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요
제주 4۰3 사건은 1947. 3. 1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 4. 3 남로당 제주도장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 9. 21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전해졌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여 다 보자.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1945. 8. 15 광복이 되었다. 해방 이후 미۰소 군정 통치가 시작되었다(남한:미군, 북한:소련). 이때 미국편에 섰던 이승만 박사가 남한 만 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남한 만 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을 발언한다. UN 감독하에 3۰8 이남에서 국회위원 선거를 실시할 것을 밝히고, 1948. 5.10 남한에서 200개 선거구에서 투표가 진행된다. 이때 제주 투표소 3곳 중에서 2곳이 불에 타는 바람에 초대 국회의원 수는 198명이 된다.
8۰15해방을 맞이 했지만, 제주도는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 전국적으로 미군정이 자리를 잡으면서 미군이 제주에 들어 왔으나 전국에 친일파가 재등용되었다. 이때 82%가 친일파 경찰이었다고 한다.
1947. 3. 1 발포사건은, 경찰이 말을 타고 가는데 6살 정도 되는 아이가 튀어 나오다가 말발굽에 치었는데 그냥 가 버렸다. 이에 도민들은 돌을 던지며 쫓아 갔다. 경찰들이 보았을 때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오인하여 발포함으로써 6명의 사망자가 발생 했다. 사망자를 보니 아무런 죄도 없은 어린 여성, 15살 어린이, 젖먹이와 21살 엄마 등도 포함 되었다. 이에 분노한 도민들은 경찰서로 쳐들어가 책임자 처벌 요구를 하자, 경찰은 기관총으로 당장 발포할 태세를 갖추었다. 제주 기자들이 중재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 제주 도민들은(3월 10일)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하게 된다(기업, 자영업자, 학교, 경찰 등 41,211명, 166개 단체 95% 참여). 제주 도민들의 일치단결하여 뭉친 것이다. 정부에서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예견하고 지금 서울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조병옥(당시 미군정 경무국장)을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 조병옥의 도청 연설에서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쓰러 버릴 수도 있다.” 라고 했다. 이때 서북청년회도 제주에 들어오게 된다. 좌익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1년 동안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 등을 지속했다. 김달삼( 4۰3 무장대 사령관)은 300여 명을 무장시켜 1948.4.3 새벽 2시에 24개의 지서 중 12개 지서를 습격(경찰, 서북청년단 숙소 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되니 이승만 입장에서는 엄격하게 다스려야 되겠다는 복안이 섰을 것이다. 결국 무자비한 무력 진압이 시작되면서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 되었다.
강경 진압을 하라는 지시를 받은 당시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민간인들을 토벌해서는 안된다. 군인이 어떻게 자국민을 토벌하느냐? 평화적으로 타협을 하자며, 김달삼과 만나 평화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때 갑자기 제주에 내려온 조병옥이 엄벌해야 된다고 하면서 김익렬과 김달삼을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 결국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 시킴과 동시에 여수 14연대장으로 보냈다. 김익렬 연대장 후임으로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의 취임사에서의 말을 한 번 들여다 보자,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 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한 달 만에 500여 명을 검거하여 고문하는 등 무차별 진압과 사살을 했다. 그의 이러한 공로로 한 달 만에 대령으로 진급한다. 대령으로 진급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파티를 열어 음주를 하고 취해 곯아 떨어졌다. 이때 그의 부하였던 손석호 하사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폭동으로 진압하는 것을 수수 방관만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48. 6. 18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했다. 아마 손석호 하사의 당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제주 도민의 이름으로 처형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당시의 어수선한 시기에 도망을 갈 수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고 당당히 그 상황과 마주했다. 이 사살에는 최후진술을 보면, 문상길 중위도 함께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정부수립 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함께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정부수립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토벌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경찰서۰서북청년회۰군대는 삼진 작전을 펼친다(①좌익 세력 태워죽이고, ②굶겨 죽이고, ③죽여 없앤다). 이승만은 제주도를 빨갱이 천국으로 봤다. 후임 송요찬 연대장이 취임 후,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 위반자는 이유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 총살에 처한다.” 라고 했다. 여수 14연대에 제주토벌 명령을 내렸으나, 토벌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에서 출동 거부를 했다. 결국은 여수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많은 희생을 감래해야 만 했다. 결국 제주 4۰3 사건은 1948. 4. 3∼1954년 어간의 약 7년 동안에 걸쳐 진행된 진압사건에서 약 3만여 명(제주 도민의 1/10에 해당)이 학살 당했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승만은 1960. 4.19로 인하여 하야 하기에 이른다.
2. 4۰3 사건이 드러나게 된 배경과 진행 경과
1). 최초 4۰3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1978년 한기영 소설가가 “순이 삼촌”이란 책을 세상에 내 놓으면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기영씨는 용공 분자로 몰려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2). 그 후 20여 년이 지나(50여 년 동안 함구되어 옴)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 때 제주 4۰3 사건 진상규명자 특별법을 제정(2000.1.12.)하게 되었다.
3). 그리고 2003. 10. 31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가의 권력에 의해 희생된 분과 유가족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했다.
3. 이승만 대통령이 대중들에게 연설한 내용/ 담화문/ 국무회의 발언
1) 3만여 명의 대중이 광화문에 모였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만이 대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연설내용이다.
1. 저는 권력을 탐하지 않습니다.
2. 저는 집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3. 저는 오직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 담화문(48. 11. 17 제주지역에 계엄령 선포)
“남۰녀۰노۰소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 분자 다 제거하라” 이렇게 해야 미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고, 대한민국의 존엄을 과시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3) 국무회의 발언(1949. 1. 21)
“제주도۰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본 색원하여야 미국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4. 문상길 중위의 최후진술/ 처형 직전 유언
1) 최후진술
“군인으로서 직속 상관을 살해하고 살 길을 도모하지 않는다. 법관들은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벌하는 데에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이 법정에 원한을 갖지 않는다. 모두가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법정은 공평하다.”
2) 유언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마십시오”
5. 손석호 하사의 유언
“우리는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 하나의 생명의 30만 도민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당당히 처벌 받겠다.”
6. 문상길 중위와 손석호 하사의 유언을 보면서
생을 아직 꽃피우지 못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도민을 지켜려고 했던 애향심과 국민을 사랑하는 진솔한 마음은 그 무엇으로 보답하기가 어렵다. 자신들을 희생하며 국민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군인이있던 문상길 중위와 손석호 하사에게 천국에서의 평안을 기원드린다. 만약 새로운 탄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예수님의 가호와 제보살의 무한 광명이 깃들길 머리숙여 기원하는 바이다.
7. 맺는 말
제주 4۰3 추모 공원에는 아무런 글씨도 새기지 못한 백비가 누워있다. 그것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4.19, 12.12사태, 광주 5.18, 6월 민주 항쟁, 제주 4۰3 사건 등을 보면서 불행한 폭압의 역사가 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어져야 한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을 때 그런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국가에서 4۰3사건을 일체 거론할 수 없도록 함구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미군정이 시키는 데로 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담화문에서 “남۰녀۰노۰소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 분자 다 제거하라”는 내용은 당시 제주도민의 처지와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올 김용옥의 강연 중에서 이러한 적은 우리 내부에 있다는 말은 매우 심도있게 받아 들여야 할 대목이다. 국가의 주도하에 무수한 도민들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여러분들의 다 알고 있듯이 폴란드에 가 보신 분들은 총탄의 흔적이 건물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건물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나둔 상태에서 건물을 사용하기도 하고, 이어서 옆으로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폴란드 국민들이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서다. 특히 제주 4۰3의 경우 70여 년의 지난 현재까지도 뚜렷한 어떤 해결책이 이루어지지 않고 미흡한 점은 아쉽고 가슴아프기 그지 없다. 역사를 미워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반드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함께 기억해서 반면교사로 삼을 때 만이 재발을 방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역사는 진실을 근본으로 삼을 수 있어야 발전하고 미래로 향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함께 꼭 기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참고)
1. 동백 꽃은 제주 4۰3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유는 “기다림”을 뜻하기 때문이다.
2. 濟州島(섬도)에서 濟州道(길도)로 바뀌었다(1946. 8.1). 이로써 전라도에서 들어오는 물자가 끓김
3. 1946. 1.15 국방경비대 창설(미군정하에서: 미 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
4. 국가 권력의 학살에 숨겨진 사람 제임스 하우스만 이라는 미국의 대위가 권력의 실세였다.
5. 일본의 속국으로 보아 한국을 적국으로 간주했다.
6. 1945. 9. 8 미군정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경찰로 다시 채워짐, 결국 한 달후에 모든 체제가 일제 체제로 돌아간 것이 되었다.
7.서북청년회 : 평남, 함북 함남, 황해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된 단체(일종의 건달 들). 반공 우익단체
8. 토벌대들이 3살 먹은 어린애의 양 다리를 잡고 바위에 내리 쳤다.
※유튜브체널: 도올 김용옥의 제주 4۰3사건을 말하다/ 설민석 특강 : 제주 4۰3사건 70주년에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