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 역사를 품다 16>
조선의 한류스타, 추사를 만나다
김덕남
세상의 혼란은 어느때나 잦아들까. 광장의 광기와 저 산의 화염은 누가 있어 달래려나. 의성에서 안동으로 산청에서 지리산으로 마그마가 솟구치듯 불기둥이 날아간다. 땅에도 하늘에도 하소연하지 못해 차마 TV를 켤 수 없다. 한 방울의 비가 감질나게 스쳐 간다. 손바닥에 비를 모아 언제 저 불을 끌거나. 금단의 사과를 훔친 죄가 부메랑되어 돌아오는데 정녕 신은 죽어버렸나. 지구의 다큐라면 좋겠다. 조마조마 콩닥콩닥 심장이 벌렁거린다. 산짐승 들짐승, 인간의 보금자리를 순식간에 빼앗은 날벼락이 머리 위 떨어져도 손 하나 꼼짝할 수 없다. 죽음과 맞서며 헬기와 진화대원이 불 속으로 뛰어들어도 물 한 줌 나를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린다.
타는 숲을 넘어 불같은 광기로 살아가는 사람들, 반대를 위한 반대로 광장이 시끄럽다. 자연재해에다 인간재해까지 세상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러한 현실이 슬프다. 그러나 슬픔의 힘으로도 살아내야 한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그 말을 믿고 오늘도 하루를 걷는다.
혼란은 200여 년 전에도 있었다. 세상의 쓰임을 당하기도 하고 버림을 받기도 한 절망 끝에서 예술의 꽃을 피운 한류스타를 찾아 200여 년 전 시간 속으로 달려간다. 렌터카로 서귀포시 대정읍의 현무암 성벽길을 따라 추사관에 닿았다. 밖으로 드러난 것은 1층 규모의 창고 같은 건물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딱따구리 구멍 같은 창 하나만 벽면에 뚫려 있다. 입구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지그재그로 내려가는 계단은 무엇을 상징할까. 유배길의 고단함일까. 지하층에 모든 전시실이 있고 천고를 높인 중앙홀에는 하늘의 마음으로 단순 소박하고 고졸한 맛을 풍긴다고 세평을 받는 ‘板殿판전’ 액자가 걸려있다. 그 위 바깥으로 난 동그란 창에서 빛이 들어온다. 세한도 속 바로 그 창이다.
추사(1786~1856)는 충청도 예산에서 왕실 사돈 후손인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무렵 한양 교동 월성위궁(월성위는 영조의 사위인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에게 내려진 작위)의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때 연경을 네 차례나 다녀오며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는 추사의 입춘첩을 보고 ‘이 아이를 가르치고 싶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북학(실학)에 눈을 뜨게 된다. 일곱 살 때는 대문에 써 붙인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보고 채제공이 예언했다. ‘글씨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고달파지겠다.’라고.
통로의 추사 연표를 읽으며 제1전시실에 들어섰다. 유배 가면서 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써 준 살이 찌고 기름기 가득한 '无量壽閣무량수각'과 7년 후 유배 중 쓴 온갖 풍상을 겪어 뼈대만 남아있는 듯한 화암사의 '无量壽閣무량수각' 현판 글을 번갈아 바라본다. 유리벽 속에 여러 형태의 글이 전시되어 있다. 뜻을 새기기는 어려우나 추사의 혼을 느낀다. 붓대를 따라 흘러내리며 점과 획과 삐침이 살아 꿈틀거린다. 자유분방함과 울림, 기존 가치 질서를 뒤엎어 괴이하다는 세평을 듣는 작품들을 한눈에 담는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멋이 글씨에 배어 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1807~1877)는 추사체의 성립론에서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었으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유홍준 『추사 김정희』 p346)라고 했다.
제2전시실의 세한도 앞에 섰다. 유리 전시실 안에 긴 두루마리를 통으로 펼쳐놓았다. 차갑고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다. 간결한 구성이다. 묵의 농담만으로 마른 붓질한 고목의 등껍질, 듬성듬성한 솔잎이 추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린다. 단 하나의 선으로 지붕과 벽면만을 나타낸 저 집에 앉아 붓을 들고 있을 추사가 눈에 어린다. 적막한 여백은 말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영인본이라지만 고고한 송백松柏의 정신이 송곳처럼 파고든다.
세한도(69.2×23cm)에는 왼쪽으로 청나라 문인 학자 16명의 감상평, 오른쪽으로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이자 추사 연구의 일인자 격인 오세창, 당시 부통령이던 이시영, 광복 후 4대 국경절 노래 가사를 쓴 정인보의 감상평이 추가되어 한눈에 볼 수 있다. 총길이 14m라고 한다.
멀찍이서 더 잘 보이는 원경의 필법인가/
움켜쥔 붓끝으로 일필휘지 문장인가/
키 낮은 울타리 너머 새순 같은 집 한 채
태산도 무너질 듯 묵음으로 다독이며/
위리안치 운신 속에 오히려 더 자유로웠을/
무한한 저 순정의 먹빛 뜨겁고도 그윽하다
- 이서원 「추사적거지」 전문
제주에서 8년 3개월 귀양살이를 할 당시 제자 이상적(1804~1865)은 청나라를 열두 차례 드나들 때마다 귀한 책, 새로운 자료 등을 구해 유배지로 전해주었다. 그 고마움으로 세한도를 그려준다.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날이 찬 후에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발문과 변하지 않은 우정에 감사하며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長無相忘장무상망의 붉은 인장을 찍은 세한도를 받고 이상적은 감격한다. 허름한 집 동그란 구멍(창)을 보고 이상적은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창은 조선에는 없고 청나라에만 있었다. 30년 만에 청나라로 다시 가려던 스승의 꿈이 하루아침에 왕창 무너졌으니.
이상적은 스승을 모시듯 세한도를 모시고 연경(북경)으로 갔다. 평소 교류하던 문인들의 연회 자리에서 세한도를 펼쳤다. 그 자리에 모인 문인 16명 모두가 격찬을 아끼지 않으며 다투어 감상평을 써 주었다. 추사는 조선에서보다 청나라에서 더 유명해지는 월드스타가 되었다. 그 시절은 중국이 세계라고 믿었을 테니까.
세한도가 국보 제180호로 우리에게 올 때까지는 그 운명이 기구하다.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 김준학 부자가 물려받았다가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 민규식 부자를 거쳐 경성구락부에 경매로 나오게 되었다. 그때 추사를 흠모하고 연구하던 경성제국대학 후지쓰카(1879~1948) 교수가 구입하여 194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진도의 서예가이자 서화 수집가였던 소전 손재형(1902~1981)이 그 사실을 알고 대한해협을 건너 태평양전쟁 한복판이던 동경의 후지쓰카를 찾아갔다. 백지수표를 내놓으며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여관에 묵으며 매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그리고는 세한도에 대해 간절함을 표시하니 감복하여 “나보다 더 추사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 맞다.”라며 대금을 받지 않고 그냥 내놓았다고 한다. 1945년 3월 학장으로 재직하던 대동문화학원이 대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그곳에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은 잿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다행히 집에 소장하고 있던 작품은 남아있어 2006년 그의 아들이 과천문화원에 기증하였다. 그 후 소전은 국회의원 정치자금을 위해 세한도를 담보물로 맡겼다. 돈을 갚지 못하던 중 개성 출신의 고미술 수집가 손세기(1903~1983)의 손에 들어갔다. 그 아들 손창근(1929~2024)이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추사관 바로 뒤, 추사가 귀양살이한 탱자 울타리로 둘러쳐진 초가로 들어섰다. 집 안팎에는 노란 잔과 하얀 옥 받침을 한 모양이라 금잔옥대라 불리는 수선화꽃이 한창이다. 뭍에선 잘 볼 수 없었던 꽃이다. 추사는 청나라에서 구해온 수선화를 고려자기 화분에 심어 다산 선생에게 선물했다. 그만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수선화였다. 그런데 제주에선 온 산과 들, 밭에 지천이라 원수 보듯 뽑아 버리는 광경을 보고 수선화의 신세가 자신의 신세와 같아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한다고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로 한탄했다.
나의 나르시시즘은 낡은 수식일 뿐이다
언 땅에 등이 타는 그 강을 건너려면
허접의 옷을 벗어라 흰 뼈대로 홀로 서라
긴 겨울을 건너게 발이 시린 이 저녁
의로운 길에 서서 되돌아보지 마시게
나는 나, 나를 떠나네 은유의 배를 타네
- 박옥위 「수선화 별사」 전문
방안에는 추사와 초의선사의 모형이 다담茶談을 나누고 있다. 아릿한 작설차 향이 먹물향과 함께 내 코에 닿는 것 같다.
유배 온 지 3년 되던 해에 아내 예안 이씨가 죽었다. 많은 편지를 주고받던 초의선사(1786~1866)가 위로차 바다를 건너왔다. 온갖 회포를 풀며 벗하던 6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초의는 소매를 끌어당기는 추사를 뒤로하고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다. 그 후 초의에게서 편지가 왔다. 말을 타고 가다 넓적다리 살갗이 벗겨졌다고 했다. 추사는 답신에서 ‘가지마라 했는데 기어코 가더니…. 상처에 사슴 가죽을 문지르면 낫는다. 사슴 가죽이나 중의 가죽이나 비슷하니 효험이 있을’거라며 초의를 은근하게 놀린다. 동갑내기인 그들은 막역한 사이였나보다. 또 한번은 ‘매번 편지를 써도 답이 없으니, 나와는 절교하려느냐? 보고 싶지도 않고 편지를 받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차는 꼭 보내라, 작년에 보내지 않은 것까지 합쳐서 보내지 않으면 염라대왕에게 부탁하여 몽둥이질하라고 할 거다.’고 엄포를 놓는다. 장난기와 애정이 철철 넘친다.(유홍준 『추사 김정희』를 읽고 재구성)
추사가 지금도 여기 앉아 있다면 마당을 쓸고 방을 닦고 차를 달이고 조용히 꿇어앉아 먹을 갈아 올리고 싶다. 추사의 명성을 듣고 학문과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찾아오더니 제자 수가 3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배우고자 하는 제주의 유생들에게는 하늘 같은 기회가 아닌가.
시누대 마당비를 독필처럼 움켜쥐면
손가락 깨물어 쓸 필생의 결구 하나
세한의 저 소나무가 신열처럼 뜨겁다
군말을 뽑아내고 수사도 쓸어내어
백지로 드러나는 저작의 흙마당에
몽당비 돌부리 밀듯 턱턱 차는 숨소리
억새풀 서걱대는 비백 같은 울타리 밖
갈필의 바람소리 온몸에 필사할 즈음
마당가 붉은 동백꽃 낙관처럼 찍힌다
- 이토록 「마당을 쓸다 - 추사 적거지에서」 전문
추사관에서 2Km 정도 떨어진 단산 아래에 있는 대정향교로 차를 몰았다. 이 향교 안에는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세한도 속 소나무는 이 향교의 명륜당 위에 있는 소나무가 모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 훈장이 추사에게 기숙사에 걸 현판의 글씨를 부탁하였다. 항상 의문을 품으며 공부하라는 뜻의 ‘疑問堂의문당’이라는 글을 써 주어 동재에 걸었는데, 진품은 추사관에서 만날 수 있다.
대정향교에서부터 추사 유배길이 시작된다. 바퀴가 도로를 벗어나자 어느덧 산방산 기슭의 숲길에 닿았다. 여기서부터 천천히 걸으며 추사의 삶을 되새겼다.
추사는 24세 때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간 청의 문물에 크게 눈을 뜨고 청의 문인들과 편지로 교류하였다. 사대부들은 오랑캐라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때, 청의 실사구시 정신을 배워 나라를 개혁하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대리청정하고 있던 효명세자(1809~1830)는 추사 등 실학파에 의지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물리치려 했으나 22세에 의문의 요절을 하고 만다.
1840년, 승승장구하던 추사는 55세에 연경에 갈 동지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출발 전 윤상도 옥사에 얽혀들었다. 과거 급제 동기이자 절친인 우의정 조인영의 구명으로 목숨만 부지하여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혀에 난 종기와 콧속에 난 혹, 온몸에는 피부병이 번지고 눈에는 안화眼花가 피어 앞이 어른거리고 기침으로 나날을 보낸다고 아우와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코 푸는 일이라고 했으니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그 와중에 글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청나라에서의 요청이 더 많았다고 한다. 헌종의 요청도 있었다. 요청으로 쓰고 할 일이 없어서 쓰고 속을 풀 길 없어서 쓰고 또 썼으니 눈과 어깨가 성했을까.
1848년(헌종 14년) 유배 9년째 되던 해 드디어 해배의 명이 떨어졌다. 63세다. 올라가는 길은 내려올 때의 역순으로 길을 잡았다. 초의스님이 있는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유배 가면서 당대 최고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가 쓴 ‘大雄寶殿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고 자기가 쓴 것을 붙이라고 한 절이다.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 내 것을 떼고 그것을 다시 붙여주게”라고 했다. 또한 백파스님이 펴낸 『선문수경』을 보고 ‘백파망증 15조’(백파가 망령되게 증명한 15가지)를 조목조목 비판했던 자기 잘못을 백파를 만나 사죄하려 정읍장터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으나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약속 시간 내 닿지 못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백파가 있는 절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떠났으니 이제 오만으로 가득했던 지난날의 추사가 아니었다. 글이 하찮다고 조롱했던 전주에 사는 창암 이삼만을 찾아가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삼만의 묘비에 위대한 서예가라는 묘비 글을 써 주고 떠나갔다고 한다. 해배되어 가는 길은 이렇듯 속죄의 길이 되었다.(위 책에서 발췌 요약)
서울에 돌아오니 이미 집은 몰수되었고 친척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움막 같은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오로지 학문과 예술을 위해 남은 생을 살고 있었다. 이때 쓴 글씨들이 추사체의 절정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글씨를 보면 꼭 그림이 놀고 있는 것 같다. 글씨를 갖고 노는 노학자의 텅 비운 마음이 보인다. 천재성에다 노력의 결과가 추사체의 미학으로 남은 게 아닐까. ‘나는 평생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스스로 적지 않았던가.
여덟 살에 임금이 된 헌종이 스물셋에 갑자기 죽자 열아홉 살 강화도령이 임금 자리에 앉혀졌다. 추사 66세 되던 해(철종 2년) 왕실 제사 문제를 논의하던 중 영의정 권돈인이 주장을 폈던 예론이 뭇매를 맞았다. 권돈인은 낭천에 중도부처 되었다가 순흥으로 유배 가고, 배후에 추사가 있다고 안동김씨 일파는 또 임금을 윽박질러 북청으로 유배를 보냈다. 집안이 두 번이나 풍비박산 나는 순간이다. 너와집에서 1년을 넘기고 귀양이 풀렸다. 채제공이 예언했듯이 참으로 고달픈 인생이다. 예술가의 감성적 기질이 그런 결과를 낳았을까. 67세에 과천의 초당(참외밭의 초가)에서 은거한다. 과지초당에서도 추사는 붓을 놓지 않았다. 이 시절 아이 같은 단순함과 궁극의 멋으로 작품은 더 무르익어갔다. 추사의 유작은 봉은사 ‘板殿판전’이다. ‘七十一果病中作(71살 먹은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을 쓰고 붓을 던졌다. 죽기 3일 전이다. 아이로 돌아간 노년의 허허로움과 초연함이 글에 배어 있다. 해탈의 경지랄까. 인생의 관조를 느낀다. 추사와 동시대를 산 문인 유최진은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하다 할 것이요.(…)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위 책 p11)라고 추사를 평했다. 학문과 예술의 일치가 추사의 미학이 아닐까. 스타의 길은 이렇게도 험난한가. 드라마틱 그 자체다.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며 인생은 깊어지고 예술은 높아졌다.
김덕남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등
- 《시조21》2025.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