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석사 浮石寺
많은 이들이 칭찬해 마지 않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의 배흘림기둥이나 안양루(安養樓) 너머 펼쳐진 소백산맥의 장쾌한 모습이 가끔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는 결코 위대한 문화재에 대한 가치나 화려한 수식(修飾) 때문이 아니다. 사실 부석사(浮石寺)에 관한 여행기를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은 글과 사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호사가의 구수한 입담과 고건축가들의 예리한 분석들, 따라서 그 선험적(先驗的) 지식을 버리고 내 생각을 싣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다.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편견인지도 헷갈리는 경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온전한 나의 시각(視覺)인지조차도 자신 없는 상태, 그것은 바로 대상이 부석사(浮石寺)이기 때문이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인 676년에,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이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唐)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왕에게 이를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道理)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부석사를 창건하였다.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이다. 의상(義湘)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의상(義湘)은 정치적 승려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소위 '어용 승려'는 아니었다.
부석사(浮石寺)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장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인 676년에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華嚴)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創建)에 얽힌 의상(義湘)과 선묘(善妙) 여인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 후 고려 현종 7년인 1016년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重修)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부석사 浮石寺
해동화엄종찰 부석사 .. 경북영주시 부석면 양백지간(兩白之間), 즉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위치한 부석사(浮石寺), 절 이름이 그대로 지명(地名)이 되었을 만큼 부석사는 유명하다. 우리나라 곳곳에 '절골'이니 '탑골'이니 하는 마을 이름들이 전한다. 그러나 부석면(浮石面)처럼 면 전체의 이름이 절 이름을 따른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부석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부석사를 찾아 길을 나선다. 사무치는 그리움때문일까. 가지 않은 자는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고 싶고, 가 본 자는 가보았기에 그리운 곳, 부석사.... 1750년에 편찬된 순흥지(順興誌) 부석사조(浮石寺條)의 기록에 의하면 부석사의 가람을 일일이 열거한 후 ' 이는 귀신의 역사(役事)이요, 하늘의 솜씨라 할만큼 장관을 이루고 있다 '고 하고 있으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에 의하면, ' 취원루(聚遠樓)는 굉걸(宏傑)하고 아득히 높아 천지(天地)의 한복판에 솟은 듯 그 기세와 용장함이 경상도(慶尙道)를 누르는 듯하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장대하고 멋스러운 부석사가 아니던가 !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시대 문무왕(文武王) 16년인 676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의상(義湘)은 671년 당(唐)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태백산에서 화엄학(華嚴學)을 강의하였다. 이후 676년 2월 '문무왕(文武王)'의 명에 따라 부석사를 창건하여 본격적으로 신라 화엄(華嚴)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신라(新羅) 통일기의 사상(思想)을 주도한 의상(義湘)은 새롭게 화엄학을 펼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의상(義湘)과 그 후예들은 신라 각지에 화엄도량(華嚴道場)을 건립하였는데, 후대 역사가들은 그들 가운데 여러 곳을 추려서 ' 화엄십찰 (華嚴十刹) '이라고 불렀다. 부석사(浮石寺)는 화엄십찰 가운데 제 1의 가람이다.
유홍준의 5대 명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兪弘濬)'교수는 우리나라의 5대 명찰(名刹)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다.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을 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고, 한여름 온 식구가 김 매러 간 사이에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을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늦가을 해질녁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리도 없건만은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고, 한겨울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그리고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의 부석사(浮石寺)이다. 부석사(浮石寺)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壯快)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整然)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浮石寺)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부를 때에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 낼 수 있다.
의상(義湘)이 이 곳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려고 하자 이곳에 터를 잡고 있던 다른 신앙(信仰)의 무리들이 격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중국에 유학할 때부터 의상(義湘)을 흠모하였던 선묘낭자(善妙娘子)의 화신(化身)이 나타나 절을 세울 수 있게 도왔다는 유명한 ' 선묘설화 (善妙說話) '가 전하고 있다. 부석사의 이름은 이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부석사는 화엄종찰(華嚴宗刹)답게 경사지(傾斜地)에 여러 단(段)의 대석단(大石壇)을 쌓아 계단식으로 터를 마련하여, 폭은 좁으나 깊이감이 느껴지도록 가람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부석사는 입구부터 가장 뒤쪽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이르는 진입축(進入軸)이 구성축이 되고, 진입축 선상에 천왕문과 범종각, 안양루가 위치하여 가람의 영역을 3단계로 나누고 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천왕문(天王門)과 범종각(梵鐘閣) 사이 대석단(大石壇) 위에는 회전문(回轉門)이 있었고, 범종각을 지나 안양루(安養樓) 아래에는 또 하나의 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대석단들은 천왕문부터 무량수전까지는 10단, 회전문부터는 9단이 된다. 이렇듯 특이한 석축(石築)의 구성이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 10지도론(십지도론) '을 표상하였다는 주장과 정토신앙(淨土信仰)에서 말하는 극락(極樂)의 ' 3품3생론(三品三生論) '의 상징이라는 교리적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더욱 큰 의문은' 천왕문에서 사라진 법당까지 잇는 축(軸) '과 ' 안양루에서 무량수전을 잇는 축(軸) '이 서로 엇갈려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휘어진 축선(軸線)의 구성때문에 많은 추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우선 천왕문을 들어서서 회전문과 범종각을 거쳐 사라진 법당까지 하나의 과정이 일단락되고, 다시 그 뒤편 위쪽으로 다른 축(軸)을 가진 안양루를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두 개의 가람이 연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가람이 축은 멀리 도솔봉과 가까이 안산에 맞추어져 있다.
부석사 창건 이후 의상대사는 40일 동안 법회를 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로써 부석사는 신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성장하였고, 의상대사를 다른 이름으로 부석존자(浮石尊者)라 일컫고, 그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였으니 부석사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의상대사의 전기(傳記)와 부석사 창건설화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전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 元曉와 義湘
의상(義湘)의 속성(俗姓)은 박씨이다.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주)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성년이 되어 출가(出家)하여 선천에 노닐다가 불도(佛道)에 들었으며, 성품은 매우 천연덕스러웠다. 일찍이 법(法)을 구하러 원효(元曉)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국경에 이르러 폭풍이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 길가의 토굴(土窟) 속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은 옛 무덤의 해골 사이에 누워 있었다. 하늘은 비로 자욱하고 땅은 질어 이번에는 벽돌 굽는 곳에서 밤을 보내는데, 채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들이 괴변을 부렸다.
원효(元曉)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 어젯밤에는 토굴 아닌 무덤에서 잠을 자도 편안하였는데, 오늘밤에는 초저녁부터 도깨비굴에 있다고 생각하니 탈이 많구나. 마음 먹기에 따라 가지가지의 일이 생기는구나 (일체유심조 .. 一切唯心造). 차별하는 생각이 없어지니 토굴(土窟)이건 무덤이건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 것이라. 마음 밖에 따로 법이없는 것을 무엇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원효(元效)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지만, 의상(義湘)은 굳은 각오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하며, 당(唐)나라로 향하는 상선(商船)을 탔다. 이후의 이야기는 아래 '선묘각(善妙閣)'에서 이어간다.
해골바가지 사건 .. 다시 보기
원효(元曉)는 617년생이다. 신라(新羅)가 바야흐로 삼국(三國)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무렵이다. 의상(義湘)은 625년생이니, 원효보다 여덟 살이 아래다. 귀족 출신이라고 하지만 그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두 사람이 사상적 행태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크게 관련된다. 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기는 신라의 통일전쟁을 전후한다. 비록 승리한 전쟁이었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귀족들은 귀족대로, 민중은 민중대로 그들의 삶에 짊어져야 할 고통은 매우 컸다. 이 고통의 무게를 덜어줄 종교인의 책임이 원효와 의상에게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분명히 달라 보이는 점 또한 있다.
의상(義湘)이 두 번에 걸쳐 중국 유학을 시도하였고, 결국에 종남산의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嚴)을 만나 득도한 사실은 명확히 전해 온다. 이때 원효(元曉)와 동행하여 중국 땅 변방에서 경험한 '해골바가지' 사건은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지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부석사의 의상 비문을 따르자면, 의상(義湘)이 당나라에 들어가려 시도한 연도는 650년과 661년이다. 650년에 원효(元曉)와 함께 각자 고구려(高句麗)에 이르렀지만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는 것인데, '삼국유사'에서는 653년 두 사람이 고구려를 지나다가 첩자(諜者)로 오인받아 붙잡혔다 돌아왔고, 비문에서 말한 '어려움'의 구체적인 정황을 전해준다. 3년의 차이가 나지만 같은 사실을 말한 것이다.
해골바가지 사건이 성립하자면 의상(義湘)과 원효(元曉)가 동행하여야 한다. 첫번 째 입당(入唐) 때, 두 사람이 동행한 것은 어느 자료나 같다. 그 자료에는 모두 그들이 붙잡힌 곳을 고구려(高句麗) 땅이라고 전한다. 중국에는 발도 붙여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무슨 해골바가지 사건이 있었겠는가. 일단 첫번 째 입당 시도는 제외되어야 한다. 그런데 두번 째 입당(入唐) 때에는 대부분의 자료에 원효(元曉)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이때 원효의 나이 벌써 마 넷이다.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파계(破戒)'이후이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할수는 없지만, 그 나이의 원효가 동행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해골바가지 사건'은 다분히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짙어진다.
사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3대 고승전(高僧傳)의 하나인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상(義湘) 전기(傳記)에 나온다. 의상(義湘)의 입당(入唐)을 669년이라고 한 이 전기에서 의상(義湘)의 결의에 찬 구도심(求道心)을 보여주기 위하여 나오는 이야기이다. 흔히 입당(入唐)을 포기하고 깨끗하게 돌아선 원효(元曉)에게 눈길이 가기 쉬우나,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의상(義湘)이다.그런데 여기에서는 의상(義湘)이 나이 약관이었을 때 일이라고 하면서 원효와의 이러한 체험을 소개하지만, 고구려에서 첩자로 잡혀 돌려보내진 일은 언급하지 않아, 두 사건 사이의 전후관계를 맞추어 보기는 어렵다. '의상의 나이 약관'이라는 표현대로라면 그가 스물 다섯살인 65년의 첫번 째 입당(入唐) 때이어야 한다. 그러나 비문이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고구려에서 원효와 함께 붙잡혀 있다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리저리 맞춰보아도 해골바가지 사건에는 누수(漏水)가 심하다. 치밀하지 않고 물이 줄줄 샌다. 다만 '송고승전'도 의상이 두번 이상 입당을 시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는 하다.
화엄종 華嚴宗
화엄종(華嚴宗)은 의상(義湘)에 의하여 신라(新羅)에 전래된 후, 신라 귀족(貴族)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것은 화엄종이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 일즉다 다즉일 (一卽多 多卽一) '의 원융(圓融) 사상에 근본을 둔 것으로, 개개의 사물 속에 진리(眞理)가 내재(內在)되어 있다는 현실 중시의 사상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화엄종의 신라 귀족들과의 연결은 점차 이론(理論)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관념적(觀念的)인 성격이 강해지고, 실천적(實踐的)인 면이 약화되는 경향을 초래하게 된다.
또 화엄종은 그 교리(敎理)의 성격상 정치적으로 지방분권적(地方分權的)이라기 보다는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어서, 신라 중대 전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의상(義湘)의 '화엄일승법계도'에 ' 일미진중함십방 (一微塵中含十方) '이라는 구절은 우주(宇宙)와 다양한 현상을 결국 하나로 귀결시킴으로서, 전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뒷받침하기에 적절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 후, 신라 하대(下代)에 이르러, 지방 호족(豪族) 및 육두품 세력의 대두와 함께 새로이 선종(禪宗)이 유행함에 따라 점차 세력을 상실실하여 갔다.
부석사의 보물
부석사의 석단(石壇), 당간지주(幢竿支柱), 석등(石燈) 그리고 3층석탑은 신라(新羅) 시대의 유물들이고,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은 고려(高麗) 시대의 건축물들이다. 이외에 부석사에는 국보가 5점, 보물이 5점 등 많은 유물들이 소재하고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이 국보 제17호, 무량수전이 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이 국보 제19호,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이 국보 제45호, 조사당 벽화(壁畵)가 국보 제 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층석탑이 보물 제249호, 당간지주가 보물 제255호, 고려목판이 보물 제735호, 오불회괘불탱이 보물 제 1562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보물 제1636호로 지정되어 있다.
택리지(擇里誌)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은 ' 그 산(山)들이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으로 되었다 '라고 하였는데, 옛말에 ' 천하의 명산(名山)을 중(僧)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 '는 말과 통한다. 우리나라에는 불교(佛敎)만 있고, 도교(道敎)는 없으므로 무릇 이 열두 곳 명산을 모두 절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이한 흔적과 멋진 경치가 어우러진 유명한 절로 태백산고 소백산 사이의 부석사(浮石寺)를 꼽을 수 있는데, 부석사는 신라(新羅) 때 절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가로질러서 서 있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놓은 듯 보인다. 언뜻 보면 위아래가 서로 붙은 듯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새끼줄으 집어넣으면 거침없이 드나들어서 비로소 떠 있는 돌인 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절은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을 어었는데, 돌이 뜨는 이치는 이해할 수 없다.
이중환(李重煥)이 위와 같이 설명한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자락에 자리한 절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입구에 들어서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대석단(大石壇)이나 무량수전, 조사당(祖師堂), 아미타불 등 문화유산들도 그렇지만, 자연(自然)과 어우러진 부석사의 건축물들을 바라보면 인간(人間)과 자연(自然)의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체감할 수 있다. 미술학자인 최순우(崔淳雨)는 ' 부석사 무량수전 '이라는 글에서 ' 무량수전 앞 안양문(安養門) 앞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라고 말하였다.
부석사의 풍수지리적 조건
의상(義湘)이 전국의 산천(山川)을 두루 편력(遍歷)한 끝에, ' 고구려(高句麗)의 먼지나 백제(百濟)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馬)이나 소(牛)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神靈)하고 산(山)이 수려하니 법륜(法輪)을 굴릴 만한 곳이다 "고 하면서 자리를 잡은 이곳의 입지조건은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줄기가 태백산(太白山)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西南)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구룡산(九龍山), 옥석산(玉石山), 선달산(先達山)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小白山)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國望峰),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고 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鳳凰山)은 태백산에서 다시 서남(西南)쪽으로 뻗어 나온 새로운 한 줄기가 선달산(先達山)을 거쳐 봉황산(鳳凰山)자락이 되기 때문에 봉황산 서쪽으로는 형제봉에서 죽령(竹嶺)으로 달려가는 백두대간이, 동쪽으로는 옥적산(玉笛山), 문수산, 천등산 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학가산(鶴駕山)의 맥이 휘어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揖)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는 마치 ' 봉황이 알을 품은 듯 하다 '는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이라 하여 뛰어난 길지(吉地)가 된다.
조영 원리 造營 原理
소백산 지맥(支脈)의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수만 평(坪)에 이르는 넓은 대지 위에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鐘樓), 안양루와 무량수전만이 자리하고 있고, 조사당(祖師堂)과 응진전은 뒷산 솦 속에 숨겨져 있어, 다른 사찰 같으면 휑하니 스산한 가람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절에 올라가 보면 가람(伽藍) 전체가 꽉 차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는 석단(石壇)의 위치와 높이를 철저하게 원래의 지형(地形)에 맞추어 쌓고 다듬어 리드미칼하게 꾸며 놓은 거대한 석단(石壇)이 만들어내는 웅장(雄壯)하고 특별한 외부 공간 때문이다. 그 품에 안긴 가람은 공간구조상 입구에서 천왕문까지를 도입 공간인 '기(起)'라 하고, 대석단(大石壇) 위 범종루까지를 전개의 공간, 즉 '승(承)'이라 하며, 또 여기서 축(軸)이 꺾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安養門)까지가 '전(轉)'이요,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적인 '결(結)'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리하여 가람의 구조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화엄경(華嚴經)이나 화엄종찰(華嚴宗刹)의 형상을 띠고 있는 "화(華)'가 연상되고, 올라갈수록 지세(地勢)가 넓어져서 마치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석사는 지형(地形)에 맞게 건물을 지어내는 일반적인 접근과는 달리, 경사(傾斜)진 산(山)에 실현 가능한 건축미를 구상하고, 동시에 그 건축에 맞게끔 대지를 조성하는 방법, 즉 처음부터 건물과 대지(垈地)가 동시에 계획되어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높은 완성미(完成美)를 갖게 되는데, 이렇게 전체를 헤아리는 안목은 더불어 누릴 수 있는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까지 모두 포용하여 인간의 의지(意志)를 자연(自然)으로까지 확대시켰다.
건축사학자인 '김봉렬' 교수는 이곳의 조성원리를 동양적 사유(思惟)의 기본 개념인 체(體), 용(用), 상(相)의 시각에서 분석하였는데, 첫째, 대지 전체가 여러 단(壇)의 석단(石壇)으로 나뉘어 구축되었다는 점, 둘째, 범종각까지의 구성 축(軸)과 무량수전의 축(軸)이 분리(分離), 굴절(屈折)되었다는 점, 셋째, 무량수전을 비롯한 여러 구성요소에서 치밀한 시각적 조성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며, 이 특징적 기법들은 각각 교리적(敎理的)인 이유와 지형적(地形的) 해석, 그리고 부석사 자체의 건축적 개성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적 교리(敎理)의 건축적 구현
입구에서부터 깊숙한 곳에 부석사의 중심을 설정하고 여러 개의 큰 석단(石壇)들로 전체 대지(垈地)를 나누어 구성하게 된 교리적(敎理的) 근거에 대해서는 '정토신앙(정土信仰)'의 체계에 의거하여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삼고, 삼배구품(三輩九品)의 교리에 따라 전체 영역을 9개의 단(壇)으로 구성하였다는 의견과,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십지론(十地論)을 근거로 10개의 단(壇)으로 구성하였다는 화엄경 근거론의 두 가지 주장으로 나뉘어 있다.
정토신앙(淨土信仰)을 근거로 설명하는 의견을 정리하면, 대석단(大石段)을 일컬어 극락세계의 '구품 만다라(九品 曼茶羅)'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시킨 것이라고 하는데, 가장 위쪽에 자리한 무량수전(無量壽殿)이 극락세계인 '도솔천'을 뜻하는 것이라면, 무량수전 앞 안양문(安養門)은 극락세계로 오르는 문(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처음 산 아래자락의 일주문을 지나 차츰차츰 경사진 길을 따라 천왕문, 범종각을 거쳐 드디어 산 중턱의 안양루와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고해(苦海)의 세계에서 극락(極樂)의 세계로 한발 한발 다가섬에 다름 아니며, 더욱 기막힌 사실은 천왕문에서 안양문(安養門)에 이르기까지의 계단(階段)이 모두 108개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이는 백팔번뇌(百八煩惱) 끝에 이르는 도솔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입각한 의견을 정리하면, 의상대사가 직접 창건한 사찰로서 그가 펼쳤던 화엄사상과 건축공간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 근거를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서방(西方)의 극락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아미타여래'를 무량수전의 서(西)쪽에 모셔 동향(東向)하도록 한 것은 철저히 화엄경의 교리(敎理)에 따른 것이라는 것과 부석사 주위 형국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들의 이름이 비로봉(毘盧峰), 연화봉(蓮花峰) 등 모두 화엄경(華嚴經)의 이상향(理想鄕)에 근거하고 있는 점 그리고 안양루 아래에 있던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존재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두 이론은 모두 타당하고 근거가 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부석사의 구성이 어느 신앙체계를 따랐는가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의상(義湘)이 의도한 바는 화엄(華嚴)과 정토사상(淨土思想)의 융합(融合)에 있었다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지형(地形)에 대한 자유자재적인 해석
부석사 가람배치는 서방 극락세계를 일컫는 다른 말이기도 한 안양루(安養樓)를 기준으로 하여 크게 일주문부터 범종각을 거쳐 안양루 앞까지의 부분과, 안양루와 무량수전으로 구성된 부분의 두 영역으로 이루어지는데, 더욱 특징적인 것은 이 두 영역의 배치 축(軸)이 하나의 선(線)을 이루지 않도록 약 30도 정도 굴절(屈折)되어 어긋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리, 굴절된 축(軸)의 구성을 도입한 이유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범종루 밑에서 보이는 장면, 즉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사각(死角) 방향으로 중첩(重疊)되면서 일체를 이루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현상적으로는 맞지만 부석사 창건 당시의 현실은 전혀 무시된 결과론적 주장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즉, 지형(地形)의 쳬계, 특히 이른바 산맥(山脈)과 형국(形局)이 생김새가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배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이른바 안대론(案帶論)이 최근의 새로운 해석으로 대두되고 있다. 안대(案帶)란 바라보는 산이나 봉우리를 말한다.
옛 회전문 터에서 무량수전까지의 총 9개의 단(壇)이 다시 두 개의 대석단(大石緞)으로 구획된 이유도 확연해지는데, 회전문 대석단은 법당 영역을 비교적 평지로만들기 위하장치이고, 안양루 대석단은 무량수전 위쪽 절 영역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법당 위로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수직적으로 중첩(重疊)시키기 위하여 안양루의 대석단을 조성한 이유 또한 평면적인 구성만으로는 법당이 뒤쪽의 안양루를 가려버려 일단 멈춘 흐름을 다시 유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양한 건축적 개성의 구현
이곳에는 부분 부분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과 절묘하게 고안된 디테일이 숨어 있는데, 이것들은 근원적인 원리와 개념을 구현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석사를 건축적으로 완벽한 하나의 전체로 완결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첫째는 부석사가 많은 석단(石壇)으로 구성되어 있어 계단(階段)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계단의 윗폭을 좁고 아랫폭은 넓게 하여 안정감을 준다든지 또는 계단의 전체 높이가 높을 때에는 중간에 계단참(階段站)을 두기도하고, 또한 계단이 석단(石壇)에 덧붙여진 독립적 요소로 꾸미거나 아니면 석축(石築)에 파고 들어간 부속적인 요소로 탈바꿈시키는 등 석단, 문, 누각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둘째는 무량수전 앞마당의 석등(石燈)을 무량수전의 중앙이 아닌 중심선에서 50cm 정도 서쪽으로 치우쳐 세웠는데, 이를 통해 무량수전 내부 아미타불이 서쪽에 앉아 있어 출입구가 중앙의 어칸이 아닌 동쪽의 협칸이 됨으로써 생기는 행위와 형태의 불일치를 자연스럽게 해결하고 있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사과밭 사이 최근에 만든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사과밭이 끝날 무렵, 왼편에 우뚝 솟은 당간지주를 만난다. 당간지주에 대하여는 아직 그 유래와 조성 여부에 대하여 정리된 이론이 없다. 다만 그것이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소도(蘇塗)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을 정도이다. 소도(蘇塗)가 무엇인가 ? 소도(蘇塗)는 일정한 종교적 공간으로 성역(聖域)임을 나타내는 깃대를 꽂아두고 이곳에 죄인이 들어오더라도 정치권력의 영향이 미칠 수 없었던 곳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사찰(寺刹)이라는 종교적 공간에 깃대를 세우고 정치적 영향이 미칠 수 없는 종교적 신성성을 상징하는 것이 당간지주라는 의견이다.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圓)을 두 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세 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 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져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하나의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支柱)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때문에 오히려 안정감(安定感)을 주고 있으며, 간결하고 단아(端雅)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작 중의 명작
높이 4.3m의 이 훤칠한 부석사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늘씬한 세련미를 보여주는 명작(名作) 중의 명작(名作)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씩 좁혀간 체감율(遞減率), 끝마무리를 꽃잎처럼 공글린 섬세성, 몸체에 돋을새김의 띠를 설정하여 수직(垂直)의 상승감(上乘感)을 유도하는 조형적(造形的) 계산, 그 모두가 석공(石工)의 공력(功力)이 극진하게 나타난 것이다.
괘불 掛佛
8.6 × 6m 크기의 이 괘불(掛佛)에 기록된 화기(畵記)에 의하면 원래 숙종(肅宗) 10년인 1684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었으나 훼손이 되자 수리하여 충청도 청풍(淸風) 신륵사(神勒寺)로 옮기고, 1754년에 세로 괘불을조성하였다고 하는데, 따라서 이 괘불은 1684년의 괘불의 구도와 유사하여 그것을 범본(範本)으로 삼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석사 괘불(掛佛)은 높이가 10m에 달하는 커다란 괘불로, 크기가 다른 13폭(幅)의 비단을 연결하여 만든 괘불이다. 이 괘불에는 70여 명의 인물이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으며, 사안과 하단으로 구분하여 하단에는 석가모니불과 그 권속(圈屬)들을, 상단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구도는 상,하 2단으로 이루어졌지만, 내용상으로는 종횡(縱橫)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구도를 가진 이 불화는 상단(上段)은 비로자나불, 약사불, 아미타불이 나란히 앉아 있는 삼불좌상(三佛坐像)으로, 하단(下段)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 '가 화면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통상적인 '영산회상도'와는 달리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여 삼불(三佛)을 첨가한 복합적인 설법도이다.
쌍탑 雙塔
범종루 바로 옆 대석단(大石壇) 위에 좌우(左右)로 위치한 이 석탑들은 원래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절의 동쪽 ' 약사(藥師)골 ' 절터에서 1966년 옮겨온 것으로, 동탑(東塔)의 높이는 3.6m, 서탑(西塔)은 3.77m의 크기인데, 이건(移建)할 때 전부 익산 왕궁리(王宮里) 5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舍利) 5과(顆)를 이 석탑에 안치하였다.
원래 쌍탑(雙塔)으로 건립한 듯,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이 동일하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은 이 석탑들은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신라시대 3층석탑과 기본적으로 같은 형식이다. 하층 기단 중석(中石)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의 모각(模刻)이 있으나, 탱주는 하나뿐이다. 상륜부(相輪部)가 결실(缺失)된 것을 나중에 보수한 이 탑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 양식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신라 하대(下代)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석단 大石壇
부석사는 많은 석단(石壇)으로 구성되어 있어, 계단(階段)의 중요한요소인데, 계단의 윗 폭(폭)을 좁게 하고, 아랫 폭은 넒게 하여 안정감을 준다든지 또는 계단의 전체 높이가 높을 때에는 중간에 계단첨(階段站)을 두기도 하고, 또한 계단을 석단(石壇)에 덧붙여 독립적 요소로 꾸미거나 아니면 석축(石築)에 파고 들어간 부속적 요소로 탈바꿈 시키는 등 석단(石壇), 문(門), 누각(樓閣)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곳 부석사(浮石寺)의 돌축대들은 경주 불국사(佛國寺)처럼 지주(支柱)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인사(海印寺)처럼 장대석(長大石)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제멋대로 새긴 크고 작은 자연석(自然石)의 갖가지 형태들을 다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를 맞추어 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낱낱의 개성(個性)을 죽이지 않으면서, 무질서(無秩序)를 질서(秩序)로 환원시킨 이 석축(石築)들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의상대사가 말한 바 '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임 '을 입증하는 상징적 이미지까지 서려 있는 것이다. 불국사의 돌축대는 인공(人工)과 자연(自然)의 조화를 극명하게 보여준 최고의 명작이라면, 부석사 돌축대는 자연(自然)과 인공(人工)을 하나로 융화시킨 더 높은 원융(圓融)의 경지라고 말 할 수 있다.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層), 단(段)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 놓은 긴 석축(石築)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하여 풍수사상(風水思想)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石築)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新羅)나 고려(高麗)사람들이 지녔던 자연(自然)과 건조물(建造物)의 조화(調和)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순리(順理)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自然石)을 섞어서 놓고 긴 석축(石築)을 쌓아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浮石寺)의 석축(石築)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범종루 梵鐘樓
부석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범종각(梵鐘閣)이다. 부석사(浮石寺)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고,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건축학에 관련된 사람들이 가장 찬탄해 마지 않는 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으로 드나들려면 이 범종각 아래를 출입하여야 한다. 또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이 범종각은 측면(側面)으로 앉아있고, 건물의 앞쪽은 팔작지붕 형태이지만, 뒤쪽은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는 비대칭(非對稱) 건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건축학적 측면에서 보면 정말 자연친화적(自然親和的)이고 부석사의 전체 모습을 살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삼층석탑을 뒤로 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여느 건물의 옆면에 와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범종루(梵鐘樓)를 만난다. 범종루는 중생을 제도하는 법성(法聲)의 소리를 내는 이른바 사중사물(寺中四物)을 설치해두는 건물이다. 사중사물(寺中四物)이란, 범종, 법고(法鼓), 목어(木魚) 그리고 운판(雲板)을 말한다. 그런데 부석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없다. 따로 조성된 범종은 범종각에 걸려 있다.범종루는 2층 누각(樓閣)으로 경사가 급한 자리에 누각(樓閣)과 문(門)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지어진 절묘한 건축이다. 그런데 범종루는 정면에서 보면 '팔작지붕'이며, 뒷면은 '맞배지붕'이면서 측면이 긴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그것은 부석사가 자리한 지형(地形)이 좁고 길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구조이다. 부석사의 중심축 선상에 세로로 범종루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참배자는 자연스럽게 범종루 아래로 참배의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범종루의 전면과 후면이 비대칭(非對稱)을 이루는 이유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비교적 예리한 분석은 첫째로, 대자연과의 시각축(視覺逐)을 맞추기 위한 구성이라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바라보았을 때 범종루의 지붕이 소백산맥의 연봉(連峰)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데, 정면에 팔작지붕이 아니라면 그 느낌은 반감(半減)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범종루 뒷편에는 과거에 법당이 있었다고 순흥지(順興誌)에는 전한다. 바로 이 법당과 범종루의 관계에서 유추하여 보면 법당과 범종루가 이루고 있는 마당에 폐쇄감을 강조하려면 범종루의 뒷면이 맞배지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다.
원래 안양루(安養樓) 아래에 승방(僧房) 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 만세루(萬歲樓), 범종각(梵鐘閣) 등이 있었으나, 조선 영조(英祖) 22년인 1746년에 전소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다고 하는이곳은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로서 현재 종보(鐘樑) 위에 걸려 있는 '범종각'이라는 현판과는 달리 내부에는 대고(大鼓)와 목어(木魚)가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데, 건물 자체가 종(鐘)을 매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인 것으로 보아 옛 만세루(萬歲樓) 자리에 누각(樓閣)을 재현하고, 당호(堂號)만 범종각으로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아시아 건물 대부분이 긴 면(面)을 정면으로 삼는데 반해, 이곳은 짧은 면을 정면으로 놓음으로써 그 모습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이는 전체 지형(地形)이 좁고 길게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부석사 전체를 꿰뚫고 있는 중심 동선(動線) 상에 범종각을 깊이 방향으로 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누(樓) 밑을 통과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식의 건물 배치로 인하여 보통의 건물이면 측면(側面)이어야 할 지붕의 박공이 정면으로 돌출되었는데, 여기서도 합각면(合角面)의 전면(前面)은 팔작(八作)지붕으로 하는 대신, 뒷면 안양루 쪽으로는 맞배지붕 형상을 취하고 있어 비대칭(非對稱)의 형태를 시도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아직 명확한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범종각 내부
원래 안양루(安養樓) 아래에 승방(僧房)인 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인 만세루(萬歲樓) 그리고 범종각 등이 있었으나, 조선 영조(英祖) 22년인 1746년에 전소(全燒)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범종각이라는 현판과는 달리 건물 자체가 종(鐘)을 매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이어서 옛 만세루 자리에 누각(樓閣)을 재현하고, 당호(堂號)만 범종각으로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어(木魚)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운板)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에 속하며,중국에서 유래되었다. 이 법구(法具)는 고기의 배 부분을 비워 나무막대기로 고기 배의 양쪽 벽을 쳐서 소리를 내게 하였다. 고기 모양을 취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한다. '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의하면, 물고기는 언제나 눈을 뜨고 깨어 있으므로 그 형체를 취하여 나무에 조각하고 침으로서 수행자의 잠을 쫓고 혼미(魂迷)를 경계했다고 한다.
또 사찰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옛날 한 승려가 스승을 가르침을 어기고 옳지 못한 행동을 하다가 죽었다. 그 승려는 곧바로 물고기의 과보(課報)를 받았는데, 등에는나무가 한 그루 나서 풍랑이 칠 때마다 나무가 흔들려 피를 흘리는 고통을 당하곤 하였다. 마침 그 스승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물고기로 화현(化顯)한 제자가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고 수륙재(水陸齋)를 베풀고 물고기를 해탈하게 하였다. 물고기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등에 있는 나무를 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모든사람들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고 한다.
이 목어(木魚)는 소리를 내어 대중을 모으도록 하는데 사용되었다.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의하면, 식사 때는 길게 두 번을 쳐서 알렸고, 대중을 모두 모을 때는 한 번 길게 쳐서 알렸다. 따라서 처음에는 식당이나 창고 등에 걸어두고 오로지 대중을 모은 것에만 사요외었으나, 뒤에 독경(독경)을 하거나 기타 의식(儀式)에 사용되었다. 현재 사찰에서는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큰 행사가 있을 때 범종 등과 함께 목으로를 치게되는데, 이는 물 속에 사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있다. 그형태도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차 용(龍)머리에 고기의 몸을 취한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로 변형되었으며, 입 사이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목어도 있다. 보통 채색(彩色)을 입히는 경우가 많으며, 조각이 뛰어난 것은 조선시대 목공예의 우수성을 반영하는 것도 있다. 목어(木魚)는 목탁(木鐸)의 전신(前身)으로, 기능상으로 볼 때 현재는 목탁이 목어의 구실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각종 불교의식에 쓰이는 북을 법고(法鼓)라고 한다. 말그대로 법(法)을 전하는 북으로, 특히 축생(畜生)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법고는 종각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치지만, 이것은 홍고(弘鼓) 또는 대고(大鼓)라 하며, 염불(念佛) 때 사용하는 법고는 소고(소鼓)라고 한다. 소고(小鼓)인 경우에는 승무(僧舞)의 필수품이 된다. 법고(法鼓)의 몸통은 잘 건조된 나무로 만들고 두드리는 양면(양면)은 소가죽으로 만든다. 한쪽은 숫소, 다른 쪽은 암소의 가주을 대야 좋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북소리도 음양(陰陽)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몸체에는 용(龍)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두드리는 부분에는 '만(卍)'자를 태극(太極) 모양으로 둥글게 그리기도 하며, 부처의 깨달음이나 서원(誓願)을 적은 진언(眞言)을 새기기도 한다.
여러 경전에 북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함을 볼 때 석가모니 당시에도 북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불경에는 여러 종류의 북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북이건 대부분 대중에게 크고 작은 일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의식에 사용되는 북은 부로 범채의 장단에 맞추어 쓰며, 범종각에 사물(사物)의 하나로 있는 북은 주로 아침과 저녁의 예불 때에 치게 된다. 불경에 나오는 북 중 특이한것은 천고(天鼓)라는 북이다. 이것은 대지가 18가지 모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스스로 울리는 북이라고 한다.
안양루 安養樓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이 누각(樓閣)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2층 누각(樓閣)으로 2단의 석축(石築)에 앉혀져 있으며, 앞 두 줄의 기둥은 아랫 기단(基壇)에,뒤의 짧은 기둥은 윗기단에 놓여있다. 이 건물의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扁額)은 서로 달라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安養門)'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安養樓)'라고 씌여 있는데, 이는 하나의 건물에 누각(樓閣)과 문(門)이라는 두 개의 기능을 부여한 것으로, '안양(安養)'은 극락(極樂)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며,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極樂)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위치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층이 처마 밑에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휘호(揮毫)한 또하나의 현판인 '부석사(浮石寺)'현판이 걸려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兪弘濬)은 이 안양문(安養門)에서 바라보는 테백산(太白山)의 전경(全景)을 최고의 경치라고 극찬하며, 안양문이, 그리고 부석사가 왜 이곳에 절터를 잡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말한다. 부석사는 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가 길로 떠나가는 양백지간(兩白之間 .. 태백산과 소백산)에 자리잡고 있다. 부석사의 위치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鳳凰山) 중턱이 된다. 방랑시인 '김삿갓'도 이곳에 올라 시(詩) 한 수를 남기는데, 천하의 방랑시인 김삿갓도 이곳 안양루(安養樓)에 올라서는 그 예리한 풍자와 호방한 기개는 한풀 꺾여 낮은 목소리의 자탄(自嘆)만 하고 있다.
平生未暇踏名求 평생에 여가가 없어 이름 난 곳 못 왔더니 / 白首今燈安養樓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 江山似畵東南列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열렸구나 / 天地如萍日夜浮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있구나 / 風塵萬事忽忽馬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듯 / 宇宙一身泛泛鳧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 百年畿得看勝景 백년동안 이러한 경치 몇 번이나 구경할까 / 歲月無情老丈夫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부석사 경내(境內)의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小白)의 연봉(連峰)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산(山)과 들이 마치 정원(庭園)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오는데, 이렇듯 이곳은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어서 예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이곳에서 바라보는 소백(小白)의 장관을 시문(詩文)으로 남겼고,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려 있는 현판(懸板)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려있는 편액은 '안양문(安養門)'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安養樓)'라고 되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樓閣)과 문(門)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安養)은 '극락(極樂)'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석등 石燈
석등(石燈)은 사찰의 경내나 능묘(陵墓), 정원 등에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 두는 등기(燈器)이다. 석등은 기록상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성되었으나, 현재까지의 유물 조사에 의하면 석등(石燈)은 주로 사찰, 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이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이것은 불교 전래(傳來) 이전의 능묘에는 석등을 세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석등이 불교에서 기원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상 불교에서는 등기(燈器)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뺄 수 없는 기본적인 도구일 뿐아니라, 사찰에서 실시하는 모든 행사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공양구(供養具)의 하나이다.
이 석등은 무량수전 앞마당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록 크기는 2.9m로 별로 크지 않지만 무량수전(無量壽殿) 보다 먼저 국보(國寶)로 지정되었으며,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八角) 모양을 하고 있는 석등으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전되어 있다.
국보 제 17호
이 석등(石燈)은 각 부재(部材)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어 단아(端雅)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기에 정교하고 세련된 연화문(蓮花文)이나 보살상 조각이 있어 보면 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통일신라 초기의 명작(名作)인데, 특히 이 절의 창건 때 세워진 연륜(年輪)도 연륜이려니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매석으로 짠 방형(方形)의 지복석(地覆石) 위에 역시 방형의 지대석이 놓여 있고, 지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2구(軀)씩 장식되어 있는데, 그 위로 팔각의 하대석 받침 2단이 마련되어 있다.
하대석은 아름다운 복판복련(複瓣覆蓮) 8엽(葉)으로 구성되었고, 꽃잎의 끝은 귀꽃으로 장식하였으며, 복련(覆蓮)의 위쪽으로는 3단의 받침이 간주(竿柱)를 받들고 있는데, 간주(竿柱)는 전형적인 팔각형으로 굵기나 높이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 화사석(火舍石)을 받치는 상대석에는 8엽(葉)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는데, 2중의 꽃잎 모양과 반전(反轉)으로 양감(量感)을 주어 세련된 조형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팔각(八角)의 화사(火舍)에는 4면 모두 장방형의 화창(火窓)이 뚫려 있고, 나머지 4면에는 각각 보살입상(菩薩立像)이 1구(軀)씩 조각되어 있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서 있는 4구(軀)의 보살상(菩薩像)은 양 손을 가슴에 모아 꽃송이를 들었거나 한 손으로 공양구(供養具)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탄력적이고 세련된 기법으로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으며,화사석을 덮은 8각의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落水面)의 전각(轉角)이 반전(反傳)되 어 있으며, 정상에는 연화문 장식이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지만 연봉(蓮峰)은 결실(缺失)되었다.
이 석등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의 중앙이 아닌 중심선에서 50cm 정도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정중앙(正中央)에 놓였을 경우 안양루(安養樓)를 막 올라온 흐름과 맞닥뜨려 답답해지는 느낌을 해소하는 한편 서쪽으로 비켜섬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큰 효과는 참배자의 흐름을 동쪽의 빈 공간으로 유도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량수전 내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서쪽에 앉아 있어 출입구가 중앙의 어칸(御間)이 아닌 동쪽의 협간(夾間)이 되며, 따라서 참배자의 동선(動線)을 동쪽으로 끌어당겨야만 건물 내부의 예배공간의 방향성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인데, 이렇듯 석등의 배치를 절묘하게 옮김으로써 행위와 형태가 불일치(不一致)하는 갈등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무량수전 無量壽殿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本尊)으로 모시는 전각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寂滅寶宮) 또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고,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석가모니의 일생과 그 행적을 나타낸 영산전(靈山殿), 그리고 석가모니를 모시면서도 그 제자들에 대한 신앙을 함께 모시고 있는 나한전(羅漢殿),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약사전(藥師殿) 그리고 아미타여래를 모신 곳을 무량수전(無量壽殿) 또는 극락전(極樂殿)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량수전은 부석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융국사(圓融國師)가 1043년 부석사를 중창(重創)할 때 지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柱心包) 팔작지붕 집으로 현존하는 건출물로는 안동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 국보 제15호) 다음으로 오래된 13세기 때의 목조건물이지만, 그 외에도 빼어난 형태적(形態的) 비례(比例)와 정교한 축조(築造) 기술로 인하여 우리나라 건축가들에 의해 '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숙(完熟)한 형태의 건물 '로 뽑힐 정도로 그 아름다움이나 크기에서 단연 최고(最高)의, 고려 사찰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고 있다.
무량수전의 아름다움
활주(滑柱)와 배흘림기둥으로 떠받친 팔작(八作)지붕이 간결하고 절제(節制)된 주심포(柱心包)와 어울려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기품(氣品)이 느껴지는데, 사뿐히 고개를 들고 있는 지붕추녀의 곡선(曲線)이야말로 현대 건축가들도 탄복할 정도로 한국미(韓國美)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고려시대 목공(木工)들이 창조하였던 목구조(木構造)의 법식(法式)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표작인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의 진정한 비밀은 착시(錯視)로 인한 사물의 왜곡(歪曲)을 막아낸 절묘한 아이디어에 있는데, 바로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귀솟음과 안쏠림과 배흘림, 그리고 '항아리"형 보 등이 뒷받침되어 무량수전의 완벽한 아름다움이 창조되었다.
먼저 '안허리곡(曲)'은 건물의 평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지 않고, 네 변(邊)의 중앙을 약간 안쪽으로 들이밀어 기둥을 세우는 방법, 바꾸어 말하면 건물의 가운데 부분보다 귀퉁이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방법을 말한다. '귀솟음'은 건물의 양 끝 기둥을 다른 기둥보다 약간 높게 세우는 기법인데, 이는 양쪽 끝 기퉁이 부분이 실제 높이보다 밑으로 처져 보이게 하는 착시(錯視)현상을 막기 위한 고도의 기법이다.
'안쏠림'은 건물 모퉁이 기둥의 윗부분을 수직선(垂直線)보다 약간 왼쪽으로 기울여 세우는기술로써 '안허리곡'의 시각적 효과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안허리곡, 귀솟음과 함께 절묘한 곡선을 만들어 건물의 앞면을 마치 오목거울처럼 휘어져 보이게 하며, 더욱 놀라운것은 그 곡선이 살아 움직인다는 점이다. 기둥의 가운데부분을 볼록하게 깎는 기법인 '배흘림 기둥' 역시 중간을 볼록하게 만들어줌으로써 기둥머리 부분이 넓어 보이는 착시(錯視)현상을 막아 줄 뿐 아니라 ,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 중간에 집중된다는 건축 구조역학을 고려하여 그 무게를 안전하게 소화해 건축물을 견고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장치이다. 다음은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예찬기이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지붕 추녀의 곡선(曲線)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調和), 간결하면서도 역학적(力學的)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必要美)이며, 문창살,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比例)의 상쾌함이 이를 데 없다.
멀찍이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나라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있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 올라 앉아 먼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 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義湘大師)이다.
위 현판의 글씨는 안진경체(顔眞卿體)로 매우 활달하게 쓰여 있다. 이 글씨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피해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함께 안동(安東)으로 와서 머무르고 있을 때 썼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대단한 화가(畵家)이기도하였다는 공민왕(恭愍王)의 명성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실제로도 명필(名筆)의 진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무량수전은 그동안 몇 차례 보수는 있었지만 700여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안모과 기술, 지혜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 더욱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건물의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무량수전 '현판이다.
현판 틀의 모양과 장식(裝飾)이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현판 형식과는 다르게 네 글자를 세로 두 줄로 쓴 것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 현판의 고색창연함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650여년 전 건물을 중창(重創)하고 새로 단 당시의 현판으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만들었을 때는 검은색 바탕에 글씨 부분을 금칠한 현판이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검은색도 바래고 글자 부분의 칠은 거의 다 벗겨지고 말았다. 테두리색도 많이 바랬다. 그러나 글자 부분을 자세히 보면 금칠 흔적이 지금도 조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있다.
소조여래좌상 塑造如來坐像
국보(國寶) 제 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에 봉안되어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의 크기이다. 소조(塑造)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소조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무량수전의 건물이 앉아 있는 자리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터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 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 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다스리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고 있는 극락전(極樂殿)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圓融國士) 탑비(塔碑)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 모양, 즉 수인(手印)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뒷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느네,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소造佛像)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이다. 아미타(阿彌陀)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 '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音譯)하였고,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 등으로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이었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願)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願)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 처음 세운 '願'이라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2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 불국토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 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淨土往生)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석룡 石龍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 절을 세우려 했으나, 이미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도둑의 무리들이 방해하므로 곤경에 처하자, 선묘(善妙)가 큰 돌로 변하여 도둑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녔으며, 그제야 도둑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갔고, 의상대사는 '뜬 돌'의 공력(功力)으로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선묘설화(善妙說話)의 내용을 구현한 석룡(石龍)이 무량수전 본존(本尊)인 아미타불의 대좌(臺佐) 밑에 머리를 두고 굽이를 틀어 그 꼬리 끝이 무량수전 앞뜰 석등(石燈) 아래쯤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祖師堂)을 해체 수리하면서, 무량수전 앞뜰의 개울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잘라 놓았다는 석룡(石龍)의 허리부분이 발굴되었다고 하며, 부석사 측에서는 이를 보수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일본인 기술자의 오나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최근 첨단방비로 땅 속을 조사하여 석룡(石龍)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위 사진
배흘림 기둥
소백산 기슭 부석사(浮石寺)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흐한한 아름다움은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하였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배흘림 기둥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글을 인용한다 ..... '배흘림기둥'이란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 '최순우'의 위의 구절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왜 우리 조상들은 기둥에 배흘림(entasis)을 주었을까? 유흥준 교수는 '곰브리치'의 말을 인용한다. ' 엔타시스 형식을 취한 기둥들은 탄력성있게 보이며, 기둥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의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
백과사전에서는 '배흘림'을 착시(錯視) 현상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 기둥을 직선으로 만들면 착시(錯視) 현상에 의해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 보여 건물이 불안정(不安定)하게 보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착시현상으로 들어가는 만큼을 나오게 하여 전체적으로 건축물의 안정감을 갖게 하였다 ' 여타 전문 백과사전에서도 같은 설명을 하고 있으니, 배흘림이 착시(錯視)의 교정을 위한 장치라는 주장이 정설로 통하는 것 같다.
건축가 서현 교수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배흘림이 착시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곳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은 직선(直線)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량수전의 기둥은 너무나 뚜렷하게 '항아리'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배흘림을 착시(錯視)와 연관시키는 설명은 서양(西洋)의 이론을 무분별하게 우리 건축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배흘림은 건물의 구조적(構造的) 안정성(安定性)을 높이는 공학적(工學的)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누구 말이 옳을까 ?
세 가지 가설
미학적 효과( 美學的 效果), 광학적 교정(光學的 矯正), 혹은 공학적 기능(工學的 機能) .. 이 세 가지이 가설(假說)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가설은 두 번째로, 저 멀리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통형 기둥은 바라 볼 때 가운데가 좁아 보이므로, 건축가는 기둥의 그 부분을 더 두껍게 만든다 '고 하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의 건축가들은 건물이 휘어져 보이는 것을 피하려고 다양한 종류의 환영(幻影) 효과를 활용하였다. 배흘림도 그런 '광학적 교정 (光學的 矯正)'의 기법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배흘림이 직선(直線)의 경직됨을 피해 기둥에 생기를 주는 '미학적 효과 (美學的 效果)'를 위한 기법이라는 가설은 19세기 말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건축가 '펜로즈'에 따르면 배흘림은 ' 동물의 사지(四肢)에 늘 곡선의 윤곽을 부여하는 자연의 습관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는 팔뚝의 알통처럼 긴장된 근육의 부풀어 오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위에서 '유흥준'이 인용한 '곰브리치'의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배흘림이 '공학적 기능(工學的 機能) '을 갖고 있다는 마지막 가설(假說)은 멀리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학자 '라그랑주'에 따르면, 배흘림은 기둥을 구조적으로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 배흘림기둥이 여러 기둥의 형식 중에서 하중(荷重)을 지탱하는 데에 공학적으로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즉, 원통형 기둥보다 배흘림 기둥이 약 25% 더 튼튼하다고 한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지은 장인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기둥에 배흘림을 주었을까 ? 그리스의 장인들이 이 물음에 침묵한 것처럼, 고려와 조선의 장인들도 우리에게 아무런 힌트를 남겨놓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위의 '서현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배흘림기둥은 직선(直線)이 휘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량수전 기둥의 곡률(曲率)은 안으로 굽어보이는 착시(錯視)를 상쇄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항아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도리스식 건축 중에서 가장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 배흘림의 정도는 원주(圓柱)의 1/600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육안(肉眼)으로는 기둥이 부풀어 있음을 확인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서양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배흘림은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의 눈의 해부학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착시(錯視)를 교정(矯正)하는 장치라기보다는 형식적 요소를 터무니없이 과장(誇張)하는 일종의 '바로크 현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미학적 가설(美學的 假說)과 공학적 가설(工學的 假說)뿐. 사실 '배흘림(ENTASIS)이라는 말은 ' 팽팽하게 긴장시키다 '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엔테이테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를 우리는 비유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글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이해할 경우 '엔타시스'는 기하학적 기둥에 인간의 근육(筋肉)과 같은 생(生)의 표현을 주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축어적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기둥을 지탱하는 물리적 기술을 의미할 것이다.
적어도 서양건축에서 과장된 배흘림은 미학적(美學的)으로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약간의 엔트로피, 즉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일탈은 딱딱한 기둥에 생기(生氣)를 주나, 과도한 엔트로피 즉, 확연히 눈에 띄는 요란한 일탈은 오히려 뭔가 과도하다는 인상만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미학적 효과'라는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현상,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배흘림기둥의 객관적 효과, 즉 그것이 다른 기둥보다 공학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배흘림 기둥이 무엇보다 '미학적' 현상임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것 처럼 과장된 배흘림은 미적(美的)으로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답은 한국과 서구의 미의식(美意識)이 급진적으로 다르다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구(西歐)의 건축은 기하학적(幾何學的)이나 한국의 건축은 자연적(自然的)이다. 자연목(自然木)의 껍질만 벗겨 그 형태 그댈 기둥으로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미의식 아니던가. 이런 미감(美感)에서는 서구(西歐)에서 '인위적(人爲的)' 과장(誇張)으로 여겨지는 것이 오히려 '자연적' 일탈로 보일 수 있다.
선묘각 善妙閣
무량수전의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를 흠모(欽慕)하요 용(龍)이 되었다는 당나라 처녀 선묘낭자(善妙娘子)의 추모각인데, 규모도 작고 기단(基壇)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 규모의 맞배집인 이곳은 가구(架構) 방식이나 부재(部材)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의 건물인 듯 한데,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영정(善妙影幀)'이 걸려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법당의 동편에 선묘정(善妙井) 그리고 서편에 식사용정(食沙龍井)이라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우물터'라고 생각되는 곳을 짐작할 길이 없는데, 용(龍)과 물이 한 끈인 것을 생각하면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효(元曉)와 헤어진 의상(義湘)은 당(唐)나라로 향하는 상선(商船)을 타고, 669년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여,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물렀다.집 주인은 의상(義湘)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머무르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고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한 선묘(善妙)라는 처녀가 사랑을 속삭여 왔다.
선묘와 의상대사
선묘(善妙)가 유혹하여 왔으나 마음이 돌 같이 굳은 의상(義湘)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자 도심(道心)을 일으켜 그 앞에서 대원(大願)을 발하여 말하기를 ' 내세(來世)에 태어나 스님께 귀명하여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大師)를 성취하리다. 제자는 반드시 신도가 되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공급하리다 '라고 하였다.
의상(義湘)은 그후 장안(長安)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지엄 삼장 (智嚴 三藏)' 밑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의상대사는 극히 미묘한 도리를 이해하고, 전체의 흐름을 알고 그 행(行)함에 절도가 있고, 요령이 있어 덕(德)의 그릇에 가득 찼다고 할 수가 있고, 가히 삼장(三藏)의 바다에 기꺼이 노닌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리하여 귀국 일자를 정하고 등주(登州)에 있는 신도 집에 다시 들렀다.
의상대사는 수년에 걸친 뒷바라지에 감사를 표하고 상선(商船)을 타고 귀국하게 되었다. 뒩게 의상대사의 출발을 알게 된 선묘(善妙)는 의상대사에게 드릴 법복(法服)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멀리 가고 있었다. 선묘(善妙)는 기도를 올려 ' 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를 공양하는데 있습니다. 원컨데 이 의복을 담은 함(函)이 저 배에 날아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며 파도 위로 함(函)을 던졌다.
때마침 거센 돌풍이 불더니 함(函)은 새털같이 날라 배 위로 떨어졌다. 이에 선묘(善妙)는 다시 맹세하기를, ' 이 몸이 큰 용(容)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船體)와 노(櫓)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의상대사가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웃 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 들었다. 진정한 원력(願力)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마침내 그녀의 몸은 용(龍)이 되어 혹은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나갔다.
의상(義湘)은 신라에 귀국한 후 산천(山川)을 두루 찾아 고구려와 백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았다. 마침내 그곳을 찾았으나 이미 삿된 무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의상대사는 혼자 생각하기를 '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된 법륜을 돌릴만한 곳이다. 권종이부의 잡귀 무리들이 오랙 명씩이나 모여 있을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의상은 마음 속 깊이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 때 의상(義湘)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룡(善妙龍)은 의상대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1리쯤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의 저상을 덮고 막 떨어질 듯 말 듯 하니 많은 잡귀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상대사는 절 안에 들어가 화엄경을 설파하기 시작하였다.
부석 浮石
선묘각(善妙閣)의 서쪽에 있는 아랫 바위와 윗 바위가 떠 있다는 ' 뜬 돌 ' 즉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큰 돌덩어리로 이 바위에는 부석사의 창건설화(창建說話)가 서려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이미 있던 도둑의 무리들이 방해하므로 곤경에 처하자,
선묘(善妙)가 큰 돌로 변하여 도둑들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녔으며, 그제야 도둑들은 겁을 먹고 도망을 갔고, '의상대사'는 뜬 돌의 공력(功力)으로 절을 짓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한편 지금으로부터 약 260여 년 전 이곳을 방문한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李重煥)은 윗돌과 아래받침돌 사이가 이어지지 않고 틈이 있어 끈을 넣으면 걸림 없이 드나든다고 택리지(擇里誌)에 기록하고 있다.
석룡 石龍
또한 선묘설화(善妙說話)의 내용을 구현한 석룡(石龍)이 무량수전 본존(本尊)의 대좌(臺座) 밑에 머리를 두고 굽이를 틀어 그 꼬리 끝이 무량수전 앞뜰 석등(石燈) 아래쯤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19년 에 무량수전과 조사당(祖師堂)을 해체 수리하면서 무량수전(無量壽殿) 앞뜰의 개울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잘라 놓았다는 석룡(石龍)이 허리부분(요부..腰部)이 발굴되었다고 하며, 부석사 측에서는 이를 보수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일본인기술자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최근에 첨단장비로 땅 속을 조사하여 석룡(石龍)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무량수전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5.26m 그리고 기단 폭 3.56m 크기의 이 삼층석탑은 원래 부석사 창건 당시 건립된 것이 아니라, 자인당(慈忍堂)의 석물(石物)들과 함께 부석사 동쪽 1.5km 떨어진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이 석탑은 거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하층 기단이 넓어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착실한 짜임새와 적절한 체감율(遞減率) 등으로 안정감 있고, 단순, 소박한 조형(造形)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中石)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가운데 모두 8매석으로 짜였고, 중석(中石) 각 면에는 두 개씩의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으며, 윗면이 약간경사진 하층 기단 갑석(甲石) 위에는 상층 기단을 받치기 위한 2단의 몰딩이 조각되었고,상층 기단의 중석(中石)은 각 면이 1매의 판석(板石)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하나씩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2매의 돌로 이루어진 갑석 위에는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그 위 탑신부(塔身部)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고, 각 층의 탑신에는 각기 우주(隅柱)만 있을 뿐 조각을 새기지 않았으며,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각 층 5단이고, 낙수면(落水面)의 네 모리는 약간 반전(反轉)되었으며,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相輪部)에는 현재 노반(露盤)과 넓적한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다. 1960년 해체 수리할 때 당시 3층 옥신(屋身) 중앙에 얕은 방형(方形)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나, 사리구(舍利口)는 이미 없어진 상태이었고, 다만 기단부에서 철제 탑, 불상 편(佛像 片),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조사당 祖師堂
이 조사당(祖師堂)에는 이곳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맞배집으로 전통적인 주심포(柱心布)식의 과도기적 건물로서 양식과 기법에 특이한 점이 담겨져 있는 작은 건물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의 것은 모두 10여 채라고 한다. 그 가운데 4채가 경주(慶州)의 '양동마을'에 있다고 한다. 대단한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현존하는 고려(高麗) 시대 건물은 국내에 모두 6채가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두 채가 이곳 부석사에 있다. 이 또한 놀랄만한일이다. 1366년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부석사를 중창하면서, 이 조사당(祖師堂)을 세운 것이라는 사실은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해 밝혀졌다.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무량수전 뒤로 산을 올라가 높다란 언덕 위에 있는 소규모의 건물로, 건무은 석재를 허튼층쌓기한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약한 배흘림을 가진 기둥 위에 주두(柱頭 ..대접받침)를 두고 건물 외부에는 일출목(一出目)의 공포(拱包)를 올리고 있다. 대들보는 이 공포 위에 넣었는데, 대들보 끝은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고 기둥 윗부분에서는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고 있다.
국보 제 19 호
이 법당은 건물 자체가 매우 소규모이기 때문에 세부 양식이 간결한 수법으로 구성된 것은 당연한현상이라 하겠으나, 기둥의 배흘림이 무량수전에 비하여 현저하게 적어졌고,특히 주두(柱頭)나 소로(小累) 굽에 굽받침이 없어지고 굽의 단면이 직선으로 되어 다포(多包)집 양식의 그것과 같아진 점, 그리고 마루도리를 받치는 솟을합장에 조금이나마 안으로 굽은 곡(曲)이 나타나기 시작한 점 등이 모두 무량수전과 달라 시대가 내려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한편 조사당의 내부에는 고려시대에 그려진 벽화(壁畵)가 있었으나, 최근에 새로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원래 벽화가 있었던 자리에는 모사도를 그려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 건물의 건립 연대는 일제(日帝) 때 수리공사에서 발견된 ' 선광 7년(宣光 七年)'이라는 묵서(墨書)로 보아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선비화 禪扉花
조사당(祖師堂) 처마 밑에서 자라고 있는 한 길 남짓한 골담초(骨憺草)로서, 햇빛과 달빛은 받지만 비(雨)와 이슬(露)은 맞지 않는데, 교목류(喬木類)보다 훨씬 수명이 짧은 관목류(灌木類)임에도 무려 1,300년이나 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저 불가사의하게만 여겨지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의상대사와 인연이 얽혀 있으며, 그 내용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에 실려 있다.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중국에서 도(道)를 깨우치고 이곳 부석사에서 수행하다가 인도(印度)로 갈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길을 떠나며 의상(義湘)은 거처하던 처마 밑에다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간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을 줄 알어라 '고 말하였다.
의상(義湘)이 떠난 후에 제자는 의상(義湘)의 상(像)을 흙으로 빚어 거처에 안치하였다. 나무는 곧 가지와 잎이 나왓으며, 비록 햇볕과 달빛은 비치나, 비와 이슬에 젖지 않았다고 한다. 늘 처마 밑에 있어서, 지붕을 뚫지 아니하고, 겨우 한길 남짓한 것이 천년을 지나도록 하루 같다.
광해군(光海君) 시절, 경상감사 정조(鄭造)가 이 절에 와서 이 나무를 보고, ' 의상(義湘)이 짚던 것이니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 '고 하면서 나무를 잘라 가지고 갔다. 그러나 이 나무는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나서 전과 같이 자랐다. 인조(仁祖) 때에 정조(鄭造)는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 이후로는 누구도 감히 이 나무를 탐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퇴계(李退溪)는 이 나무를 보고 시(詩)를 읊조린다. 나무는 사계절 늘 푸르르며, 잎이 떨어지거나 피는 일이 없다고 한다.
擢玉亭亭倚寺門 옥(玉) 같이 빼어난 줄기 절 문(門)에 비꼈는데
僧言錫杖化靈根 지팡이가 신령스러운 나무뿌리 되었다 하네
杖頭自有曺溪水 지팡이 끝에 스스로 조계(曺溪)의 물이 있는가
不借乾坤雨露恩 천지간의 비 이슬 없이도 살아 가누나
스님들은 이 나무를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부르는데, 학명(學名)으로는 골담초(骨曇草)라고 한다. 골담초는 대략 1.5m 자라며, 꺾어서 꽂아두면 다시 뿌리가 내린다고 한다. 문제는 .. 아이 못 낳는 여자들이 이 나무를 달여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1957년부터 철책을 둘러놓아,이 나무를 보호하고 있는데 보기에는 무척 흉하다.
조사당 벽화 祖師堂 壁畵
205cm × 750cm 크기의 이 벽화(壁花)는 원래 부석사 창건주 의상대사(義湘大士)를 기린 조사당(祖師堂) 벽면에 그려졌던 것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벽체(壁體)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별도의 보장각(寶藏閣)에 보관하고 있는 그림인데,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그리고 사천왕상(四天王像) 등 모두 6점으로 그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의상대사'를 외호(外護)하려는 의도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46호
이 벽화의 제작연대는 지금까지 조사당(祖師堂) 장여(長驪) 묵서명(墨書銘)의 기록대로 1377년으로 알려지면서 우리나라 사원 벽화(寺院 壁畵)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하지만 일부에서는 도리 하단(下段)에 1201년에 개채(改彩)한 것을 다시 1493년에 개채(改彩)하였다고 기록한 묵서명(墨書銘)의 기록으로 보아 1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의견이 유력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