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는 사라진 것이 아니며 끝난 것도 아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은사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 나니
고린도전서 12:8-10
성령의 은사를 논하는 문제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수 없이 많은 기독교 책들 가운데 은사에 대해 다룬 책을 찾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책 내용에 있어서는 심각한 신앙적 도전을 주기에 충분한 책들이 한 두 종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배우고 익히 알고 있었던 여러 은사에 대한 성경적 지식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은사에 대한 자신의 모든 기초적 지식의 틀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은사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기에 대한 신학적 기초가 정확히 마련되지 않았음에 그 문제를 더해 가고 있다. 설사 각 교단마다 나름대로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기는 해도 은사에 대해 갈등을 겪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별로 큰 유익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
같은 신학을 전공하고 같은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마저도 여기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많으며 같은 교단에 속하여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도 서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다 보니 같은 교단과 같은 교회라 할지라도 은사에 대한 문제는 드러나서 그 문제를 보이거나 혹은 은폐된 문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성도들은 신앙생활 도중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던 그리고 자신에게 나타나리라고 생각지도 못하였던 여러 가지의 영적 현상을 체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다른 악령의 역사라 하더라도 영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람들은 크든 작든 여러 영적 현상들을 경험하거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자신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들에 대해 그냥 무심코 넘어 가는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다. 심지어는 심각한 영적 혼란의 사태로 진전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며 여기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여 신앙적 도전과 충격으로 교회를 떠나거나 더 나아가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목회자의 영적 지식 결여로 말미암아 성도에 대한 올바른 영적 가르침이 없게 되면 목회자는 별 어려움 없이 이 문제를 마무리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도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러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하였던 영적 여러 현상들이 자신에게 나타나면 우선적으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 교역자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자신이 목회 하는 교회의 성도가 그러한 문제로 말미암아 담임목회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른 교회의 목회자나 혹은 기도원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우선적으로 목회자 자신에게 그 어떤 문제가 있음을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교회에 다니다가 직장 문제로 말미암아 타지방으로 가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자신이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언니가 거의 매일 밤마다 어떤 영적 시달림을 받는 다는 것이다. 매일 밤 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잠을 잘 때마다 악몽을 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그 문제를 상의하였는데 불행히도 담임 목사님은 그러한 영적 현상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도저히 견디지를 못해 기(氣) 훈련을 시키는 모 단체에 들어가서 기 훈련을 통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예는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문제는 아니더라도 영적 현상의 문제에 있어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쉽게 넘어가 버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목회자는 더욱더 이 문제들을 수수방관하거나 자신이 잘 모르는 현상이요 자신이 공부한 신학적 틀로만 해석하여 성도들을 비 성경적이요 신비주의자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성도들이 잘못되었다고 매도하여서는 안된다.
모 잡지에서 본 기사 가운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래도 꽤 알려진 어떤 미인 점쟁이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를 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비통함을 금치 못하였으며 안타까운 우리 기독교의 영적 현실을 보면서 절로 탄식이 나왔었다.
기사내용은 점을 치는 그 자매가 자신이 점을 칠 수밖에 없는 사연을 기록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은 이유 없이 몸이 아팠고 아픈 몸의 치료를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쫓아 다녔으나 전혀 자신의 병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더 회괴한 일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병명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자신의 병명이 나오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에게는 어떤 특별한 병이 없다는 진단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원의 진단과는 다르게 자신은 너무 몸이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그 자매의 집안은 오래 전부터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집안이었고 아버님은 장로님이었으며 어머님은 교회의 권사였다. 교회의 장로인 아버지는 병원으로부터의 치료가 전혀 효험이 없게 되자 여러 기도원을 쫓아다니며 딸의 치료를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그 또한 자신의 딸을 전혀 치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그 자매가 길을 가고 있었는데 어떤 모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자신에게 모 절을 소개하면서 거기가면 당신을 위해 준비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로인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딸로부터 전해들은 장로님은 알지 못하는 질병으로 수 년 동안 고통 받는 딸이 가여워 길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대로 그 절로 찾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장로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라는 비판적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 년 동안 자녀의 아픔을 보아온 부모님의 마음은, 그리고 장로이면서 절을 찾아가는 딸을 이해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심정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자매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절을 찾아 그 절로 갔을 때 자신을 보던 어떤 사람이(아마 그 절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보자마자 신(神)기가 있으며 현재 자신의 아픈 몸에 대해 여러 가지의 사실을 말하면서 내림굿을 해서 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모든 질병들이 사라지며 아프지 않게 된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자신과 자신의 집안 전체가 기독교 집안이고 아버님은 장로님인 이 자매에게 있어 이러한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약한 게 인간인지라 여러 가지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내림굿을 하게 되었고 놀라운 사실은 내림굿 이후 그 자매의 몸은 거짓말처럼 아프지 않고 깨끗하게 병이 치유된 사실이며 내림굿이후 자신에게 어떤 신이 임하여 점을 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위의 기사 내용을 보면서 무엇인가 우리가 잘못 알거나 잘못하고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위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 내 주위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병을 고침 받고 훌륭하게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위와 유사한 여러 구체적 내용들은 필자가 다음에 책으로 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것이다.
영적 여러 체험과 영적 현상들은 우리 인간의 상식과 지식 및 지성을 넘어선 현상이다. 이론적 체계와 지식의 한계로 영적 여러 현상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한계를 보인다. 그렇다 보니 영적 체험과 영적 여러 현상에 대한 실제적 문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성도들이 겪는 여러 영적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답을 내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14장 사이에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 문제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밝히는 은사는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을 통해 성경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여 이해를 시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은사는 모두 영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시도하지 않으면 은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없다.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은사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학자들 간에 많은 차이를 보이나 필자는 고린도 전서12장에 나타나는 은사에 대해서만 말하고자한다. 그 이유는 다른 성경에서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는 은사의 성질과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보이고 있는 은사의 성질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보편적 은사(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술 등)와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일반적 은사(구제, 섬김, 봉사, 사랑 등)들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말씀하는 은사와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재론하지만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타나는 은사는 우리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초월한 영적 은사이기 때문에 영적 차원에서 그 해석을 시도하여야 한다. 여기에서의 영적 차원이란 이론적 지식과 상식으로는 해석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적 그 어떠한 노력이나 시도를 통하여서도 해결이 힘든 것들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알고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라는 말이 있다. 과부가 되어보지 아니하고 홀아비가 되어 보지 아니한 사람은 그들에 대한 이해와 설명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의 그들의 마음은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이 되어 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다. 자녀가 부모가 되어 보지 아니하고서는 부모마음을 알 수 없듯이 성령의 은사도 실제적 체험 없이 이론적 설명으로 대신 하여 은사의 본질을 유추해 낸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며 오히려 성령의 은사를 왜곡되이 이해하고 가르치게 될 위험성도 있다. 극단적 무 은사주의자들은 아예 성령의 은사자체를 부정하고 나서기 때문에 그들과는 심각한 대화의 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앞부분에서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계속 된다는 사실을 성경적 검토와 아울러 여러 차례 설명을 하였기 때문에 재론하지는 않을 예정이지만 때에 따라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설명을 시도하며 성령의 은사 및 여러 영적 현상들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제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