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가 과잉되면 필연코 국수주의, 배타적 우월주의. 패권주의로 치닫게 돤다.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이나 독일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대외적 우월주의나 군국주의를 표방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모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끼리끼리의식, 민족주의는 다소 지나치거나 과격해도 괜찮다고 눈감아주는 풍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중국 사람들과 어울려 한담을 하다보면 곧잘 축구이야기가 화제에 오른다. 이때만큼 중국 사람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때도 없다. 한 마디로 한국인과 함께 하는 축구이야기는 밥맛 떨어지니까. 반대로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중국인들과 함께 앉아서 하는 축구이야기만큼 신나는 화제가 없다.
민족 우월감을 은근히 과시하며, 술안주 씹듯이 질근질근 씹어가며, 상대방 눈치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상대방 문전에서 축구공 드리볼 하듯이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를 반복한다. 중국인들과 사업을 하면서 그들의 사고방식과 협상 전술, 때로는 무책임한 모습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활하던 차에 터지는 축구이야기니 얼마나 밥맛, 술맛 땡기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치고 빠지는 축구이야기도 그 달콤한 시절이 점점 지나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중국 축구를 대하는 태도, 중국 축구팬들을 대하는 태도가 대국적이어야 한다는 공자님 같은 이유도 있지만, 중국 축구의 어제, 오늘을 보면서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축구이야기가 나왔으니 월드컵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다. 한*일 월드컵을 둘러싸고 한국은 4강 신화를 창조했지만, 그 이면에는 한중 간에 많은 파편들이 튀었고, 이 파편들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4강 진출을 놓고 당시 중국의 많은 매체들과 네티즌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한국 축구를 비난하고 4강 진출의 성과를 폄하하였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언론과 네티즌들이 동원된 맞비난과 야유의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된 연유에는 먼저 중국측의 중화주의적 사고 방식이 뿌리 깊이 존재한다.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Pride of Asia"의 구호를 앞세워 카드 섹션을 벌였을 때, 그들이 얼마나 자존심 상해 했던가? 수천 년 간 아시아의 중심임을 자처하여 왔던 그들이.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언론과 네티즌들 또한 축구 4강에 걸맞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국측의 비난 하나하나에 일일이 맞대응하기만 했지, 역지사지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 네티즌은 인터넷에 중국을 “배아픈 이웃”으로 표현하였고, 어떤 일간지는 이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눈에 잘 띄는 스포츠 난에 소개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배아픈 이웃”의 모습은 사실이지 한국이 먼저 보였었다. 나는 한국의 첫 경기인 한국과 폴란드전이 열리던 날 대낮부터 붉은 악마들과 광화문에 있었다.
한국과 폴란드의 저녁 경기가 열리기 전에 일본과 벨기에의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었고, 나는 붉은 악마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벨기에가 먼저 한 골을 넣자 환호가 인다. 나는 당시 깜짝 놀랐다. 나는 당시 한국과 일본의 동시 16강 진출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신시대” 운운을 떠나서라도 이들 두 나라가 함께 16강에 진출하여야 향후 아시아에 배정되는 본선 진출 티켙이 반 장이라도 더 배정받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시간이 흐르고 일본의 동점골을 넣고 역전골을 넣자 주위는 온통 탄식일색이다.
그때 얼핏 스치는 생각에 옆에 있는 한 붉은 악마에게 묻기를, “한국과 폴란드전이 먼저 열려 한국이 이미 이긴 상황이었다면, 그때도 벨기에를 응원하겠는가?” “그렇다면 일본을 응원해야지요. 일본은 이겼는데, 우리가 폴란드한테 질지도 모르니 일단 일본은 벨기에한테 져야 해요” 였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은 벨기에를 응원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지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들은 수준높은 축구팬들답게 경우의 수까지 고려해가며 이미 복잡한(내가 느끼기에는) 계산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나는 그때 이 열광적이고 영리한 붉은 악마들의 분위기에 눌려 무거운 마음으로 조용히 일본을 응원하였다. 안타깝게도 벨기에가 다시 동점을 터뜨려 나의 탄식과 악마와도 같은 붉은 악마들의 환호가 동시에 교차되면서 경기는 끝났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이 폴란드를 이겼지만, 붉은 악마들의 복잡한 계산법, 이 계산에 따른 응원 방식은 한국과 포르투갈 전이 열리던 날까지도 이어졌다. 우승 후보인 포르투갈은 폴란드를 3:0으로 격파하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있었다. 한국이 포르투갈을 비기거나 이기고, 16강에 진출할 가능성은 솔직히 말해서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의 16강행이 확정된 꼴을 어떻게 보겠는가.
이때의 붉은 악마들의 모습은 일본이 8강에 실패하고 한국이 승승장구 4강에 올랐을 때 일본 언론과 울트라재팬이 한국 축구에 보내는 지지와 찬사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것이었다.
차라리, “일본은 과거 역사를 반성하지도 않고, 정치 지도자들이 수시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따위의 파렴치한 나라이니 벨기에 전이건, 러시아 전이건 _____ 전이건 간에 전 경기에서 참패를 당해야 한다.” 라고 했다면 몰라도. “배아픈 이웃”의 전형을 보였던 당시의 붉은 악마들이 중국의 언론과 축구팬들을 가리켜 일방적으로“배아픈 이웃”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었을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끼리의 분위기니까, 서로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일까.
4강 진출의 환희와 열광 속에서, 경우의 수를 따져가면서 일본이 지기를 바랬던 그 “초조함”과 “옹졸함”은 자연스럽게 파묻혀버렸다. 불과 며칠 전의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망각할 수 있었던 자랑스러운 붉은 악마들의 그때의 모습 속에서 굴절된 우리 역사의 편린이 남아있음을 보았던 나는 지금도 그 씁쓸한 뒷맛이 가셔지지를 않는다.
중국은 진정 배가 아팠기에 한국의 4강 진출을 시기하고 폄하했던가. 그럴 수도 있다. 신이 아닌 인간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심리이기에.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물론 나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어떻다느니, 고래로부터 중화와 동이의 관계가 어떠했었으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겠다는 것이다.
중국 축구팀이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을 때 중국 대륙은 흥분으로 들떴고, 13억은 열광했다. 인류의 2002년도는 중국을 위해 존재했다. 그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WTO 가입, 뻬이징 올림픽 개최권 획득에 이어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월드컵 본선 진출권까지 따낸 것이다.
떵샤오핑의 살아서의 소원이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대만의 통일, 또 하나는 기차를 타고 홍콩에 가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중국 축구팀의 월드컵 본선 경기를 보는 것이었다.
번번이 한국의 벽에 가로막혀 월드컵 본선의 문턱에서 좌절되었던 수십여 년간의 염원, 비록 한국과 일본의 자동 진출이라는 조건에 힘입은 것이기는 하나, 좌우지간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공한증도 이제는 없었다.
게다가 밀로셰비치 감독이 이끄는 축구팀 치고 본선 16강에 못 오른 적이 없었다. 중국인들의 꿈은 훨훨 날을대로 날아 한*일 월드컵으로 향했다. 그리고 중국팀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공식 비공식으로 사상 초유의 특이한 교섭까지 전개하였고, 이것이 수용되어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특이한 방식으로 조편성 추첨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그들의 한국행은 확정되었다.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위 15개국 중 가장 좋아하는 나라, 가장 우호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라, 지구촌에서 가장 예술적이고 휴머니스틱한 TV드라마를 제작하는 나라인 한국행을 13억의 중국인민은 원했다.
그들은 첫 경기에서 코스타리카에게 비록 2:0으로 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 축구의 벽은 높았지만, 그리고 두 번째 경기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일본도 선전하고 있었고, 한국도 폴란드에게 이겼다. 16강의 능선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도 불가능하지 않다. 일찍이 일본과의 경기에서 몇 차례 이겨도 보았으며, 한국을 이겨보지는 못했지만 근래 대등한 경기로 비긴 경우도 몇 번 있었고, 2000년 아시아 청소년대회에서는 이기지 않았는가. 중국은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나 그들은 브라질에게 4:0으로 참패했다. 두 경기의 결과는 2:0, 4:0 합쳐서 6:0. 유고의 명장 밀로셰비치의 16강 신화는 막을 내렸다. 중국팀은 고개를 떨구었고, 맹렬한 중국 치여우미(球迷 팬)들의 짜여우(加油, 기름을 쳐라) 소리와 펄럭이는오성홍기(五星紅旗)는 심장 작동을 멈추었다.
13억은 흐느꼈다. 이제 남은 경기는 터키전 하나. 그들은 꿈을 낮추었다. 16강 진출은 못해도 좋다. 터키 하나라도 이기자. 아니 못 이기더라도 좋다. 한 골 만이라도 넣자. 그러나 결과는 한국 붉은 악마들의 일방적인 터키 응원 속에서 3:0으로 끝났다. 그들의 한숨과 탄식은 분노로 변했으며 그 분노는 한국의 붉은 악마와 한국 언론, 그리고 한국의 모든 것으로 향했다.
한국의 서포터스들은 약자를 응원한다고 들었는데, 2골로도 모자라 세 번째 골을 넣을 때까지도 일방적으로 터키를 응원한단 말인가. 한국이 터키를 응원했던 이유를 알고난 그들은 더욱더 분노했다. 한국전쟁시 터키가 한국을 지원한 데 대한 보답으로 응원했다니, 5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터키를 우방으로 보았다면, 그렇다면 중국은 적인가? 적군의 이미지로 중국팀을 보았다는 것인가?*1)
한국의 연속극과 노래와 춤에 열광하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분노는 더했다. 우리의 서포터스들이 50년 전의 우방에게 50년 동안 잊었던 은혜를 기억하여 성숙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휴머니틱한 보답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될 *1)을 놓치고 있었다. 우리의 4강 진출이 확정된 이후 그들의 각종 폄하와 시비와 비난에 대하여 우리는 뒤늦게나마 역지사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기세가 오를대로 오른 민족적 자부심은 세계 최강의 인터넷을 과시하려는 듯 중국인들에 대한 온갖 역조롱으로 맞대응하였다.
세월은 또 흘러 2002년도는 지나갔고, 해는 바뀌었다. 중국인들은 축구의 승패에 관한 한 참으로 너그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축구열기는 한*중*일 3개 국가 중 최고이다. 그들의 프로축구 열기는 우리의 야구 열기의 전성기에 버금간다.
그 뜨거운 열기가 국가대표팀간의 경기에서 한국에 패하면 잠시 주춤한다. 그러다가 곧 다시 뜨거워진다. 국가대표팀이 선전하면 확 열기가 오르다가도 곧 다시 식어버리는 한국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본래 한족(韓族)은 축구와는 거리가 먼 나라이다.
중국 국내에서도 1980년대까지 무려 40년간 한족 대표팀은 조선족 대표팀을 이겨보지 축구를 못했다. 한족 인구를 10억으로 잡고 조선족 인구를 200만으로 친다면 500:1의 게임이다. 스포츠 강약을 인구 비례로 점칠 수야 없겠지만, 왜 유독 중국은 축구에 약했을까? 그것은 전통적으로 축구를 별로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짧은 체험으로 보자면 중국은 초등학교건 중학이건 고중(우리의 고등학교)이건 간에 축구를 할만한 운동장이 없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 운동장이 100m 달리기가 가능한 우리 초등학교 운동장의 1/4 정도 크기이다. 가뭄에 콩 나듯이 축구 경기를 할 수 있는 크기의 운동장을 갖춘 곳도 있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 눈으로 본 것은 쌍하이 옆의 우씨(無錫)시 근교의 농촌에 있는 학교 중 하나이다. 그나마 그 조그만 운동장들도 절반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학생들은 그곳에서 주로 농구를 즐긴다. 이래서야 인구가 13억이고 130억이고간에 축구를 잘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그 상징적인 두 개의 사건이 있다. 두 개의 사건의 주인공은 모두 70년대 한국 축구의 탁월한 링커(지금은 미들 필더라고 함)였던 이장수(李章洙)감독이다. 이장수감독은 2000년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 팀을 중국 프로리그에서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사건은 중국 축구 전체의 상향적 평준화를 의미한다.
한족들의 구기 종목에 관한한 산동(山東)성과 랴오닝(遼寧)성 이외의 지역은 모두 변방에 속한다. 축구고 농구고 배구이고 간에 구기 종목은 산뚱과 랴오닝의 독무대였다. 한족들 중에서도 이 두 개 성의 주민들은 다른 성에 비하여 체구가 크고 골격이 튼튼하다. 랴오닝 성 주민의 절반 이상은 산뚱에서 건너간 사람들이거나 그 2세, 3세들이다.
중국 축구, 농구, 배구 대표선수들의 출신 분포를 보면 70-80% 이상은 다 이곳 출신들이다. 이들이 중국 프로리그 출범 이래 우승은 산뚱과 랴오닝이 번갈아 차지했다. 상위 서열 5개도 찌난(齊南, 산뚱), 칭다오(靑島, 산뚱), 따롄(大蓮, 랴오닝), 썬양(沈陽, 랴오닝), 푸순(撫順, 랴오닝) 이들 5개 팀이 거의 다 차지하며 우승*준우승을 번갈아가며 차지한다.
그런데 충칭 팀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시기 쌍하이 팀을 비롯한 다른 팀들도 약진을 하였다. 중국 축구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면서 빠른 속도의 상향적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향적 평준화는 각 성과 시 당국의 대대적인 투자와 축구팬들의 성원과 맞물리면서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고 있다.
충칭팀의 반란에 자극받은 칭다오(山東)팀은 이장수감독을 스카우트하였고, 2001년 중국 프로리그를 우승하면서 자존심을 회복하였다. 이렇게 전통적인 산뚱*랴오닝 팀들과, 신흥 강팀들간의 경쟁은 중국 축구의 종주와 변방의 오랜 경계를 무너뜨리며 중국 전체를 축구 열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이루어졌으며, 한국의 냄비 열기가 가라앉은 지금에도 중국의 축구 열기는 계속 끓어오르고 있다. 그들의 당면 목표는 “한국 타도”이며, 나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헛된 구호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쯤에서 이렇게 생각해본다. 한*중*일은 여러 방면에서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상호 발전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야 하리라고 본다. 역사 왜곡을 둘러싼 갈등과 논쟁도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축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언젠가 축구가 피차 고수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서로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이 이기는 경우가 더 많아야 좋겠지만...
이렇게 될 때 미래의 축구는 민족의 자존심이라는 사활을 건 대리전쟁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이기고 지고를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면서,유럽이 유럽 통합을 향한 축제의 일부분으로 축구를 즐기듯이, 한*중*일 축구도 그렇게 변모해야 하지 않을까.
축구 4강에서 더 나아가 세계 문화 4강으로 가는 문턱을 넘으려면 축구를 바라보는 시각도 좀 더 넉넉해져야 한다.
온갖 경우의 수까지 계산해가며 응원팀을 고르는 그런 노력을 쏟고 영리함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한 번 즘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한*중*일이 축구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공존번영의 길을 추구하는 데 경주하자.
일본이 신군국주의로 나아가려 하고, 중국이 중화패권주의로 나아가려 한다 해서 우리까지 민족배외주의로 나가서야 되겠는가. 국방이나 역사 분야에서는 자주성을 굳게 지키되 문화는 좀더 개방적이고 너그러워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