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봄이 절정일 때 안면도로 떠나다
5월은 여행을 떠나기 좋은 시간이다. 5월에 있는 휴일인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은 업무에 지친 사람들이 먼 곳으로 떠나 휴가를 갈 수 있게 만든다. 나 또한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국내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곳을 물색했다. 긴 휴가 기간 동안 고향인 창원에도 내려갈 생각으로 일정을 짰다. 내려가는 길 중간에 들를 곳을 찾다 보니 5월의 태안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면도의 꽃지 해변에 있는 코리아 플라워 파크는 봄에 튤립이 만개하는 장관을 연출하기 때문이었다.
국립공원 이야기 54 - 안면도
안면도는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섬으로, 한국에서 7번째로 큰 섬 (면적 113.5㎢)이다. 태안반도와 함께 태안해안 국립공원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거대한 섬이다. 동쪽으로는 천수만이 있고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한다. 섬의 북쪽은 안면대교와 안면 연육교로 태안반도와, 섬의 남쪽은 최근에 개통한 원산안면대교와 보령 해저터널로 원산도와 보령으로 연결된다.
안면도가 현재는 섬이지만 원래는 섬이 아닌 태안반도 일부분이었다. 후삼국시대가 끝나고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삼남지방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세곡은 개경까지 배로 운반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하지만 조운선이 태안반도 서쪽에서 자주 침몰하자 고려 인종은 태안반도의 최단 횡단 지점을 따라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다. 태안반도 전체를 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으나 기술 부족으로 결국 실패하고 현재 굴포운하 유적으로 남아있다. 육상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고려 왕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사정이 허락될 때마다 운하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조선의 태조였던 이성계도 고려 시대에 한 번, 조선 시대에 한 번 시도했다. 이후 조선 왕들도 포기하지 않고 고려-조선을 통틀어 11번이나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태안 안흥항은 전국 4대 험수로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안흥 앞바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아까운 세곡 또한 물속에 잠겼다.
계속된 실패 속에 1638년 충청 관할사였던 김육이 굴포운하를 포기하고 옆 길로 차선책을 택했다. 현재 안면도의 북쪽 끝인 천수만과 황해 사잇길에 판목을 덧대 운하를 만든 것이다. 원래 굴포운하가 아니면 안흥항을 피할 수 없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인조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이때의 완공으로 안면도는 전국에서 6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이후 현대에 들어서 영종도가 지속된 간척 사업으로 커지면서 안면도는 7위가 되었다.) 한자 이름인 안면도 (安眠島)도 이제 조운선이 침몰할 일이 없으니 '편하게 잘 수 있다 (安眠)'는 뜻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면항을 피하는 항로는 없었으므로 1669년 조선 현종 때도 굴포운하 건설을 시도했다 실패하였다. 만약 굴포운하가 성공했다면 태안군 전체가 섬이 되었을 것이고, 거제도를 제치고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 되었을 것이다. (거제도 378㎢, 태안반도 516㎢)
튤립으로 가득 찬 코리아 플라워 파크
앞선 두 번의 태안해안 국립공원 여행에서 안면도의 꽃지 해변은 항상 일정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태안해안 국립공원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해변인 꽃지 해변은 여러 번 방문해도 아름다웠다. 다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해변 뒤쪽으로 리조트가 들어서고 개발이 되었기 때문에 한적한 옛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 중 하나가 코리아 플라워 파크였다. 꽃지 해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그 덕을 보기 위해 개발된 것인지 몰라도 국립공원 뒤편 거대한 부지에 왜 관광지가 들어서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안면도의 아름다운 자연이 코리아 플라워 파크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막장 개발 상황을 보면 코리아 플라워 파크는 국립공원과 잘 어울리며 자연과 공생하는 개발 사례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하다. 제주도의 해안 곳곳에 거대한 리조트와 호텔이 들어서고 있으며 제주도에서 조용한 해변을 꼽으라고 하면 찾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코리안 플라워 파크도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으긴 하지만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꽃과 식물로 뒤덮인 곳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만약 코리아 플라워 파크가 없었다면 '분명히' 거대한 리조트가 들어섰을 것이다.
꽃지 해변에 두 번이나 들렀기 때문에 다시 갈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코리아 플라워 파크에 때마침 튤립 축제가 열리고 있어 다시 한번 꽃지 해변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번엔 수도권에서 차를 타고 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이라 가는 것 또한 수월했다. 코리아 플라워 파크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튤립을 보기 위해 안면도로 찾아왔다. 주차장 부지가 엄청 컸지만 주차할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코리아 플라워 파크는 계절마다 다른 꽃을 심어 매번 색다른 매력을 뽐낸다. 봄에는 공원 전체가 튤립으로 뒤덮인 장관을 연출한다. 여태까지 살면서 튤립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형형색색의 튤립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튤립이 어찌나 다양한지 종류를 세는 것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원 전체를 돌면서 튤립을 사진으로 담으니 행복감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도시의 삭막한 일상에서 벗어나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을 감상하며 행복을 느끼는 게 여행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전통 방식으로 우럭을 잡다, 청포대 독살 체험
코리아 플라워 파크에서 튤립을 감상한 뒤 안면도의 또 다른 해변인 청포대 해변으로 향했다. 청포대 해변 또한 꽃지 해변만큼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해변이다. 청포대 뒤쪽에 있는 소나무 숲은 캠핑을 즐기기에도 좋다. 청포대의 또 다른 특색을 꼽자면 전통 어업 방식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해변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배를 타고 그물로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아 올리지만 조선 시대 이전에는 기술이 부족해 앞바다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 우리 조상들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의 특성을 이용해 어업의 특수한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이 청포대에 남아있는 '독살'로 해안에 돌을 쌓아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돌담 안에 갇히게 만들어 잡는 전통적인 어업 방식이다. 주로 숭어, 전어, 새우, 멸치 등의 작은 물고기를 잡으나 유지 보수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어 현재는 태안과 제주 일부에 100여 개가 남아있다.
쉽게 보기 힘든 독살이 태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독살에서 물고기를 잡는 체험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청포대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주도로 독살 체험이 진행되고 있으며, 썰물 시간대에 맞춰 주민들이 우럭을 독살 안에 풀어놓는다. 밀물에도 자연적으로 들어오는 물고기는 극히 일부분이며 우럭을 제외한 다른 물고기는 날쌔기 때문에 잡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우럭은 위험을 느끼면 도망치는 게 아니라 돌 틈 사이로 숨는 게 습성이다. 언뜻 생각하면 우럭을 잡기 쉬워 보이지만 우럭의 검은색이 돌과 구분하기 힘들어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독살 체험이 시작되자 참여한 사람들 여럿이 독살 안을 샅샅이 뒤진다. 힘이 빠진 우럭은 돌담 근처에도 못 가고 바닥 돌 틈 사이로 숨으려 애쓰고 있었다. 우럭 한 마리를 잡고 난 뒤 팔팔한 우럭을 찾기 위해 돌담을 뒤졌다. 눈으로 구분하기도 쉽지 않아 돌을 손으로 만지면서 우럭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체험이 끝나기 직전에 물컹물컹한 게 잡혀 확인하니 우럭 한 마리가 숨어있는 걸 발견했다. 결국 최종 성적은 우럭 두 마리. 본전은 건졌다는 생각에 신이 나 회를 떠 저녁에 먹기로 했다.
서해 최고의 일몰 중 하나인 만리포로 가다
안면도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고 숙소가 위치한 만리포로 향했다. 굳이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 건 만리포의 일몰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일몰 명소인 꽃지해변의 일몰은 아직 보지도 못했지만 왠지 만리포의 일몰이 더 보고 싶어 숙소를 만리포 해변에 잡았다. 다행히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만리포의 일몰은 지금까지 본 다른 일몰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