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언덕에 오르다
인간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천연 자원은 모래라고 한다. 모래에 관한 속담을 보면 모래의 속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모래 위에 쌓은 성, 모래 위에 물 쏟는 격, 모래 위에 선 누각, 개싸움에는 모래가 제일이다 등이다. 이중에 ‘모래알 같다’는 말은 한없이 약하고 결속력이 없어 쉽게 와해되는 경우를 말한다.
어느 날 여러 문인들과 충남 태안군에 위치한 신두리 해안사구를 찾았다. 사구砂丘는 바람에 의해 이동한 모래가 쌓여서 퇴적된 모래 언덕을 말한다. 사막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해안사구만 볼 수 있는데, 사구는 태풍이나 해일을 막아주는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수분과 영양분이 적고 바람과 햇빛은 강한 독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 역할을 한다. 사구는 해안과 그 뒤쪽의 사람이 사는 거주공간을 구분하며, 바닷바람을 막아 바다와 농경지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해안선을 모래로 유지하기도 한다. 사구는 동식물의 중요한 서식공간으로 신두리 해안사구에는 해당화, 순비기나무, 표범장지뱀, 소똥구리, 개미귀신, 억새 등 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단일 사구지역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사구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2001년도에는 한국의 해안사구 중 유일하게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돼 학술 가치로나 동식물의 서식지로도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바람을 막아 주는 아름다운 모래언덕에 등을 기대고 앉아 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바다는 푸르게 출렁이고 있었으나 문득 문득 파도 위에는 검은 정령들이 나타났다. 2007년도에 발생한 태안군 앞바다 기름유출 사건은 서해바다의 생태계에 큰 악몽이었다. 당시 여의도 면적의 120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기름 유출은 태안 앞바다는 물론, 서해안 생태계 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123만명의 자원봉사자가 나서서 기름 제거에 앞장섰다. 자원봉사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태안을 찾아 기름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누구의 말따나 세계 어느 나라도 남녀노소가 주저 앉아서 검은 기름 돌을 닦는 나라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완전한 생태계 회복에는 최소 2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2년 만에 태안 앞바다는 사고 전의 청정지역으로 되돌아갔다. 그야말로 한국인만이 할 수 있었던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놀라운 시민운동으로 전 세계가 경이롭게 평가한 환경회복운동이었다. ‘유류피해극복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당시 자원봉사자들의 활약을 기록한 22만건의 기록물은 세계유네스코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신두리 해안을 다니다 보면, 작은 ‘모래 경단’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래경단’은 엽낭게와 달랑게가 모래를 잔뜩 삼켜서 좋아하는 먹이만 빼 먹은 후 모래를 뱉어 둥글게 말아 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 ‘모래경단’이 햇볕에 마르면 해풍에 실려 육지로 날아가 모래언덕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태안의 앞바다는 그동안의 맹렬했던 무더위를 조용히 밀어내는 시원한 바람으로 평화롭고 좋았다. 그러나 지금의 이 평화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1997년의 금 모으기 운동을 생각했다. 금 모으기 운동은 1997년 IMF 구제금융 때 우리나라의 부채를 갚기 위해 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가진 금을 국가에 내어놓은 운동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외환 부채는 약 304억 달러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 약 351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은 4가구당 1가구꼴로 평균 65g을 내놓아 18억 달러 상당의 금 227톤을 모아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 2001년 대한민국은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다. 이 운동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국채보상운동이 연상되는데 그때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이 애국심과 단결력을 과시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시민주도의 상환운동이었다. 좀 냉소적으로 말하면 믿었던 국가가 부도를 내니까 국민들이 알아서 부채를 갚아 준 것이다. 무능한 국가를 마다않고 바르게 세워간 우리 민족들을 생각하니 나 자신도 그 일원이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가득하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작고 부서지기 쉬운 모래같은 존재들이다. 모래땅에서 자라는 이름없는 사초沙草들이다. 그러나 그 모래가 모이고 쌓이면 큰 언덕이 되어 사나운 바닷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고 많은 생물들이 살아가는 넉넉한 보금자리가 된다. 주위에 쌓인 조그만 ‘모래경단’ 무리를 보니 나는 결코 작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신두리의 모래언덕에서 내려다 본 태안 앞바다는 여전히 정갈하고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