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된 유혹
앞서, 영적인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적지가 분명하더라도,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지금 내가 있는 곳) 를 성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지금 나의 상태가 이렇다는 것, 이게 지금 내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입니다.
자기 모습이나 처한 상황에 대해 만족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 또 자주 반복하는 습관을 금세 판단 하고 평가하게 됩니다. ‘아,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난 왜 이 모양이지?’ ‘왜 이것밖에 안 되지?’ 자신에게 낮은 점수를 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죠.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못마땅해하는 마음에 덧붙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식과 죄책감입니다. 이런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너무 많이 느끼게 해요.” 어떠세요?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다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한편으로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우리도 완전해지라는 초대를 받았지만,(마태 5,48 참조) 하느님의 거룩함과 너무나 다른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죄의식을 갖게 되죠.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계명을 잘 지키며 살고 싶은데, 계명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보면 곧바로 죄책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삶의 많은 순간에 이런 움직임이 자동으로 일어나다 보니 자기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또 어떻게 하죠? 지금 보이는 내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돌립니다. 그게 잘 안되면 마치 다른 모습인 양 나를 포장합니다. 그렇게 포장한 내 모습을 누가 알려주기라도 하면 그 사람에게 화가 납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 모습을 성찰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은 나 자신 인데, 여기에 죄의식까지 더해진다면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차리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알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성찰이 현재 나에 대한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맹목적인 자기비판이나 죄의식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우리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건강한 죄의식과 죄책감은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지만, 그릇된 죄의식과 죄책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숨게(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죄의식은 악마의 유혹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에페 6,11)
- 민범식 안토니오 신부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