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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열반경의 ‘아(我)’는 ‘이트만’의 의미인가?
Ⅲ. 열반경의 편찬지역과 초기 베다에 나타난 재귀대 명사로서의 ‘아(我)’의 관계
Ⅳ. 불성(佛性)은 브라마니즘의 영성(靈性)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Ⅴ. 불성(佛性)과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령(聖靈) 비교
Ⅵ. 결론
<국문초록>
비물질적이며 순수영혼이자 정신으로서의 아트만과 달리 열반경의 ‘아 (我)’는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자 정(正)과 반(反)의 불이(不二)적 연기(緣起) 관계이다.
또한 인도철학에서 영성(靈性) 개념은 크 게 아트만(Ātman), 푸루샤(Purusha), 지바(jīva)로 압축된다.
하지만 아트만과 지바, 푸루샤는 순수(純粹)와 오염(汚染), 청정(淸靜)과 부정(不淨), 해탈(解 脫)과 속박(束縛)의
대립적 이원론의 구조를 가진다.
하지만 열반경의 불성은 ‘아(我)’와 마찬가지로 중도(中道)이자 불이적 일원론의 시각을 분명하 게 나타낸다.
열반경의 ‘불성’이 가지는 ‘영성’적 측면을 고찰한다면,
인도의 종교 사상 이 아닌,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령’과 비교하는 것이 보다 가까운 접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절대자에 의한 구원의 타력신앙인 기독교에서 이 성령 은 인간 존재 밖의 구원적 존재이다.
하지만 불교는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 는 자력의 해탈종교이다.
성령이 가지는 피조물의 ‘완성(perfectio)’과 ‘복원 (reformatio)’은 절대자의 구원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자력 해탈 종교인 불교에서 일체중생은 불성을 ‘완성(perfectio)’과 ‘복원(reformatio)’의 내적 능력으로 이미
자력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불성이 영성적 성격을 가진다 하더라도
타력 구원종교인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령과는 그 성격과 양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열반경, 불성, 영성, 성령, 아트만, 삼신불, 삼위일체
Ⅰ. 서론
‘불성(佛性)’은 산스크리트 Buddha-dhātu의 중국 한역(漢譯)이다. 불성론 (佛性論)이 불교사상의 핵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대승불교 열반경 이후이다. ‘불성(佛性)’은 인간에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성품의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혹은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갖춘 성품의 ‘씨앗’이라는 의미 를 가진다.
전자(前者)의 경우 중생에게 선천적이고 본래적인 불성(性得佛 性)은 없지만 수행을 통해 후천적인 불성(修得佛性)은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나 무자성(無自性)의 공관(空觀)을 기초로 하는 중관 불교 등에서 주로 나타나는 시각이고, 후자의 경우는 중기 대승불교 이후 보 편적으로 확대된 불성의 개념이다.
특히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佛種)이 모 든 중생의 성품 속에 있다’ 1)는 열반경의 선언과 승만경 능가경 등의 여 래장(如來藏)과 불성(佛性)이 동일하게 이해되며2) 이와 같은 후자의 불성론 은 실체론적인 성격으로 이해될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1) TD 12, 881b. 一切衆生皆有佛性, 在於身中.
2) TD 16, 489a. 如來藏自性清淨. 轉三十二相. 入於一切衆生身中. 如大價寶垢衣所纒.
한편 마쯔모토 시로3) 등 일본의 대승불교의 일부 연구에서는
열반경에 제기된 ‘불성내재론’을 ‘불성이 우리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실재(實在)’로 해 석하고,
이는 곧 아(我,아트만)를 의미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물론 법현 역 열 반경에는 “불(佛)은아(我=아트만)를 의미한다
(佛者是我義)”4)는 구절이 나 온다. 마쯔모토는 이것을 “불타(佛陀)는 아트만을 뜻한다”라는 의미로해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열반경의 상(常)ㆍ낙(樂)ㆍ정(淨) 중 ‘아(我)’가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에서 통상 아트만(Ātman)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 용례 를 보았을 때 충분히 개연성 있는 분석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가 브 라만교의 ‘아트만’에
반대하는 ‘무아(無我)’를 정체성으로 형성된 종교 사상이 라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쉽게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마쯔모토는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불성’이 ‘아트만’과 같은 의 미이자,
이 아트만은 곧 ‘영혼’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만큼5), ‘불성(佛性)은 곧 영혼(靈魂)을 의미하는 것’ 6)으로 곧 ‘영성’을 의미한다고 까지 말한다.
3) 마쯔모토 시로, 불성(佛性)과 영성(靈性) , 인도철학 제41집, (2014.8).
4) TD 12. 862a.
5) 마쯔모토 시로, 위의 논문, p.17.
6) 마쯔모토 시로, 위의 논문, p.11.
하지만 다시 이 ‘영(靈)’이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쯔 모토 스스로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불성의 산스크리트어 Buddha-dhātu 중 ‘Buddha’ 또는 ‘dhātu’가 ‘영(靈)’으로 한역(漢譯)될 여지는 초 기와 중기 대승불교의
경전에서는 그 용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한역(漢譯) 열반경에는 ‘영(靈)’이라는 글자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 다.
법화경의 경우에도 ‘영(靈)’이라는 용어는 ‘영취산(靈鷲山)’이라는 지명 표기에 나타나는 ‘영’ 이외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화엄경에는 단 세 번의 사용례가 나타나기는 하나 모두 ‘영향(靈香)’ ‘영약(靈藥)’ ‘영서상(靈瑞相)’과 같이 술어(述語)로
사용될 뿐 ‘영성(靈性)’이나 ‘영혼(靈魂)’을 의미하는 용례 는 없다.
그만큼 초기와 중기 대승불교 안에서는 ‘영’이라는 개념은 매우 이질 적인 의미이다.
따라서 ‘불성’을 ‘영성’의 한 형태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분석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불성이 곧 아트만이다’는 마쯔모토의 분석은 열반경이 편 찬된 지역이 인더스강 이북 간다라 지역과 더 북쪽인 서북 인도 지역이었음 을 감안한다면 역사적, 지리적, 종교적 관계성을 보다 다양하게 검토하여 논 증할 필요가 있다. 먼저 종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인도사회에서 불교 정체성은 브라만 교의 아트만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된 ‘무아(無我)’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불 성’ 개념이 실체론적 성격을 가진다고 하더라고 이것이 곧 브라만교의 아트 만과 동일한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부파불교 시대 이후 이와 같은 실체론적 사유는 불교의 무아론의 범주에서 아트만과 다른 범주에서 충분히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은 세계의 실유(實有)를 인정하는 실체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있다. 단 세계의 실유적 실체를 인정하되, 이 세계가 연기적 결합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찰라생’ ‘찰라멸’하는 비본질적 세계라고 규정 되기에 무아론의 한 범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체의 ‘현상 적 실유’를 인정하는 사유는 반야심경의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 卽是空)’이 색의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이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 라고 규정하여, 색이 비본질적이지만 현상의 실체성을 가지는 것을 인정하 는 것에도 잘 나타난다.
즉 열반경에 나타나는 불성이 설령 실체론적 성격 을 가진다 하더라도 영원 불멸의 아트만과 동일한 것이라고 규정 지을 수
없 는 것이, ‘삼세실유 법체항유’와 같은 비본질적 실체론의 한 형태로 불교사상 사 내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하며 ‘공즉시아(空卽是我)’ ‘아즉시공(我卽是空)’ 과 같이 무자성(無自性)의 ‘실재’로 얼마든지 섭수(攝受)가 가능하기 때문이 다. 이와 같이 마쯔모토 등의 ‘불성=영성’의 시각은 아트만과 불성의 실유적 실 체에 대한 성격 규정의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으며, 다시 불성과 영성 의 관계를 규명 하는 것을 통한 깨달음의 ‘새로운 양상’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 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Ⅱ. 열반경의 ‘아(我)’는 ‘이트만’의 의미인가?
위에서 기술한 바와 “불(佛)은 아(我)를 의미한다(佛者是我義)”는 열반경 의 구절에서 ‘아’는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에서
통상 아트만을 의미하는 용 어로 사용된 용례로 보아 ‘아트만’을 의미한다고 분석한다.
좀 더 자세하게 살 펴보자. 우선 열반경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중생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와 무명에 가려져서
뒤바뀐 마음을 낼 때에,
나(我)에 대하여 내가 없다(無我) 생각하고,
항상(常)한 것을 무상(無常)하 다 생각하고,
깨끗한(淨) 것을 부정(不淨)하다 생각하고,
즐거운(樂) 것을 괴롭다(苦) 생각하는 것이다.
번뇌에 가렸으므로 그러한 생각을 내는 것이 니,
마치 술 취한 사람이 돌지 않는 것을 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7)
또한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뒤를 잇는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은 평등을 알지 못하여 올바르지 못한 닦 음을 올바른 닦음이라 하며 괴로움을 괴로움이 아니라고 닦으며 무상한 것 을 항상 하다고 닦으며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닦으며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닦으니, 이 네 가지 닦는 것은 세간의 즐거움(樂)과 항상함(常) 과 나(我)와 깨끗함(淨)이니, 세간을 여의고도 또한 네 가지 즐거움과 항상 함과 나와 깨끗함이 있느니라. 너희는 세간법에서 말하는 이름과 출세간법 에서 말하는 뜻을 알아야 하느니라.8)
이와 함께 미쯔모토의 주장에 핵심이 되는 “저 부처라는 것이 ‘나’라는 뜻 이요, 법신은 항상하다는 뜻이며, 열반은 즐거움이란 뜻이고, 법이라 이름하 는 것이 깨끗하다는 뜻”9)이라는 가르침이 나오는 것이다.
7) T0374_.12.0377b17 衆生亦爾。爲諸煩惱無明所覆生顛倒心。我計無我常計無常。
淨計不淨樂 計爲苦。以爲煩惱之所覆故. 雖生此想不達其義.如彼醉人於 非轉處而生轉想 .
8) T0376_.12.0862a21 如是四顚倒想者不識平等, 於此所修非爲正修; 苦不苦修, 無常常修, 非我 我修,
不淨淨修, 此四種修是世閒樂常我淨, 離世閒亦有四種樂常我淨; 汝等當知名味者世閒 法, 義者出世閒法.
9) T0376_.12.0862a14 然彼佛者是我義 法身是常。泥洹是樂義假名諸法是淨義.
하지만 법현 역의 대반니원경보다 빨리 한역(漢譯)된 담무참 역 대반 열반경에는 이와 다른 내용이 나온다. 먼저 법현의
역에서는 “불(佛)은 아 (我)를 의미한다(佛者是我義)”고 하지만 담무참 역(譯)의 대반열반경에서 는 “아(我)는 곧 성품이다(我者卽是性也)”라는 말이 있다. 법현은 ‘불=아’라고 번역한 것과 다르게 담무참은 ‘불=성품’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담무참도
‘아(我)’가 ‘불(佛)’을 뜻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묘한 뉘앙스 의 차이를 보인다. 아(我)는 곧 불의 의미이고
상(常)은 법신의 의미이며,
락(樂)은 열반의 의미이고
정(淨)은 법의 의미이다.(我者即是佛義 常者是法身義 樂者是涅槃 義 淨者是法義)10) 한자(漢字)에서는 통상적으로
‘A是B’는 ‘A=B’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A 卽是B’는 이와 다르게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처럼 논리학 적으로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는 이중성을 나타내며, ‘A≓B’라는 의미로 근사치(近似値)의 의미를 가진다.
담무참은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중 상, 락, 정은 ‘A=B’라는 등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아(我)에 대 해서만
‘卽是’로 한역한다. 이것은 위의 “아(我)는 곧 성품이다(我者卽是性也)” 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아’를 설명하는 내용에서 대해서만 동일 하게 ‘卽是’로 한역(漢譯)하고 있다. 이것은 ‘아’가 반드시 ‘불’이나 ‘성’과 동일 한 것이 아니라는 번역자의 해석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11)
10) T0374_.12.0377b22.
11) 이는 담무참역과 법현역을 참조하여 증보한 혜암역 대반열반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다.
T0375_.12.0617a22 我者即是佛義.常者是法身義.樂者是涅槃義.淨者是法義.
이런 미묘한 ‘차등’은 구체적으로 ‘담무참 역본에 나타난 ’아’에 대한 설명 을 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또 어느 때에 나는 제자들에게 ‘아(我)라는 것은 곧 성품이니,
안과 밖의 인연, 십이인연, 중생의 오음, 심계(心界)의 세간, 공덕, 업행(業行), 자재천세(自在天世)를 곧 아(我)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많은 제자들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여래께서는 유아(有我)를 말씀하셨다’라고 하였 다.12)
이것은 붓다가 말하는 ‘아(我)’가 아트만과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음(五蘊), 업행 등 개별 개체와 자재천세로 의미되는 현상 세계는 ‘브 라흐만-아트만(梵我一如)’의 구조와 동일하지만
물질적이고 세간적인 유위 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서 비물질적 순수 정신과 원리로 설명되는 범아일 여와는 그 성격과 의미가
다르다. 이것은 다시 ‘아’를 시간에 따른 조건적 존 재를 의미하는 ‘기(期)’나 행위의 결과로서의 ‘업(業)’, 자신에 대한 집착을 의
미하는 ‘애(愛)’로 설명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구여 나(我)와 내 것(我所)은 없다. 눈(眼)이란 것은 본래 없던 것이 지 금 있는 것이며 이제 있으나 다시 없어질 것이다.
태어날 때에도 온 곳이 없 고 멸할 때에도 갈 곳이 없다. 비록 업과 과보가 있으나 짓는 이가 없고 음 (陰)을 버리는 이도 음을
받는 이도 없다. 네가 ‘어떤 것을 나(我)라고 하느 냐?’고 물으면 나(我)는 곧 시기(期)이다. ‘누가 나(我)이냐?’고 물으면
곧 업 (業)이다. ‘무슨 까닭에 나라고 하느냐?’고 물으면 곧 사랑(愛)이다.13)
12) T0374_.12.0566b08 我者, 卽是性也, 所謂內外因緣、十二因緣、衆生五陰、心界、世閒、功 德業行、自在天世, 卽名爲我 我諸弟子聞是說 已, 不解我意, 唱言: ‘如來定說有我.
13) T0374_.12.0566b13 比丘 無我我所 眼者即是本無今有已有還無。其生之時 無所從來 及其滅 時亦無所至 雖有業果無有作者 無有捨陰及受陰者 如汝所問云何我者我即期也 誰是我者即 是業也。何縁我者 卽是愛也.
다시 붓다는 ‘두 손바닥을 마주칠 때 나는 소리’를 예로 들어 ‘아’가 연기적 존재임을 설명하고 있다.
비구여, 마치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데, 나라는 것도 그와 같 아서 중생과 업과 사랑의 세 인연으로 나라고 이른다.
비구여, 모든 중생의 색(色)은 내가 아니다. 나 가운데 색이 없고 색 가운데 내가 없으며 나아가 식(識)도 그와 같다. 비구여,
모든 외도들이 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음을 여 의지 못하였다. 만일 음을 여의고 따로 나(我)라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이치는 없다. 온갖 중생의 행(行)은 환술과 같고 더울 때의 아지랑이 와 같다. 비구여, 오음(五陰)은 모두 무상하고 즐거움이 없고 내가 없고 깨 끗하지 않다고 하였다.14)
14) T0374_.12.0566b18 比丘 譬如二手相拍, 聲出其中, 我亦如是, 衆生、業、愛三因緣故, 名之爲 我。比丘! 一切衆生色不是我, 我中無色, 色中無我, 乃至識亦如是。比丘 諸外道輩雖說有 我, 終不離陰, 若說離陰別有我者, 無有是處。一切衆生行如幻化、
熱時之焰。比丘 五陰皆 是無常、無樂、無我、無淨.
특히 “음을 여의고 따로 나(我)라는 것이 말한다면, 그런 이치는 없다(若說 離陰別有我者, 無有是處)”는 가르침은 매우 유의미하다. ‘음을 여의고 따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아트만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 아트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들을 ‘외도의 무리(諸外道輩)’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이 담무참 역본의 대반 열반경에서 나타나는 ‘아(我)’의 의미는 오온(五蘊)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만, 다시 오온을 떠나서도 존재하지 않는 다.업(業)과 행(行)이 ‘아’가 아니지만 다시, 업과 행을 떠난 것도 ‘아’가 아닌, 양 극단의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자 정(正)과 반(反) 의 불이(不二)적 연기(緣起)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
곧 중도적이며 연기적 존 재인 열반경의 ‘아’는 상의상대(相依相對)의 ‘아’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심(核心)으로,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거나
존재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절대적인 영원불멸의 ‘아트만’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의 개념이다.
Ⅲ. 열반경의 편찬지역과 초기 베다에 나타난 재귀대명사로서의 ‘아(我)’의 관계
한편 아트만의 개념은 초기 베다 문헌에서는 주로 재귀대명사(자기 자신) 로 나타나지만, 점차 우파니샤드 철학으로 발전하며
개인에 내재된 본질적 원리이자 영혼 또는 인간의 정수(精髓: essence)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발전된 아트만의 의미는 영원불멸의 본질적 의미는 독존(獨存)적 존재로 불 교의 중도적이며 정(正)과 반(反)의 연기성을 가진 비본질적 주체개념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초기베다의 재귀대명사로서의 아트만의 개념이라면,
열반경의 ‘아(我)’를 어원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담무참 역본에는 재귀대명사로서의 ‘아’가 ‘자기 자신’을 뜻하는 의 미로 매우 자주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 범지는 다시 말하였다.
“구담이여, 나(我)는 오래 전부터 당신의 친 구가 되었으며 당신은 나(我)와는 둘이 아닌데 내(我)가 묻는 것에 무엇 때 문에 잠자코 계십니까?”15)
15) T0374_.12.0597b27 犢子復言。瞿曇。我久與汝共爲親友。汝之與我義無有二。我欲諮問何 故默然.
여기에서 아(我)는 아트만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지칭하 는 재귀대명사의 의미가 명백하다.
담무참 역본에는 이외에도 붓다가 스스 로를 지칭하거나 제자나 비구 대중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는 ‘我’나 ‘我等’과 같이
재귀대명사로 사용하는 용례가 수도 없이 많다.
뿐만 아니라 법현역(譯) 의 대반니원경에도 ‘謂我身斷滅’ ‘能知我身中’ ‘聞我爲衆生’ ‘能知我身有 微 妙法身種’ 등 아(我)가
재귀대명사로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용례는 무수히 많다.
따라서 딱히 마쯔모토의 주장처럼 ‘佛者是我義’의 我만을 ‘아트만’을 의 미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큰 무리가 따른다.
특히 열반경은 경(經)의 형성지역과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였을 때에는 ‘佛者是我義’ 아는 아트만이 아닌 초기 베다의 재귀대명사(자기 자신)의 의미 로 이해되어져야 할 여지가 더욱 커진다.
대승불교의 주요 발흥지이자 열반 경의 편찬 지역으로 추측되는 인더스강 이북 간다리 지역과 더 북쪽인 이란 과 페르시아
지역은 전통적으로 브라만(힌두)교가 신앙되었던 지역이 아니 다.
“대승불교의 형성은 주되게 기원 전후의 쿠샨왕조 시대의 인더스강 이북 지역인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과 이라크 지역을 포함 하여 카스피해 연안까지 확장된 광대한 지역이다.
이 지역이 지금은 이슬람 문화권이지만 당시에는 강력한 대승불교의 중심발원지였다, 만약 열반경 의 ‘아(我)’가 브라만교의 아트만과 같은 의미라면, 이 지역 또한 당연히 인도 브라만교의 종교적 영향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 지역은 인도 브라만(힌두)교 문화권이 아닌 페르시아 문화권의 중심 지대로서 다양 한 종교가 경쟁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트만에 대 한 반대를 자기정체성으로 성장된 불교가 브라만교의 문화권이 아닌, 페르 시아 문화권에 전파되면서 이제까지의 입장에서 돌변하여 초기불교의 핵심 이론인 무아론에 훼손을 가하면서까지 브라마니즘의 아트만을 수용하였다 는
주장은 사실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불교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브라만(힌두) 교가 아닌 새로운 페르시아 종교와의 조우를 추측할 수 있고, 이 새로운 종교 와의 융합을 통하여 대승불교의 이론들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6) 대승불교가 발전하는 쿠샨왕조 이전부터 페르시아 지역의 전통 종교는 조로 아스터교가 원류이다. 그렇다면 인도 서북부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편찬된 열 반경의 ‘아(我)’는 브라만교의 아트만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와의 융합을 심도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간다라 미술에 나타나는 불교 미술의 특성처럼, 쿠샨왕조의 대승불교는 국제화된 서북 인도와 페르시아의 하이브리드적 문화 결합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이(異)종교와의 상호 융합을 통해 새롭게 변모한 글로벌한 불교였다. 흥미로운 것은 페르시아의 이란인과 인도의 브라만 계급은 동일한 원류의 아리안족이라는 것이다. 이란은 아리안족의 후예라는 뜻으로 ‘고귀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페르시아(이란)의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조로아스터교는 인도의 브라 마니즘을 탄생시킨 민족과 동일한 민족 기원을 지닌 종교라는 사실이 이 분 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17)
16) 박용태, 대승불교 형성기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의 영향 - 불교 사후세계의 이원화 현상 을 중심으로 -
(한국불교학 88집) 2018. p.124.
17) 신양섭, 페르시아 문화의 동진과 소그드 민족의 역할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를 중심으로 -
(中東硏究, 27-1집) 2008. p.13 참조.
따라서 이란인과 인도인은 매우 유사 한 신화를 공유한다.
먼저 이란인과 인도인은 매우 유사한 초기 베다 문헌을 신화와 종교 경전으로 사용한다.
가령 힌두교에서 제석천을 상징하는 ‘인드 라’(Indra)와 태양신 ‘미트라’(Mitra)는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인타르/인다라 (Intar/Indara)’와 ‘미트라(Mithra)’로 불린다.
이와 같은 두 지역 신화의 유사성 은 열반경의 ‘아(我)’가 브라만교의 ‘아트만’과 동일한 것이라는 오해의 중 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18)
허인섭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인도로 이주한 아리안 민족의 종교사상의 결집물인 베다 문헌에 보이는 절대신(絶對 神)적인 개념들에도 중동지역의 유일신 사상 성립에 큰 영향을 준 아리안 민족의 조로아스터교적 종교적 특성이 유사한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베딕(Vedic) 전통을 비판하면 서 성립된 불교가 베딕 사상의 기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갔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를 보고자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19)이라고 중요하게 지적한다.
18) 박용태, 앞의 논문, p.129. 19) 허인섭, 초기 중국불교 법신론(法身論)에 나타나는실체론적 사유경향의 원인 고찰 (東方 學 30집, 2014), p.264.
특히 같은 초기 베다를 신화와 경전으로 삼고 있는 인도 브라만교와 페르 시아의 종교에는 서로 비슷한 신들이 등장하지만 이 신들은 서로 선-악이 반대로 표현되어 있어 동일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적대적인 관계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신을 의미하는 고대 단어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데바(Deva)이며 조로아 스터교의 발원지인 이란에서는 악마를 의미하는 다에바(Daeva)이다.신의 복수형을 의미하는 제신(諸神)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아수라(Asura)인 것 에 비하여 고대 이란어로는 아후라(Ahura)이다. 아수라는 인도 베다 신화에 서 처음에는 선신(善神)(Aditya 신군(神群) 따위의 호칭이었으나, 나중에는 악 마(Danava)의 호칭이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문헌인 ≪아베스타(Avesta)≫에 등장하는 최고신인 아후라(Ahura)와 일치하는 존재로서, 고대에 중앙아시아 와 이란 지역에서 숭배되던 태양신이 인도아리아인의 인도 진출과 함께 인도 신화에 수용되었다가 악신(惡神)으로 폄훼된 것을 유추하게 한다.20)
20) 박용태, 앞의 논문, p.133.
따라서 같은 초기베다를 신화와 경전으로 삼고 있다 하더라도, 브라만교 에서 우파니샤드 로 발전하며 의미가 완성된 인도의
아트만 개념이 반드시 인도 서북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에서 형성된 열반경의 ‘아(我)’와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개연적 근거는 희박하다.
그리고 베다 이후 우파티샤 드 철학으로 발전하며 형성된 인도의 ‘아트만’과, 이와 다르게 서북인도와 페 르시아 지역의 종교에서는 초기베다의 재귀대명사(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의미로 한역(漢譯) 번역어 ‘아(我)’를 사용하였다면, 아트만의 ‘아’와 열반경 의 ‘아(我)’는 번역어 상 ‘동음 이의어’가 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인더스강 이북의 인도 서북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을 통칭하는 ‘서역 (西域)’과 인더스강 이남을 통칭하는 ‘천축(天竺)’ 지역을 불교사적 의미에서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던 3~4세기 전후 중국에서는 인도 브라만교 아트만 의 ‘아’와 서북 인도 및 페르시아 지역에서 형성된 재귀대명사로서의 ‘아(我)’ 의 상이한 의미를 구별해 내기란 매우 곤욕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하였을 때, ‘아(我)는 곧 아트만을 의미한다’고 해석 하는 마쯔모토의 분석은 지금의 인도인 인더스강 이남의 천축지역에서 형성 발전된 근본불교와 부파불교, 그리고 초기 중관불교의 경전이나 논집에 대 해서는 상당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브라마니즘의 문화권을 벗어나 간다라 지역과 그 북쪽인 페르시아 권역에서 형성된 열반경과 같 은 북전계열 대승경전일 경우에는 이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개연성은 매우 높으며, 또한 페르시아 문화권이 초기 베다문헌을 공유하는 아리안문 화권이라면 것을 감안하면 ‘아’가 아트만이 아닌 재귀대명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된다.
특히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 최초로 선언된 열반경이 라면, 아는 일체중생 각각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재귀대명사로써 ‘아(我)’ 의 용례는 충분히 유추될 수 있다.
일체중생 각각의 ‘아(我)’가 모두 부처와 같 은 성품을 몸 안에 가지고 있어 ‘각각의 일체중생이 곧 부처’라는 의미로 ‘아(我)’는 곧 성품(我者卽是性也)’이고 ‘아는 곧 불을 의미(我者即是佛義)’하며 다시 “불(佛)은 아(我)를 의미한다(佛者是我義)”고 설하여졌을 것이다. 이때 ‘아(我)’는 각각의 일체중생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지 아트만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다.
Ⅳ. 불성(佛性)은 브라마니즘의 영성(靈性)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마쯔모토가 말하는 영성(靈性) 개념을 인도철학에서 찾아본다면 크게 아 트만(Ātman), 푸루샤(Purusha), 지바(jīva)로 압축된다.
이중 푸루샤는 초기 베 다의 창조 신화에서 우주 창조의 원인으로 인도 대부분의 학파에서 영원하 고 불변한 자아의 본질로 인정하는 영혼 개념이다.‘물질’을 의미하는 프라크 리티(prakṛti)와 대립되는 순수 정신을 의미하며, 현실 세계의 인간은 이 순수 정신의 푸루샤와 물질인 프라크리티를 혼동함으로써 영혼이 구속된다.
해탈 이란 프라크리티로부터 푸루샤가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 정신(영혼)과 물질을 대립시키는 이원론(二元論)적 푸루샤 개 념은 열반경의 ‘아(我)’와는 다른 사상적 구조를
가진다. 위에서 기술한 바 와 같이 열반경에 나타나는 ‘아(我)’의 의미는 양 극단의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자 정(正)과 반(反)의 불이(不二)적 연기(緣起)의 일원론 토대 위에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락,아,정 모두에 해당되는 사상 구조이기 때문에 열반경의 사상은 불교를 제외한 다른 외도(外道)의 푸루나와는
차별이 있다.물론 베단타학파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 열 반경의 중도적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과 동일한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지 만, 이는 시대적 출현 상황으로 보아 도리어 열반경의 양 극단의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나 유마경 등 불이론(不二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한편 푸루나의 대립적이고 이원적인 사유구조는 아트만이나 지바에도 동 일하게 나타난다.‘아트만’은 산스크리트로 ‘개별적인 영혼’을 뜻한다.
브라만 (절대자)은 우주의 본질적 근거이며 이것이 개별화된 아트만은 사람의 근원 이다.
초기 베다 문헌에서는 주로 재귀대명사(자기 자신)로 나타나지만 후기 우파니샤드에서는 차츰 더 철학적인 주제로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아트 만은 행위의 업(業)에 ‘훈습(薰習)’된다는 점에서 푸루샤와 다르다.
본래 범아일여(梵我一如)론에 의하면, “최상의 정신적 실체(브라만)는 마음에 내재하여 ‘의식의 최고 원리’(영혼)가 된다.
그래서 이 둘은 동일하고 ‘자 신의 진실한 존재’이다. 이것은 푸루샤와 유사한 개념이다.
그러나 상키야 철 학에서는 이러한 동일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내재하여 의식의 형태로 있는 영혼이라면, 이런 영혼은 마음 또는 의식의 속성과 절연될 수 없 기 때문이다.
특히 상키야의 이원론에서는, 의식의 형태로 있는 것이라면 이 것도 모두 무지라는 불순한 속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더욱이 영혼이 의식의 형태로 내재한다는 것은 인식 기관으로서 또는 인식 기관 속에 존재한 다는 것과 같다.
인식 기관은 순수한 속성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기존의 영혼 개념은 이 같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21)
이것은 지바(jīva)도 마찬가지이다.
지바는 영혼, 의식, 생명, 삶의 의미이 다.
지바(jīva)의 반대 의미인 아지바(ajīva)가 물질, 비영혼(非靈魂), 무의식, 무생명, 죽은 것 등의 의미로 쓰이는 것처럼 순수 정신과 비물질적 순수영혼 이자 생명을 의미한다.22)
“대체로 지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그 어원, 즉 √jīv(살다)와 관련이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생물학적 생명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지 만, 철학적인 자아 개념의 토대가 되기도 하며, 종교적인 영혼 개념으로 설명 되기도 한다.이와 같은 지바의 개념은 자이나를 비롯한 인도 철학에서 다양 한 용례로 진술되고 있다.”23)
21) 정승석. (2011). 영혼에 관한 인도 철학의 세 가지 관점. 『가톨릭신학과사상』, 67, p.164.
22) Radhi, Bibhu & Padhi, Minakshi(1998). Indian Philosophy and Religion-A Reader’s Guide, 1st ed.,
New Delhi : D. K. Print World (P) Ltd. p.82.
23) 김미숙. (2013). 불교에 인식된 자이나교의 실체 분석 -파에시 논쟁과 지바의 특성을 중심 으로-, 인도철학, 38, p.221.
특히 구마라집은 금강경에서 ‘jiva samjna’를 수자상(壽子相)으로 번역하였으며 현장은 이를 ‘命’으로 번역하였으니 만큼,
불교와 가장 근접한 인도철학의 영혼 개념은 지바(jīva)로 보여진다.
또한 순 수한 상태(mukta-jῑva)의 지바는 우주의 본원으로 회귀하여 다시 윤회하지 않 게 된다.
그러나 순수를 잃은 지바는 윤회(輪廻)한다.
과거 행위로 인한 선업 또는 악업이 기름에 먼지가 달라붙듯이 지바에 달라 붙어 지바는 순수 상태 를 잃고 일종의 물질에 뒤덮이게 된다. 그런 물질에 싸인 지바는 순수함을 잃 고 윤회하게 된다. 업(業)에 싸여 물질이 되어버린 자바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아트만이 마음 또는 의식의 속성과 절연될 수 없고, 이로 인하여 무지라는 불순한 속성으로 인하여 ‘해탈한 영혼’이 될 수 없다는 상키야 학파의 ‘속박된 아트만’과도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업이나 의 식, 감정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청정한 영혼’이라는 이원론적 관념은 우파니샤드와 자이나교 상키야철학의 영혼관에서 궁극의 이상으로 표방한 공통분모에 해당한다.
‘청정한 영혼’과 ‘오염된 영혼’을 구분하고, 업, 물질, 의 식, 감정이 제거된 영혼은 인식 기관을 초월한 영혼으로 간주된다.”24)
24) 정승석, 위의 논문, p.164.
하지만 아트만과 지바는 푸루샤와 마찬가지로 열반경의 ‘아(我)’와 전혀 다른 사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순수(純粹)와 오염(汚染), 청정(淸靜)과 부정 (不淨), 해탈(解脫)과 속박(束縛)의 대립적 이원론과 달리 열반경의 아(我) 와 불(佛)의 의미는 양 극단의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않는 중도(中道)이 자 불이적 일원론의 시각을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순수 정신(영혼)과 물질을 대립시키는 이원론(二元論)적 푸루샤 아트만 개념은 열반경의 ‘아 (我)’와는 다른 사상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경의 ‘아(我)’와 ‘불성(佛性)’의 성격과 관계를 브라마니즘 외에서 유추하여 볼 수 있는 단서는 무엇일까?
이것은 열반경에 나타나는 법신(法身) 개념이 단서가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위의 열반경 주요 논쟁 지 점을 살펴보자.
아(我)는 곧 불의 의미이고 상(常)은 법신의 의미이며, 락(樂)은 열반의의미이고 정(淨)은 법의 의미이다.25)
25) T0374_.12.0377b22 我者即是佛義 常者是法身義 樂者是涅槃義 淨者是法義.
열반경에서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중 상(常)은 곧 법신을 의미한 다.
그렇다면 “불(佛)은 아(我)를 의미한다(佛者是我義)”에서의 불(佛)은 곧 ‘화신(化身)’으로서의 불(佛)이 된다. 이 구조 속에서 살펴 본다면 ‘법’을 의미 하는 정(靜)은 법신의 성격이자 내용이며, ‘열반’을 의미하는 락(樂)은 화신의 성격이자 내용이 된다.
이렇게 상, 락, 아, 정은 법신과 화신에 대한 정의(定 義)이자 성격,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 有佛性 )’이라 하였으니 화신은 석가모니불 한 분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 라, 일체 중생 또한 언제든지 화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재귀대명사로서 의 ‘아’는 ‘일체중생은 화신의 성품을 몸 안에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 내지는 ‘일체중생은 누구나 부처(化身)가 될 수 있다’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법신과 화신의 관계는 ‘법(淨)’과 ‘열반(樂)’의 관계처럼 ‘우주 보편’과 ‘주체의 내재화’라는 구조를 가진다.
이것은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과 개별적 영혼인 아트만의 범아일여(梵我一如)적 관계성과 같다.
단지 범아일여가 물 질과 정신, 현상과 초월의 이분법적 토대에 기초하여 있는 것에 비해 법신과 현신, 그리고 일체중생(我)은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자 불이(不二)적 연기(緣起)의 토대 위에서 설명되는 내용적 차이가 있을 뿐 이다.
결국 “불(佛)은 아(我)를 의미한다(佛者是我義)”는 것은 ‘아트만(有)=불성 (有)=부처(梵-法身)’의 관계에서 규명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我)= 불성(無)=화신불(中道)’의 관계에서 살펴져야 하는 것이다.
Ⅴ. 불성(佛性)과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령(聖靈) 비교
불교사상에서 법신과 화신 등 불신론(佛身論)이 제기된 것은 열반경보 다 훨씬 이전인 초기불교의 시대이다. “초기불교 시대에는 석가의 몸을 생신 (生身)인 색신(色身, Rūpa-kāya)과 법신으로 나누는 2신설이 일반적이다. 증 일아함경 권 44에 의하면
‘나 석가문불(釋迦文佛)은 수명이 무량하다. 왜냐하 면 육신은 비록 소멸되어도 법신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26)라는 기록이 있다.여기서 붓다는 자신을 두 측면인 색신(육신)과 법신으로 나누어 말하 고 있다.
색신은 영원 불변의 진리로서의 법신이 역사적으로 한정되어 나타 난 모습이다.
하지만 대승의 가장 초기 경전에 속하는 반야경계통에서는 색신을 무시하는 법신중심의 이신론(二身論)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 치게 법신을 중시하는 데에서 색신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간략하여 법신 과 색신의 관계가 불분명한 점이 지적된다. 대승 초기 무렵까지 이어지는 이 신론은 2세기경 용수(Nāgārjuna)에 의해 심화 발전된다.
용수 또한 법신 위주 의 이신론(二身論)을 제기하고 있으나 이 때의 법신은 단순히 객관적이고 정 적인 본체가 아니라 주체적이며 동적이다. 또한 용수의 불신관에는 보신이 개념이 될 만한 단서가 나타나고 있어 앞으로 나올 유식학파 삼신불(三身佛) 론의 기초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27)
권미향은 이를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정리 하고 있다.28)
26) T2, 787b27-29, 我釋迦文佛壽命極長. 所以然者. 肉身雖取滅度. 法身存在.
27) 노권용(2000), 삼신불설의 전개와 그 의미 , 한국불교학 제32권, pp.55-57.
28) 권선향(2010), 삼위일체 하느님과 삼신불의 비교 -계시와 삼매 개념을 중심으로 , 불교학 연구 , 27, pp.496-497 참조.
시기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초기 유식학파 보성론․대승기신론 이후
법신 法身 法身 眞身 自性身 自性身
응신 色身(生身) 色身 化身 變化身 應身
보신 色身(生身) 色身 化身 受用身 報身
특히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이 법신과 화신 의 정의(定義)와 성격,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열반경의 불신론(佛身 論)은 법신과 화신이 불성을 매개로 성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불성이 일제중생 각각의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에서 일체중생 또한 화신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대승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화신은 석가모니불 한 분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열려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선불교에서 조사선(祖師禪)이 여래선(如來禪)을 압도하는 등 수행자 개 인이 부처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교리적
기초가 되기도 한다. 특히 열반경의 불신론(佛身論)은 ‘법신-화신’의 이신론이나 유식학파 이후 ‘법신-보신-화신’의 삼신론과 다르게 ‘법신-불성-화신’의 독특한 구 조를 가진다. 또한 이것은 ‘브라흐만-아트만’의 이신론적 범아일여(梵我一 如)와 다르다. 범아일여는 ‘법신-불성(我)’의 구조이기는 하나 이것이 곧 화 신불로 이어지는 열반경의 ‘佛者是我義’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법신- 화신’의 구조는 비슈누의 ‘아바타’와 같이 힌두교에서도 나타나기는 하나, 이 는 법신과 변화신(화신)의 관계와 유사하지 ‘법신-불성(我)’의 구조는 아니 다. 불성을 깨달음을 통하여 일체중생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면 이는 화신이 라고 할 수 있지만, 본래 내재된 불성은 자성(自性:법신)의 수용(受用:보신)이 기 때문이다. 이는 비슈누의 아바타가 현현(顯現)의 의미로서 화신으로 불교 의 화신과 전혀 다른 의미인 것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불교에서의 화신은 아 바타와 다르게 그 자체가 자성(법신)을 수용(보신)한 본질로써 법신-보신- 화신의 일체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특히 불성을 내재한 일체중생이 비슈누 의 아바타와 동등한 깨달음의 화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열반경의 독창 적 사상이다.
열반경의 불신관(佛身觀)이 매우 새로운 것은 ‘법신-불성-화신’의 구 조에서 불성의 성격이 인도철학과 불교사상이 처음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 다.
도리어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중 ‘성령(聖靈)’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
그동안 기독교 신학계와 불교학계는 권선향29), 이찬훈30), 손범서31) 등 삼위일체(三位一體)와 삼신불(三身佛)에 비교연구를 축적해 왔다.
29) 권선향(2010), 위의 논문.
30) 이찬훈, 화엄경의 佛陀觀과 기독교의 神觀 , 大同哲學, 제49집, 2009. 12.
31) 손범서(2017), 불이(不二)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와 정토불교의 대화 , 기독교철학, 제24 호.
하지만 이와 같은 선행연구는 기독교 삼위일체인 성부-성자-성령을 법신-보신 -화신을 단순비교하여 ‘성부-법신’ ‘성령-보신’ ‘성자-화신’으로 분석하거 나32) 기독교 ‘성령’을 불교의 ‘회향’에 비교하고33) 삼위일체와 삼신불사상을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의 관점에서 비교34)하는 등의 연구방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성령’은 삼신불 사상과 단순하게 비교되기보다 열반 경의 ‘불성’과 심도있는 비교가 진행되었을 때, 보다 명확한 의미의 해석이 가능하다.
기독교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초(定礎)에 의 해 이룩된다.
먼저 기독교 신학계의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에 대한 분 석을 참조하여 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간극에 대해 설명할 때, 특별 히 유사함(similitudo)의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35)
(···중략···) 즉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최고의 첫 번째 존재자 (quia ille summe et primitus vivit)이며, 반면에 다른 존재자들은 스스로 존재 나 앎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ex) 그분을 통해서(per) 그분 으로 말미암아(in) 지극히 불완전하고 미소한 유사함만을 가질 뿐이다. (···중략···)
성자하느님(예수 - 필자 주)은 하느님의 ‘모상자체’요 ‘유사함 자체’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인간이 창조될 때 ‘모상과 유사함 (imago et similitudo Dei)’으로서 창조되었다고 기술하지 않고, ‘모상과 유사 함을 따라서 (ad imaginem et similitudinem)’
창조되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 일 필요가 있다.
즉 성자 하느님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이고,61) 우리 인간은 그 모상과 그 유사함을 본떠서 창조되었다.36)
유사함 의 개념은, 세상 안에서의 인간 존재가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 으면서, 참된 존재인 하느님을 향해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인간의 운명 혹은 인생의 목적으로 여겨졌다.
또한 이러한 여정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amor) 에 의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 진다.37)
32) 권선향, 위의 논문 Ⅳ장.
33) 손범서, 위의 논문 5장.
34) 이찬훈, 위의 논문.
35) 83명제 자유토론 De diversis quaestionibus octoginta tribus (=De div. qq.51,2), CCL 44/
36) 삼위일체론 De trinitate (=De trin.), CCL 50-50/A 7,6,12; H. Crouzel, immagine: DPAC 2533- 2543.
37) 정승익, 창조주 하느님, 삼위일체 하느님 - 창세기 1,1-2; 1,26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 석을 중심으로 - (가톨릭신학, 22집, 2013. pp.30-3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 매개하는 것에 비하여 인간은 다시 이 모상의 유사함을 본 떠 창조되었다고 아우구스티누 스는 말한다. 하지만 이 ‘모상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는 그 불완전성에 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amor)으로 하나님을 향해 점진적으로 접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정승익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글 안에는 이 ‘모상과 유사함’과 관 련되어진 개념들은 모두 삼위일체 하느님 중 성자하느님에게로 집중되어 있 다고 한다. 하지만 개념들 중에는, ‘완성(perfectio)’과 ‘복원(reformatio)’ 등의 의미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개념들이 모든 피조물을 불완전한 상태로부 터 완전함으로 이끌어 내는 성령하느님의 특성과 역할로 확장되어있다고 분 석한다.38) 즉, 유사함의 단계가 최고의 완성을 이루어 모상에 가장 완전한 방식으 로 참여하게 되도록, 성령은 무한한 자비의 은총과 사랑으로 이끌어 준다. 그분의 이러한 고유성 때문에, 피조물 곁에 머물러 한시도 그 사랑의 마음 이 떠나지 못하고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협조자(Paraclitus)’라 부르기도 한 다. 또한 성령하느님은, 모든 만물 특히 인간을 완성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개입하기 때문에, 인간을 완성시키는 ‘성화자(Sanctificator)’이기도 하다.
따 라서 성령은, 인간이 유사함의 완전한 단계에 도달하여 하느님처럼 변화하 게 만드는 하느님의 사랑(Caritas Dei) 그 자체이며, 무상으로 주어지기에 ‘선 물(Donum)’ 그 자체이기도 하다.따라서 ‘모상’이 성자하느님의 흔적이라면, ‘유사함’은 성령하느님의 흔적과도 관련되어진 개념이다.39)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성령이 가지는 ‘완성(perfectio)’과 ‘복원 (reformatio)’의 의미이다. 절대자에 의한 구원의 타력신앙인 기독교에서 이 성령은 인간 존재 밖의 구원적 존재이다.
하지만 불교는 스스로 깨달음을 추 구하는 자력의 해탈종교이다.
‘완성(perfectio)’과 ‘복원(reformatio)’ 또한 외부 절대자의 타력이 아닌 내적 자력성을 가진다.
일체중생의 몸 안에는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皆有佛性。在於身中)40)는 대반니원경의 말은 ‘완성 (perfectio)’과 ‘복원(reformatio)’성의 내적 자력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주체 는 바로 ‘불성(佛性)’임을 명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38) 정승익, 위의 논문. p.31.
39) 정승익, 위의 논문. p.32.
40) T0376_.12.0881b25.
다시 이것은 성령을 의미하는 또 다른 용어인 ‘협조자(Paraclitus)’와 성화자 (Sanctificator)의 의미에서도 타력신앙과 자력종교의 차이가 있을 뿐, 성령은 곧 불성과 같은 의미임을 알아차리게 만든다. 타력신앙에서 ‘협조자(Paraclitus)는 ’피조물 곁에 머물러 한시도 그 사랑의 마음이 떠나지 못하고 도와주는 외부 존재지만, 자력 종교에서는 내 안의 존 재하는 신의 사랑에 비견될 만한 완전성을 의미한다. 성화자(Sanctificator)의 의미 또한 기독교에서는 세상만물을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타력적 존재이지 만, 자력종교인 불교에서는 내 안에 존재하는 완성과 완전성을 의미한다. 이 렇게 불성과 성령은 자력과 타력의 의미에서 달라질 뿐, 그 완전성과 완전성 은 동일하다. 삼위일체의 ‘성령’을 ‘보신’이 아닌 ‘불성’과 비교할 수 있다면, 선행연구에 나타난 ‘성부-법신’ ‘성령-보신’ ‘성자-화신’의 단순 비교 구도는 재검토 되 어져야 한다. 특히 이것은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1절의 내용에서도 명백하 게 나타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신이 셨다. 그분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 으며,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Logos)로써 말(言語)·논리
(論理)·이성(理性)의 뜻이지만 기독교 신학에서는 만물을 지배·구성하는 질서·원리·법칙의 의 미를 가진다.
열반경의 상(常), 락(樂), 아(我), 정(淨)에 비교한다면 ‘常者是 法身義’에 따라 상(常)의 ‘법신’이나 淨者是法義의 정(淨)의 ‘법’과 비교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적에서 로고스는 태초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다시 삼 위일체의 두 번째인 성자(聖子) 예수의 그리스도의 이름 혹은 칭호이다. 예 수 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의 현세적 화신이다. 이 구조 속에서 태초의 ‘말 씀’과 함께 하였던 인격적 하나님은 ‘보신(報身)’이 된다. 불교의 삼신론에서도 보신은 한량없는 노력과 정진의 결과 깨달음에 이른 부처의 영원한 몸으로, 진리를 깨닫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인격적 존재이다.차이가 있다면 성령이다.
삼위일체에서 성령은 말씀(법신), 하나님(보신) 예수 그리스도(화신)과 일체로써 피조물을 불완전한 상태로부터 완전함으로 이끌어 내는 협조자(Paraclitus)이자 성화자(Sanctificator)이다.하지만 불교의 삼신론과 열반경에서는 ‘법신’으로부터 ‘화신불’과 ‘일체중생의 몸 안(在於 身中)’에 이미 ‘불성’으로 평등하게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중생 각각의 자신이 곧 화신불’이라는 의미의 ‘我者即是佛義’이 성립되는 것이다.
성령 또는 불성의 차등 양상은 타력 구원신앙으로서의 기독교와 자력 해 탈 종교로서의 불교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갈라놓게 한다.
현세의 피조물은 반드시 성자 예수의 성령을 받았을 때 구원이 가능해지지만, 불교에서는 이 미 화신불과 동등한 불성을 일체중생 또한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화신불의 구원이 아닌, 스스로의 수행을 통한 해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성과 성령의 소통성은 다시, 불성을 영성으로 규정한 마쯔모 토의 분석에 어느정도 수긍의 여지를 줄 수 있다.
또한 이 삼위일체의 성령은 아트만과 같이 순수 정신이자 영원불멸의 절대성을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아트만은 영성 또는 성령의 의미 또한 가질 수 있다. 다시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령이 로고스인 ‘말씀’과 성자 예수,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일체된 것과 달리 범아일여의 아트만은 불성과 같이 피조물에 내재된 영혼이라는 측면에서 성 령과 다른 존재양상을가진다. 이것은 불성이 화신불과 일체중생 모두에게 평등하게 편재(遍在)된 성품이라는 것과 동일하다.
그럼에도 다시 불성은 아 트만과 달리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자 정(正)과 반 (反)의 불이(不二)적
연기(緣起)적 존재이다. 이렇게 불성과 아트만, 성령은 ‘영성’이라는 성격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존재의 절대성과 연기성(緣起性), 비 물질성과 물질과의 상의 상대성, 평등성과 배타성이라는 각각의 다른 양상과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Ⅵ. 결론
살펴본 바와 같이 열반경의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중 ‘아’는 아트 만을 의미하는 것이며, 불성은 곧 아트만이며 영혼을 의미하는 ‘영성’이라고 분석한 마쯔모토 시로의 시각은 다양한 각도에서 동의되기 어렵다.
비물질 적이며 순수영혼이자 정신으로서의 아트만과 달리 열반경 내에서 ‘아(我)’ 는 오온(五蘊)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만,
다시 오온을 떠나서도 존재하지 않 는다.업(業)과 행(行)이 ‘아’가 아니지만 다시, 업과 행을 떠난 것도 ‘아’가 아 닌, 양 극단의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자 정(正)과 반 (反)의 불이(不二)적 연기(緣起) 관계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트만은 초기 베다 문헌에서는 주로 재귀대명사(자기 자신)로 나타 난다. 또한 열반경에도 ‘謂我身斷滅’ ‘能知我身中’
‘聞我爲衆生’ ‘能知我身有 微妙法身種’ 등 아(我)가 재귀대명사로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용례는 무수히 많다.
이는 용례에 따라 아트만이라 하더라도 순수영혼의 의미가 아닌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열반경 내에 서의 ‘아(我)’가 순수영혼으로서의 아트만으로 주장하는 것은 수용되기 어렵 다.
뿐만 아니라, 열반경의 편찬 지역은 인더스강 이북 간다라지역과 페르시 아 지역이다.
이곳은 브라만교의 문화권이 아닌, 다양한 종교가 경쟁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트만에 대한 반대를 자기정체성 으로 성장된 불교가 초기불교의 핵심이론인 무아론에 훼손을 가하면서까지
브라마니즘의 아트만을 수용하였다는 주장은 사실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마쯔모토가 말하는 영성(靈性) 개념을 인도철학에서 찾아본다면 크게 아 트만(Ātman), 푸루샤(Purusha), 지바(jīva)로 압축된다.
하지만 아트만과 지바, 푸루샤는 열반경의 ‘아(我)’와 전혀 다른 사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순수(純 粹)와 오염(汚染), 청정(淸靜)과 부정(不淨), 해탈(解脫)과 속박(束縛)의 대립 적 이원론과 달리 열반경의 아(我)와
불(佛)의 의미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양 극단의 유(有)나 무(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자 불이적 일 원론의 시각을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순수 정신(영혼)과 물질을 대립 시키는 이원론(二元論)적 푸루샤 아트만 지바 개념은 열반경의 ‘아(我)’와 는 다른 사상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열반경의 ‘불성’이 가지는 ‘영성’적 측면을 고찰한다면,
인도의 종교 사상 이 아닌,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령’과 비교하는 것이 보다 가까운 접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절대자에 의한 구원의 타력신앙인 기독교에서 이 성령 은 인간 존재 밖의 구원적 존재이다.
하지만 불교는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 는 자력의 해탈종교이다.
성령이 가지는 피조물의 ‘완성(perfectio)’과 ‘복원 (reformatio)’ 은 절대자의 구원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자력 해탈 종교인 불교에서 일체중생은 불성을 ‘완성(perfectio)’과 ‘복원(reformatio)’의 내적 능력으로 이미 자려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따라서 불성이 영성 적 성격을 가진다 하더라도 타력 구원종교인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령과는 그 성격과 양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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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불교문화 56집(2023년 4월 30일)
<Abstract>
Buddhahood, Spirituality, and the Holy Spirit in the Mahāparinirvāna-sūtra 41)
Kwon, Gi-hyun(Uiduk University)
Ego in Mahāparinirvāna-sūtra is, inlike Ātman, which is immaterial, pure soul and spirit, the middle way, neither yin nor yang, and the nondualistic causal relationship of thesis and antithesis. In Indian philosophy, the concept of spirituality is broadly summarized as Ātman, Purusha, and Jīva. However, Ātman, Jīva, and Purusha are structured as oppositional dualisms of purity and pollution, cleanliness and uncleanliness, liberation and bondage. However, Buddhahood in Mahāparinirvāna-sūtra, like the word ‘ego’, clearly represents the middle way and a non-dualistic monism. If we consider the spiritual aspect of Buddhahood in Mahāparinirvāna-sūtra, a closer parallel can be found not in Indian religious thought, but in the Holy Spirit of the Christian Trinity. In Christianity, the Holy Spirit is a saving force outside of human existence. Buddhism, on the other hand, is a religion of self-realization, which seeks realization by oneself. The Holy Spirit's perfectio and reformatio of creation is only possible through salvation by the absolute being. On the other hand, in Buddhism, which is a self-reliant religion, all living beings already possess Buddhahood as an internal power of perfectio and reformatio. Therefore, even though Buddhahood has a spiritual nature, it is different in nature and aspect from the Holy Spirit of the Christian Trinity, which is a religion of salvation relying upon others.
Key Words: Mahāparinirvāna-sūtra, Buddhahood, Ātman, Holy Spirit, Dharmakaya, Sambhogakaya, Nirmanakaya, Three-bodied Buddha, Trinity ㆍ
논문투고일: 2023.3.18. ㆍ심사완료일: 2023.4.20. ㆍ게재결정일: 2023.4.22
동아시아불교문화 56집(2023년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