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백제시대를 잠시 돌아보다
한국공무원문인협회 회원들과 함께 2016년도 상반기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백제문화권의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공주 일원이다. 공주의 공산성과 인근의 무령왕릉 등 백제시대 왕가의 무덤일대가 2015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하니 이번 기행은 의미있는 현장체험이 될 듯하다.
7월 2일 토요일 아침은 짙게 흐렸다. 전날 많은 비가 내려 모처럼 계획한 문학기행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으나 모두가 시간에 맞추어 약속장소에 모였다. 우리들의 모임을 시샘이라도 하듯 비는 올 듯 말 듯 은근히 겁을 주더니 이제는 포기한 모양이다. 버스가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날씨는 좋아진다. 밤새도록 노심초사한 하순명 회장님을 비롯해 얼굴들이 환해진다. 친절한 버스 기사님도 한마디 거든다. 출발시간을 칼날처럼 지키는 우리 회원들을 보면서 역시 공무원들은 시간개념이 남다르다고 하여 모두가 웃었다. 버스 안에서 서로를 소개하였는데 특별히 이번 기행에는 공문협회원뿐만 아니라 회원의 지인이나 본회에 관심이 많은 여러분들이 동행하여 보기에 좋았다.
금강에 둘러싸인 공산성을 오르다
공주에 도착하니 공산성이 우리를 맞이한다. 공산성은 공주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산을 중심으로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지만 조선시대 임진왜란이후에 석성으로 고쳐쌓았다고 한다. 백제때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으로, 조선 인조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린 성이다.
회원들과 밑에서 올려다 본 공산성은 생각보다 크고 높아 보인다. 필자는 원래 성이라고 하면 유럽의 크고 가파른 철옹성 같은 웅장한 성이거나 독일의 난공불락의 엘츠성, 중국의 만리장성, 하다못해 철벽같이 구축된 해자와 내외부방어막으로 설명되는 일본의 구마모토성이나 오사카성같이 장엄하고 규모가 큰 성이 성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와 비교하면 한반도는 땅이 좁고 인구가 적어서인가 우리나라의 성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행주산성의 역사적 대첩을 생각하고 산성에 올랐을 때의 실망감, 남강을 배경으로 구축된 진주성의 협소함과 취약한 구조를 보고 놀란 점은 이러한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잘 살린 자연친화적인 우리나라 축성술은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최강의 몽골군을 격퇴한 용인의 처인성 대첩과 고구려의 안시성 승리, 비록 삼전도의 굴욕을 가져왔으나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남한산성은 높고 가파른 천혜의 산세를 이용한 대표적인 예라고 본다. 결국 성은 자연적인 환경도 중요하지만 성을 지키고자하는 지도자의 리더십과 이를 따르는 병사들의 충성심과 용맹한 기개가 중요하다고 보겠다.
정문인 금서루를 지나 구불구불 가파르게 축성된 산성을 따라 오르니 미끄러운 젖은 흙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듯 위태위태 수도를 지켜나간 공산성의 역사가 생각났다. 백제가 475년 한성에서 도읍하여 538년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공주는 웅진 백제시대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쫓겨 급하게 정한 도읍지라 전략상 중요한 야산에 단단하게 다져진 2,660미터 길이의 성곽은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하는 금강변을 따라 잘 구축되어 있으니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역사적으로 강은 선사이래 생명을 잉태하고 삶을 유지하는 국가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자연환경인데 그런 점에서 금강은 공산성과 함께 잘 어울리는 천혜의 물류활동과 방어수단을 갖춘 것 같았다.
성곽곳곳에 나부끼는 여러 색깔의 깃발을 보았다. 단순히 장식을 위한 깃대이거나 아니면 노란 깃발은 백제를 상징하는 나투라는 매 그림인 줄 알았는데 실은 송산리6호 고분에 나온 청룡, 백호, 주작, 현무그림이라고 한다. 한참을 오르니 지름이 약 10여미터 가량인 커다란 원형의 마른 연못이 눈아래 있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발굴당시 이 인공연못 안에서는 토기나 기와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마 공산성의 이 연못은 비상시 식수를 마련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재에 대비한 방화수 역할도 한 듯하다. 불현듯 읍참마속의 배경이 된 삼국지의 가정전투가 생각났다. 전략적인 충고를 무시하고 경솔하게 높은 산 위에 진지를 구축하여 마실 물을 확보하지 못해 전투에 패한 마속을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벤 제갈량의 냉정한 결단!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후 백제는 공산성을 거점으로 중국의 남조와 활발한 정치, 경제, 문화교류활동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알찬 번영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이제 거의 다 내려온 모양이다. 덥고 습한 날씨에 잠시 공북루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우리가 누구인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옛날엔 산성을 지키는 누각이었으나 지금은 풍류를 즐기는 문인들의 누각이다. 난간에 몸을 기대어 앉아 시낭송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 문학기행의 백미이다. 여러 회원들이 자기만의 시를 다양한 모습으로 낭송하였는데 낭송은 시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숨겨진 속뜻을 생각하며 주의 깊게 때론 열정적으로 낭송한 시들이 마음에 와닿는 순간이다. 시간관계로 미처 낭송하지 못한 나의 시를 조용히 음미해 본다.
백제 석공의 망치소리에 산성은 조금씩 단단해지고
흐르는 금강은 쉬어가듯 잠시 역사를 내려놓는다
몇백년후 누각에 오른 민초들이
풀꽃처럼 강인한 그대들을 생각할터
이제는 거친 손길을 거두고 고향으로 가소서
풍금소리에 담은 나태주 풀꽃기념관
공산성 주변의 이름난 쌈밥집에서 맛깔난 점심을 먹은 후 공주가 자랑하는 향토시인 나태주의 풀꽃문학관을 찾았다. 조그만 야산을 뒤로 전원주택같은 집이 정갈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시인은 오랜 기간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1971년 시 ‘대숲아래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늦게 문단활동을 한 분이다. 2010년부터 공주문화원 원장으로 재직중인데 바쁜 중에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출신이라 그런지 더 반갑게 느껴진다.
문학관 곳곳은 그의 대표적인 시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리고 또 다른 시가 빼곡이 전시되어 있다. 시인은 시와 함께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어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사랑스럽고 예쁜 그림이 시만큼 빠져들게 한다. 게다가 노시인은 시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강의도 하고 직접 풍금을 타면서 모두를 동심의 세계로 이끌어 어린아이처럼 함께 합창도 하였다. 오빠생각도 하고, 강변에서 갈잎을 보고, 등대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니 풀잎향기가 풍금소리에 둥둥 떠다니는 듯하였다. 둘러보니 풀꽃이라는 같은 제목의 시가 있었다. 이름을 알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는 시이다. 이 시간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E H Caar를 생각하다
우리는 이제 현재를 잠시 내려놓고 무덤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송산리 고분군이었다. 따가운 햇살로 모두들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하던 때 고분 안에 들어서니 무엇보다도 시원함이 밖으로 나가기 싫을 정도였다. 무덤 속이니 응당 서늘하려니와 아늑하기까지한 그곳은 벽돌 하나하나가 제몫을 다하며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현재 17개의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무령왕릉까지 7개가 복원되었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의 전통적인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룬다. 송산리고분 1-5호는 돌방무덤형태로 돌로 널방을 만들고 천장을 돔형식으로 둥글게 만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송산리고분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당시 중국 양(梁)나라 지배계층의 무덤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塼築墳]형태였다. 무령왕릉은 발굴당시 특이하게도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어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령왕은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40세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한강 일부를 수복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내치로는 농업을 진작하기위해 수리시설들을 확충하여 명실상부한 백제 중기의 강력한 왕권국가를 건설하였다. 무령왕릉은 1997년까지는 관람객이 직접 왕릉에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보존의 문제로 입장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똑같이 만들어진 무령왕릉이 있어 어려움이 없었다. 인상적인 것은 무덤 안에도 등잔과 창문이 있어서 빛으로 내세를 밝히고자 기원한 백제인들의 바램을 볼 수 있었다. 무덤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이라 여긴 것 같았다. 고분들 옆에 세워진 웅진백제역사관에서는 한반도의 한 시대를 열어간 또 다른 백제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은 인근의 국립공주박물관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좀더 많은 유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한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은 그 화려함과 섬세함, 우아함 등이 단연 나라의 보물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찬란한 백제문화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빛을 내는 여러 유물을 보고 있으니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역사를 잊은 민족은 그 역사를 되풀이한다'고 한 E H Caar의 말이 떠올랐다.
고마나루에서 숲속의 곰이 되다
마지막 여정이라는 아쉬운 마음을 담으며 들린 곳은 고마나루 소나무숲이다.
웅진이라는 지명이 말하듯 고마나루는 금강의 나루터이다. 소나무 하나하나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무를 낀 소나무숲은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곳이기도 하다. 고마나루 숲속에는 곰사당이 있다. 한 어부가 고마나루 맞은편에 있는 연미산의 암곰에게 잡혀가 부부가 되어 두명의 자식까지 두었는데, 어부가 도망을 가버리자 이를 비관한 암곰이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죽었다고 하여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사당이다. 숲속에는 곳곳에 돌로 만든 여러 모양의 곰조형물이 있다. 평소 복뎅이 곰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아내가 석상에 기대에 이리저리 포즈를 잡는 것을 보고 모처럼 이산가족 상봉하느냐고 놀리니 그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하얗게 흩뿌려진 개망초꽃을 바라보던 우리 공문협 회원 모두는 다시 한번 이웃이며 친구이며 연인이 되었다.
오늘 하루를 알차고 내실있는 문학기행으로 만들고자 기획하고 추진해주신 한국공무원문인협회 하순명 회장님과 모든 관계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