 송인수의 딸 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 소인수와 이제민에게 학문을 배웠다는데 그의 생애는 탄생부터가 순탄했던 것 같다. 1585년 진사·생원시에 합격하는 것을 기점으로 1592년 임진왜란 시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 전투에 참가, 1593년 이조 좌랑·이듬해 이조 정랑·사복시 첨정으로 승진된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이 선조의 딸인 정숙 옹주의 부마로 간택되면서 그의 출세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곧 바로 동부 승지에 올라 그 후 형조 참의·이조 참의·병조 참의·대사간을 역임하고 1601년 춘추 제씨전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라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지내다 1604년 자헌대부에 오르면서 한성 판윤이된다. 1613년 계축사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에 춘천으로 유배되는데 그의 생애 중 유독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고 같은 해 우의정을 지내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해서 전주로 피란하다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생을 마친다. 양반이 누릴 수 있는 벼슬들을 실로 총 망라해서 두루 섭렵한 조선시대의 문장가이자 능력자이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 외교문서의 제작은 물론,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 제작에 참여 해 정주 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 장유, 이식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져 1651년 춘천의 도포 서원에 제향 되기까지 그의 업적은 실로 방대하다. 저서로는《상촌집》《야언》《현헌선생화도시》《낙민주기》《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황하집령》등이 있고 상촌집에 실려있는 30여 편의 그의 시조는 아직도 16C에서 17C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16C 인식론적 질서가 와해되고 새로운 인식론적 질서를 요구하는 17C적 면모들을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고, 따라서 언어적, 미적 특질을 충분히 갖춘 그의 시조가 여전히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점과 2004, 11월의 인물로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그의 업적 앞에서 그저 한 낱 문장의 꼬리에나 매달려 시름이나 풀어보려는 내가 주눅이 드는 것 또한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바람에 채이는 감각들이 전신으로 아팠다.
그러나 삶이란 나름대로 얼마나 고유한 것이든가. 묘역으로 오르는 황토길에 제 멋대로 돋아난 들풀들이 조촐한 세월을 끌어안고 봄을 꿈꾸듯 나름대로 살픗했다. 가뜩이나 삭막한 겨울인데다 능선 전체가 벌목이 되어 송두리 채 제 골격을 드러낸 비탈엔 잘려진 우듬지에서 겨우 새순을 틔운 잎들이 그나마 겨울을 이고 가느라 털끝 만한 바람에도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퍼스럭 퍼스럭 마른 소리를 허공으로 띄워 올리고 있었다. 재토끼 한 마리가 굴참나무 잎 사이에서 열매라도 찾는지 인기척에 흠칫흠칫 놀래다 나의 출현을 알고는 고개 마루로 줄행랑을 친다. 입구에 서 있는 신도비로부터 1㎞가량 오른쪽으로 가파른 민둥산을 올라가 묘역에 다다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주역과 그의 부인을 끌어안은 봉분이 사성(莎城)에 둘러싸여 비석 서넛을 거느린 채 정상에 앉아 있다. 탁 트인 전망을 자리 잡고 그가 살다간 배경만큼이나 훤칠한 묘역이 백성을 지휘하듯 당당한 모습으로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삶의 영욕들이 한 참 세월을 건너 이렇듯 무덤덤한 흔적으로 남다니.....
겨울 바람이 야릇한 비애를 서늘히 훑고 지나갔다.
묘역을 향해 목례를 하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옛날 그가 근심했음직한 서민들의 삶이 시공을 건너 여전히 고만고만한 근심을 안고 영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대의 모순을 비껴가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서 사람의 마음에 신금으로 남는 이 역사의 인물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올라 그의 사람의 크기를 짐작해 본다.
혓가래 기나 자르나 기둥이 기우나 트나 / 수간 모옥이 적은 줄 웃지 마라 / 어즈버 만산 나월이 다 내것인가 하노라.
장부의 품이 느껴지는 필세에서 그의 영화가 거저 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상 삶의 질곡을 넘어 마음만 먹을 수 있다면 만산 나월이 다 내것이질 않은가.
어떤 연고로 이곳에 안치되었는지 문헌에 기록된 것 외에 다른 배경들을 듣고 싶어 옆 마을에 산다는 후손 신씨 일가를 찾았으나 외출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서야 했다. *
참회의 계절인 이 겨울에 참회 따위랄 것도 없이 살아온 날들이, 사람을 등지는 사람의 그 캄캄한 절벽과 적막이 갈잎처럼 쓸쓸한 회한으로 남는데 삶의 함량을 어디에서 끌어와야 할지? 그러나 살아있음의 시름조차도 눈물겹고, 웃으며 살아야 할 촌음까지도 아까워라. 돌고 돌아 나 또한 언젠가는 한 줌 흙으로 남으리니, 눈비, 바람, 이슬이 되리니.......
곶 지고 속닢 나니 시절도 변하거다
풀 속에 푸른 버레 나뷔 되야 나다는다
뉘라서 조화(造化)를 잡아 천변 만화(千變萬化)하는고
<신흠>
- 끝 -
* 2003년 광주문화원 연간지 청탁 원고
*오래된 글이어서 오래지않은 회원님들 보시라고 옴김을 작가님께 양해 바랍니다.(한기수)
첫댓글 아! 멋진 기행답사기입니다~ 나중에 다시 제대로 읽겠습니다~ 감사^^
아~~ 이것이 은제적 글인지요~~
참 부드럽게 매끈하게 이어지는 역사의 길을 따라 한참을 돌아 다녀봅니다
역시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발짝 또 내딛습니다
이게 언제적 글인데, 한 10여년은 되었을 걸요. 어디서 퍼 오셨나요? 회장님 으이구 민망해라. 문화원에서 청탁해서 숙제로 썼던 건데... 감사합니다.
겨울철 맑은 한 낮같은 정갈한 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글 참 잘 쓰십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시조 백수 암송하던 실력을 누가 따라 갈까나~ 정말로 맛있고 감칠맛나게 차린글,
~, 눈 운동 많이 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