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편협+옹졸+찌질+냉혹한 조선 최악의 임금 인조
오늘은 세계 문화유산 조선왕릉, 파주 장릉 이야기입니다.
위치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에 있습니다.
조선왕릉에는 3 기의 장릉이 있습니다.
① 裝陵: 6대 단종의 영월 장릉
② 章陵: 추존 원종의 김포 장릉
③ 長陵: 16대 인조의 파주 장릉
장릉 한글은 동일하고 한자가 틀립니다.
주차장은 24년 2월 현재 아직 정비되지 않아 주변 공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해설사는 파주 시청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설시간은 10:30/13:30/15:00입니다.
능의 특징
현재 장릉 능침 석물은 옛 장릉의 석물과 옮긴 후 새로 만든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제향 때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남아있습니다.
능의 구성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입니다. 장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인조, 오른쪽에 인열왕후를 모셨습니다.
진입과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고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 양옆에는 제향 때 제관이 걷는 변로(邊路)가 남아있습니다.
능침에는 옛 장릉의 석물로 병풍석 일부(인석), 난간석 일부, 석상(혼유석) 2개,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양, 석호이며, 그 외 병풍석과 난간석은 옮기면서 새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기존 병풍석의 면석(面席)과 우석(隅石)의 무늬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를 새겼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이기 때문에 예에 어긋난다 하여 모란과 연꽃무늬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이후에 조성된 병풍석 조각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능의 역사
장릉은 1635년(인조 13) 인열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파주 운천리에 조성되었습니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었고,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인조의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릉이 풍수상 불길하고, 화재가 자주 일어나며 묘 주위에 뱀과 전갈의 피해가 잦자 1731년(영조 7) 현재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옮기면서 능의 형식을 쌍릉에서 세종의 영릉(英陵)의 예에 따라 합장릉으로 바꾸었습니다.
김포 장릉의 *안산인 계양산과 남북으로 일직선에 있는데 김포에 있는 원종의 장릉 일직선을 이루고 있어 마치 부모의 묘를 멀리서나마 모시는 모양새입니다.
인조(仁祖)
인조(1595년 ~ 1649년)는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첫째 아들로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으로 피란 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이 되었고 이후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습니다.
1623년 서인 정권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한 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반정공신 책록의 불만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는 등 즉위 초 반정으로 잡은 정권이 불안정하였습니다. 이괄의 난 이후에는 총융청(摠戎廳)을, 정묘호란 이후 수어청(守禦廳)을 새로 만들어 군제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정책으로 인해 두 차례의 침략 즉 정묘호란(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649년(인조 27)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열조(烈祖)라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인조라 정하였습니다.
정통성과 명분이 약한 반정이어서
백성들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고, 공신들 눈치도 보며 살았습니다.
사대사상에 찌들고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평생 열등감을 가진 용렬한 인간이었기에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소신을 가진 큰아들 소현세자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적이라 생각하고 가차없이 제거해 버립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볼모로 잡혀 있다가 귀국한지 겨우 2달 만에 죽었는데, 독살당한 증거가 너무 많고 소현세자 죽은 후 장례 과정만 보아도 인조의 소행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며느리에게 누명을 씌워 사사하고 그것도 모자라 어린 손주 3명을
유배시켜 병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세자를 모시던 나인과 내시들에게 누명을 씌워서 죽이고, 며느리 노모와 4명의 형제도 죽였으니, 이들의 원통함은 짐작도 하기 힘듭니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인조는 분명히 거기서 억겁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요?
내가 너무 잔인한 생각을 하는가 했지만 도저히 용서가 안 됩니다.
냉혹했던 태종도 자기 자식에게는 관대했습니다.
망나니 양녕을 폐하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도 행여나 형들에게 탄핵이 들어올까 걱정되어서 세종에게 그들의 목숨을 꼭 살려주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의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에 올랐더라면 우리는 일본보다 더 빨리 근대화를
했을 거고 일제강점기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나의 이런 생각이 오버 이겠지만~
개혁이라는 게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운 기득권층의 반발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가 지금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1594년 ~ 1635년)는 본관이 청주인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 1594년(선조 27) 강원 원주 내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 능양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으며,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조와의 사이에서 6남(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1녀를 낳았으며, 1635년(인조 13) 6번째 아이를 낳은 후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주와 5남, 6남은 낳자마자 죽었습니다.
차라리 인열왕후가 일찍 죽어서 다행이지 싶습니다. 만약 살아서 조선최악의 남편, 인조왕과 최악의 악녀 후궁 조귀인의 음모로 장남, 소현세자 일가족 몰살을 보는 참혹한 일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귀인 조씨는 조선왕조 실록에 엉큼하고, 간사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효종 때 역모에 연루되어서 자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