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도·화술 뛰어난 스님들이 방납 적임자
물품 조달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인력 네트워크 구비돼 건축·공예·의술 등 다방면서 기술력 갖춘 승단이 뒷받침 연화승, 모연 비롯해 방납 대행하며 고위 승직 오르기도
진관사 전경. 각돈 스님의 일화는 연화승이 방납 등 국가업무를 대행하며 고위 승직에 오르기도 하였음을 보여준다. [법보신문 DB]
전근대 시기 수취 제도에 공물(貢物)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앙의 여러 관청과 왕실에서 소용되는 물자를 전국 각 지방에 현물로 부과하던 제도다. 제아무리 지역의 형편에 맞는 토산품을 부과한다고 해도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해당 물품을 채취, 재배, 또는 제작하기 위해 별도의 시간을 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터. 혹시라도 과세의 설계가 꼼꼼치 못해 지역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물품이 부과되기라도 하면 그 어려움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대납(代納)이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는 것이다.
조선 초에 대납은 방납(防納)이라고도 불렸다. ‘방(防)’이라는 글자에 ‘대비하다, 방호하다’는 의미가 있어 가능한 용례였으리라. 방납은 지역민과 지방 행정조직의 물품 마련 및 조달 업무를 중개업자가 대행해 주는 것이므로 수수료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수수료가 과다할 경우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중앙정부는 방납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업무의 일환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납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세종 4년 (1422)의 ‘실록’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이) 각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諭示)하였다. 전에 대소인원(大小人員)과 연화승(緣化僧)들이 주군(州郡)의 진성(陳省: 공물의 사유와 품목을 기록한 문서)을 받아 여러 관청에 공물을 방납하고서는 그 대가를 배나 징수했기에 이미 이를 금지했었다. 이제 전해 듣건대 민간에서 스스로 준비하지 못하는 물건을 방납해 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백성의 사정이 편리하게 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실상대로 탐지하여 아뢰라.”(‘세종실록’ 18권, 4년 윤12월17일)
방납업자들이 원가만큼이나 높은 값의 수수료를 책정하였기에 한때 그것을 금지한 바 있으나, 이제 다시 수수료를 현실화하는 선에서 방납을 허가할 수도 있다는 취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대행업자로 대소인원 즉 높고 낮은 여러 지위의 사람들이 불특정하게 거론되는 가운데에 연화승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지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주들의 보시를 받아 불사를 실제로 경영하던 연화승들이 세종 당시 적극적으로 방납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기사의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면 방납업자들이 지방 행정조직으로부터 그 지역의 공물대장[진성(陳省)]을 받아서 공물을 방납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방납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지방 행정조직과 거래를 틀 수 있을 정도의 지명도와 화술 그리고 식자(識字)능력이 필수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는 경우에 맞는 물품을 무리 없이 조달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인력 네트워크도 구비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명망가들의 수결(手決)이 찍힌 권선문(勸善文)을 들고 다니며 사회 각층으로부터 모연(募緣)을 이끌어내었던 연화승이야말로 바로 그 일을 위한 최적의 적임자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는 이제껏 보아왔듯 건축, 공예, 의술 등 다방면에서 풍부한 기술력을 구비한 승단이라는 전국적 네트워크가 든든히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세종 때에는 연화승 또는 간사승(幹事僧)들의 방납활동이 적지 않게 보고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하여 이름을 남긴 스님들도 여럿 보인다.
혜찬(惠贊)은 세종 21년(1439) 충청도의 각 고을에서 기와 굽는 나무인 토목(吐木)을 대납한 스님이었다(‘세종실록’ 85권, 21년 6월4일). 대납을 마친 뒤 값을 징수하러 충청도로 가던 중 관원으로부터 역마를 제공받은 것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실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혜찬 스님의 대납 활동이 현장에서는 공권력의 비호를 받을 정도로 존중되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당시 충청도에서는 혜찬 스님 이외에도 여러 스님들이 토목의 대납에 참여했던 흔적이 보이는데(‘세종실록’ 89권, 22년 5월9일), 태종과 세종 때 해선(海宣) 스님을 중심으로 스님들의 별와요(別瓦窯) 활동이 두드러졌음을 상기하면 승단에서 토목을 조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같은 시기 경상도에서는 대장사(大莊寺) 화주승(化主僧) 혜회(惠會) 스님이 철기(鐵器)를 대납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일은 임금과의 긴밀한 교감 속에 이루어진 일인 듯한데, 세종 21년 사헌부와 사간원의 상소문에서 “산음과 합천 두 고을에서 바치는 철기를 승려 혜회의 뜻에 따라 정철(正鐵)로 대납했다.”(‘세종실록’ 85권, 21년 4월22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도 혜회 스님이 정철을 대납하고 그 값으로 쌀 390여석을 받아가자 임금은 진주와 함양에서 그 값을 분납하도록 호조에 지시하였다(‘세종실록’ 88권, 22년 2월16일)
한편 세종 말년 방납과 관련하여 뚜렷한 행보를 보이며 성장한 각돈(覺頓) 스님을 기억해야 한다. 각돈 스님은 권연(勸緣)을 업으로 삼아 명실상부하게 연화승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다. 청계사(淸溪寺) 암주로 재직하던 중 세종 31년(1449) 진관사 수륙사(水陸社)의 중수가 국책사업으로 시작되자 토목 공사의 관리감독에 능하다는 정평에 따라 사업의 간사승으로 천거되었다. (‘세종실록’ 124권, 31년 54일 ; ‘세종실록’ 127권, 32년 윤1월29일 ; ‘단종실록’ 6권, 1년 6월24일)
문종 재위기까지 지속된 이 사업에서 그는 여러 고을의 지둔(紙芚: 띠풀로 만든 자리나 장례용품 등의 물건)을 대납한 수익금으로 공사의 자금을 삼았는데, 그를 견제하고자 하는 유신들의 공격 속에서도 변함없이 임금의 신임을 받으며 업무를 수행하였다.(‘문종실록’ 1권, 즉위년 4월28일 ; ‘문종실록’ 4권, 즉위년 10월30일 ; ‘문종실록’ 4권, 즉위년 11월1일) 정황상 각돈 스님의 지둔 방납 또한 세종 임금과의 각별한 소통 속에서, 스님의 주청을 임금이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단종실록’ 6권, 1년 6월24일, ‘(각돈이 세종에게 계청하여) 또 여러 읍의 지둔을 대납하도록 하였다.’) 즉 스님들의 방납활동은 자신들의 능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행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능력을 알아본 위정자와의 교감 속에서 위정자의 정책 결정에 따라 행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진관사 중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각돈 스님은 마침내 진관사의 주지에 임명되어 오랜 노고의 결실을 보게 된다.(‘단종실록’ 6권, 1년 6월21일) 각돈 스님의 사례는 연화승의 활동이 모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방납과 같은 행정 활동을 대행하기도 하며 고위 승직에 이르는 또 다른 기회가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