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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봄비가 트레킹 내내 성가시게 굴 것 같았는데.... 그건 괜한 근심이었다. 오히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잠들었다.
두 서너번 갈아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동선이라 우려했지만 이 역시 기우였다. 두번의 나눔간의 차편 따라
모두들 잘 도착들 하셨다. 광장 그늘막에서 마중하며 기다리며 생각하던 일들 전부 털어내고 팔당댐 광장을 벗어
나 남양주군 역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향리에 가면 옛적에는 동구밖에 서 있던 느티나무 나무 아래를 찾아가
동내 웃어른을 만나 동내 사정을 귀동냥했었는데 요즈음은 지자체별로 생활박물관을 만들어 놓아 그 지역의 성향을
습득하기 여간편한 것이 아니다. 박물관 자리는 옛적 팔당 국민학교 자리다. 마재를 향해 걷다 뒤 돌아 보면
꼬~옥 한자로 八字 같은 형상을 보게 된다. 좌측의 검단산과 우측의 예빈산 그 사이 팔당댐, 신기할 정도로 여덟
팔자다. 八堂이란? 당집이 무려 8개가 있었다하여 팔당이라 불려 생긴 이름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면서
강폭은 넓어진다. 그리고 경기도에서 가장 안쪽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京安이라 불렸던 경기도 광주에서 흘러
드는 물길인 경안천과 다시 물이 합수되어 물량은 많아지지만 오히려 강폭은 협곡으로 물살은 빨라진다. 그리고 강
밑에 도사린 암초들은 땟목과 배들에게는 경계 대상이었다. 옛사람들은 이 협곡을 두미강으라 불렀다. 이곳에서 잦은
사고로 많은 인명이 손상되자 자연이 당집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명도 팔당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땜으로 뱃길이 끊기자 땜아래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파는 식당영업으로 바꾼 것이 이 지역을
매운탕과 장어구이 집으로 한때 풍미를 누리기도 한 곳이 바로 팔당이었다. 지금도 그 잔재가 상당수 남아 있다.
박물관에 들러 지역 문화해설사의 도움으로 남양주군의 내력을 정취하였다. 광릉과 사릉과, 홍유릉이 있으며 아름다운
광릉수목원이 있고 연인산 일부와 축령산, 천마산,백봉, 갑산, 운길산, 예봉산, 예빈산, 철마산, 두물머리와 두미강과
모든 궁궐과 사대부 집 기와를 공급하던 와부도 와부면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다. 그곳에는 지금도 기와쟁이들이 살고 있으며
그일에 종사하고 있어 경복궁, 남대문 등등 지붕 잇는 일에 불려나가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발생에 있어 중심적 역활을 했던 성지 또한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마재에 있으며, 새들의 복음자리라 새들의
지저기는 소리가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조안(鳥安)이다. 능(陵)과는 연관이 없는 동네지만 이곳을 지나 영서, 영동지방
으로 가는 사람들은 이곳을 능안 마을이라 불러 능내란 이름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한확이란 재상의 묘 때문이었다.
누이를 명나라 성조 후궁으로 보내지만 성조가 죽자 순장으로 생을 마감한다. 막내 누이 마저 후실로 보낸다. 이 때 막내 누이
는 결혼 때 사용할 혼수를 가위로 짜르고 앞 마당에 내 던지며 절규한다. 언니를 보냈으면 되었지 무슨 후사를 보려고 나마저
보내려 하느냐 난리를 친 것이다. 그렇게 떠난 이가 바로 명나라 선종 후궁이었다.
한확은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누이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정통
성 문제로 서둘러 한확과 인연을 맺는다. 수양의 아들 도원군에게 막내 딸을 시집 보내는데 그이가 바로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
비이다. 요절한 남편, 대신 왕위에 오른 성종, 그 어머니는 인수대비의 자리에 오르지만 연산군에 의해 갖은 수모를 겪다
세상을 떠난다. 명과 조선에서 영화를 누리던 한확은 왕릉 못지 않은 묘를 예빈산 동쪽 낮은 자락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모습이 왕릉 규모와 엇 비슷해 사람들은 능이라 부른 것이다. 이런 역사와 천주교의 시조 역사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조안면 능내리 마재인 것이다.
지역에 대한 견문을 익히고 박물관 뜰로 나섰다. 성지순례 기도를 함께 드리고 기념촬영을 한 후 마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유롭고 가난하고 겸손하며 단순한 삶의 향기를 날리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걷기 위한 일보를 내딛었다.
박물관을 나와 땜을 향해 걷다 보면 양회 싸일로 타워 입구가 나온다. 그 입구에서 500m 더 진행하면 좌측으로 시멘트로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폐철도 구간으로 마재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깃점이다. 이 길에 올라서면
비로서 강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열차가 통행할 때 터널은 어둡고 습했었다. 이곳을 포장을 하여 자전길과 사람들의 산책로를 만들고 사람이 진입 시
자동으로 조명불이 들어 오도록 만들어 쾌적한 산책로로 변신시켰다.
봉안터널을 나서면 바로 팔당땜을 관리하는 직원 관사가 나온다. 그리고 아래배알미동이 맞은편에 강건너에 있다.
이벽선조께서 사셨던 동내이다. 배알미동에서서 서쪽을 보면 강자락 끝에 삼각산(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곳 산자락 남쪽 끝 백악산밑 경복궁은 나랏님이 사시는 곳이라하여 마지막으로 임금을 배알할 수 있는 장소이기에 배알미라
불렸다. 정재원은 첫부인 남씨 사이에 약현을 두었다. 정재원은 첫부인과 사별 후 해남 윤선도 후손 윤씨부인과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을 두었다. 약현은 경주이씨 이부만의 딸인 광암 이벽의 누이에게 장가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딸이
장안에 신동 황사영에게 시집을 간다. 그 딸이 바로 정난주다.그리고 박해 때 남편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아이와 시어머님와
함께 노비가 되어 귀양을 간다.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정난주는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양을 간다. 정난주가 귀양가는
뱃길에 너무 슬픈 사실이 전해 온다. 귀양길에 함께 오른 당시 두살박이 황경한은 어머니의 기지로 살아 남아 추자도에서
살아 남게 된다. 군졸들에 대화중에 아들을 바다물에 수장시키려하는 감을 잡고 뱃사람에게 패물을 건네 술울 구해오게 한
후 군졸들이 술에 취해 배전에 쓰러지자 경환의 가슴에 신분과 관련된 글을 적어 아들을 추자도에 내려 놓고 제주도로 향한다.
얼마나 가슴에 메졌을까? 추자도 예초리는 동복 오씨 집성촌이었다. 소를 돌보러 나온 오상선씨가 아이를 발견하고 키웠다.
성장하여 무안 출신 김씨랑 혼사를 맺는다. 지금도 추자도에 8대째 후손들이 살고 있다. 또한 오씨 가문과 황씨 가문은 그런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 양가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정난주는 어려 고모부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천주교인이 되었다. 추자도에서 죽은 황경환은 추자도 예초리 산20번지에 묻혔다. 제주도 천주교 전래 100주년 기념으로
605평에 성지로 개발되었다. 고 김수환추기경께서도 이 성지를 찾으셨었다. 성가정이었던 정재원 가문과 인연은 전부 순교의
꽃으로 이 땅에 영원히 남게 된 것이다. 이들의 순교를 통하여 천주께서는 이땅에 뿌리를 넓고 깊게 내림을 주신 것이다.
하남 배알미동과 마주 보이는 곳 강상에 아주 작은 삼각주가 자라고 있었다.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버드나무 빛이
생명이 피어나기 직전의 모습으로 다가 온다. 수면이 참으로 고요하다. 파문조차 일지 않는 지금 그 모습이 평화롭다.
이승훈이 돌아 오자 광암 이벽선조께서는 당시 수표교에 갖고 있던 자신의 집에 임시 성당을 차린다. 그리고 포교의 대상
으로 정약현의 동생 다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약현의 처 이벽의 누이는 정난주를 낳고 나이 서른에 세상을 뜬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이벽과 다산은 누이와 형수님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마재를 찾는다. 그리고 제사를 끝내고
귀경길은 배편을 이용했다. 이벽과 다산은 배에 오르고 이곳을 지날 무렵 조심스럽게 다산에게 천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다산이 천주교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하는 순간이었다. 배가 두미협 입구에 다달아 쏜살같이 하류로 향했다. 지적이면서도
달변가였던 이벽이 하는 말은 조리가 있었다. 이벽은 포천에서 태어나 자란곳이 바로 배알미였다. 이벽이 천주교의 선조로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마재와의 사돈이라는 인연이 한몫을 한 것이다. 배알미동 쪽으로론 아직 옅은 운무에
가려 있었다. 팔당호 덕분에 자주 물안개가 끼는 곳이 마재, 배알미, 도마, 남종, 강상, 강하 지역이다.
강을 옆에 끼고 걸으시는 야고바 트레커들의 걸음 걸이가 무척 가볍다. 해가 앵자산 쪽으로 다가서자 볕에 온기가 가득했다.
봉주루카페를 왼쪽에 끼고 돌아 서자 능내리 마재가 그림처럼 다가 온다. 아직은 이르지만 봄이 무루익게 되면 강가에 버드
나무 늘어진 가지가 강변의 정겨움을 더 고조시켜 줄 것이다. 시멘트 길을 버리고 여름날 연꽃이 무성하게 피는 연꽃밭 뚝길로
들어섰다. 트레킹화 바닥에 닺는 촉감이 새롭다. 스스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의 길에 들어서면 자신의 모든
육신은 한가롭고 여유롭게 변한다. 그것은 자연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단순하게 변화는 여유로움의 결과다.
경쟁과 다틈이 없는 자연 공간에서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자연과 일치시킬 수 있기에 행복이 솔솔하게 묻어나는
것이다. 걸음에 전혀 힘이들지 않으셨다. 투박하거나 어떤 목적을 향하기 위한 힘이 실린 걸음을 볼 수 가 없다. 마음이
흐르고 바람이 스쳐 지나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유롭게 걷고 있다는 사실이 걸음걸이에서 느낄 수 있다.
김성곤 요셉형제님의 부르는 소리에 김연옥 골롬바 자매님의 V자 화답 체스처가 보기 근사하다. 항상 애정과 관심으로
트레킹을 후원해 주시고 참여해 주시는 부부이시다. 조금은 돌았지만 마재의 정수리인 언덕받이를 밟고 성지를 향했다.
마재나 마현은 같은 말이다. 재나 현(峴)에 올라서면 비로서 산이 보이고 강이 보인다.예빈산 끝자락에 임진왜란 때
왜놈들은 정기를 끊어내기 위하여 주먹만한 鐵馬를 만들어 묻었다. 이 철마를 발견한 사람들이 정씨 형제들이란 설이 있다.
형제들은 자주 예봉산 철문봉까지 산에 오른 기록이 남아 있다. 철마가 발견된 산을 철마산이라 부르고 능내 안부인 언덕을
마재 또는 마현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약현의 집은 산쪽 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호를 수오제(守吾齊)라
하였다. 마재의 우측 끝자락이었다. 약현의 묘도 지금 그곳에 있다. 그리고 마재 우측에 형성된 숲 안쪽은 온갖 새들이 몰려
드는 숲이다. 흐르는 물이 고요하고 숲은 늘 화사했다. 오즉하면 당시 고을 이름을 초부라했을까! 草莩! 플빛이 가득했던 강
언덕 그곳에 알을 낳고 부화를 하고... 새들의 천국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뱃길이 있어 마음이
열리면 물길도 열렸었다.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마재는 넉넉한 마음으로 서학을 받아 드리고 이어서 실용에 대하여 깨달음이
남들보다 앞서간다. 결국 그 모든것들이 신앙으로 거듭났지만 가문으로서는 세속적인 명예를 벗어 버리는 계기가 된다.
이런저런 사념 끝에 마재에서 길을 틀어 성지로 들어 섰다. 툇마루가 정겹다. 추녀끝 선과 일치되도록 달아 낸
마루를 우린 툇마루라 한다.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 같은 것들을 표현할 때 퇴를 붙여 쓰는 습관이다. 또한 나서거나 앞서지
않으면서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경우도 많다. 무엇을 담거나 치장이 가능한 실내는 아니지만
추녀끝 쪽마루면서도 요긴한 소통의 공간으로 잠시 머물며 이웃과 소통하고 외촐과 내입 시 의관을 추수리던 짜투리 공간이
바로 툇마루다. 참으로 여유로운 열린 공간이다. 사랑과 배려를 남에게 내어줄 작은 마음씨를 툇마루 만큼만 지니고
살아갈 수 있어도 좋으련만 왜 그리 인색한지 모르겠다. 어떤 때는 타인과 사물과 자연을 통하여 보고 배우는 것이 우리에겐
많은 것이 현실이다. 다들 쪽 마루에 걸터 앉아 행장을 추수리고 몸맴씨를 단정하게 가꾸고 성당에 들 채비를 차렸다.
한옥이 주는 정감이 남다르다. 후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화살기도를 생각나는대로 챙겨 드렸다. 이 순간에도 기도에는
자신의 욕심이 묻어 난다. 오래토록 버리지 못하는 악습이다. 신앙인의 삶에 있어 악습과 버리지 못하는기득권적 아집은
죄이건만, 시지프스처럼 반복해서 드러나는 일들이 괴로움을 준다. 성(聖)과 속(俗) 어디서나 반복해서 짓는 죄는 무거운 죄다.
우린 세상을 살면서 지니고 사는 많은 것들중 반복하는 악습이 많다. 이런것들을 홀연하게 물리치고 털어내려면 각별한
조심을 갖어야 한다. 이런저런 사념들을 정리한 후 밖으로 나왔다.
마재를 거슬러 내려 강변으로 나아갔다. 젊은 날, 개인적으로 추억이 한움큼 있는 동네가 바로 마재다. 불현듯 그 추억이 살
아났다. 아주 작은 마굿간이 있었다. 그 공간이 너무 근사했다. 주변에 많았던 밤나무 숲 배경과 어울려 쉼공간으로 손색이
없었다. 조금 두툼한 수피(나무껍질)을 내외벽에 덧대고 바닥에 강자갈을 깔고 지붕에 너와지붕용 판재를 올렸다. 강쪽으론
넓은 유리창문을 내고.... 요즘식으로 표현한다면 마굿간의 리모델링이었다. 여름도 좋았지만 겨울이 더 근사했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밤 세상은 온통 눈과 얼음이었다. 강도 얼었다. 그 때 사방천지에 깔려 있던 밤껍질이 눈에 들었다.
부랴부랴 육중한 무쇠난로를 설치하고 밤껍질을 태우는 겨울밤, 열기와 향이주는 오붓함이 참 좋았었다. 발길에 눌려 사그락
거리며 내는 자갈 밟는 소리는 저 남쪽 바다 보길도 외송리 검은 자갈밭에 바닷물 들고 나는 소리처럼 맑았다. 랜턴불빛 밑에
앉아 넉없이 읽던 책의 내용도 좋았던 시절이 그 시절이었다. 알고 지냈던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마굿간을 그렇게 바꿔놓고
서로 시간이 허락할 때 마다 찿던 곳이었다. 꽁꽁 얼어 붙은 강 중앙에 해질녁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면 다가오는 삼각산의
홀연함은 장관이었다. 지금도 간혹 북한산 위문, 백운대, 인수봉에 오르면 습관처럼 마재방향을 바라 본다. 그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풍광 또한 수려하다. 길 옆으로 유리창문이 온실처럼 난 식당을 찾아 들었다. 이주완 에르니모형제님께서 싸들고
오신 도시락과 찬은 맛깔스럽고 보기 좋았다. 반주와 함께 점심을 나누며 걸음에 걸려있던 트레킹의 여독을 씻어내었다.
식사를 서둘러 끝낸 이국희 모니카 봉사자께서는 일행에서 물러나야 했다. 양재구역 모임이 오후5시에 있는 날이 바로
오늘, 참관하기 위해서다. 식당주인에게 부탁하여 승용차편으로 운길산역까지 배웅을 부탁 드렸다. 호쾌하게 승락해 주신
주인의 배려가 아름답다. 쉽지 않은 결정을 그는 바쁜와중에도 자신의 일처럼 도와 주신분을 통하여 깨달음이 전해 왔다.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역마의 성자를 보내주셨구나 하면서 차길로 나아가 큰봉사자를 배웅하고 주인에게 고마움을
다시 표현하고 들어 왔다. 식사를 끝낸 후 앵자산과 윗두미, 아랫두미가 보이는 강변에 서서 산수를 즐겼다. 그리고 단체
사진을 다함께... 이곳이 바로 나루가 있던 곳이다. 양근에서 윗두미에서 또는 한양에서 서로 왕래하며 일가의 연을 맺고
큰틀의 의미에서 식구라는 혈연의 인연으로 지고지순한 천주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고 자신의 삶을 고단하게 산
사람들이 바로 약현, 약현의 이씨부인, 황사영, 정난주, 약전, 약종, 부인 유소사, 하상, 정혜 약용, 이승훈, 이벽등등이었다.
강물에 비추는 산수의 음영속으로 오버랩되는 그분들의 모습이 삼삼하게 다가와 가슴을 스치고 다시 두미협으로 사라졌다.
강변으로 난 흙길을 돌고 돌아 능내역으로 갔다. 역 선로에 놓아둔 열차 한량이 쓸쓸한 추억을 재연한다.
모여 있을 때 웃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경직됨이 플어진 상태에서 전해 오는 자유로움이 낭만적이다. 홀가분함이 서로에게
묻어 나는 순간이다.
할머니와 손주 사이에 묻어나는 이별의 순간, 고향을 등지고 대처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하여 떠나 보내는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지는... 근사하고 사랑이 두움큼 담긴 영원한 짝꿍이신 아네스 자매님과 손주, 그 손주는 야고바 트레커들의 마스코트다.
운길산으로 가는 도중 잠시 쉬어가는 모습을 담아 보았다. 편안하신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념, 무상을
떠 올린다. 모든 이기심과 욕심을 털어낸 그 공간에 채운 자연의 형편과 소리와 바람 덕택이겠지 하고 혼자 중얼 거렸다.
마음이 편안하면 용모도 바로 그 편안함을 따르게 하는 것이 창조주의 섭리였다. 왜 그토록 가난과 겸손과 단순함의 영성이
소중한지 깨닫는다.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도 사람이고 상처를 줄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이다. 물건이 주는 기쁨과 상처는 금새
잃어버릴 수 있지만 사람을 통하여 받는 기쁨과 상처는 오랜 시간 사람에게 머물며 행복과 괴로움을 준다. 그래 친교는 사람이
살아 가는중에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큰 행복의 자산이다. 야고바의 형제적 친교는 더더욱 성숙되어야
한다. 소통을 통하여 친교를 나누며 평화의 빛을 함께 공유해야 하는것이 바로 프란치스칸적 삶이다. 이런 삶의 철학은 자신의
가정과 이웃에게도 깊이 있게 스며 있어야 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걸음을 재촉했다. 우측으로 보이는 두물머리
물길이 오늘 따라 고요하다. 한 마리의 물새가 허공을 가르다 풀섶에 내려 앉는다.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이래서 자연은
버릴 것이 없는 모양이다. 가득함(有爲)이 깃들면 스스로 덜어내(無爲)는 것이 자연이다. 온갖 상념으로 가득찬 자신의 마음을
자연 앞에서 내세우면 부끄러움이 앞서게 된다. 생각할 겨룰을 만들어 털어내야 겠다. 앞서가는 모습이 다정한 마음으로 스케치
된다. 종종걸음으로 길을 헤집으며 따라붙었다.
어두움이 내리기 전 귀가하기 위해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운길산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걸은 길, 총길이는 약
9.3km. 밝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신 야고바 트레커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불어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약용은 자신의 큰형님이신 약현께서 자신의 집에 수오제(守吾齊)란 이름을 짓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깁니다.
“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것이 없고, 오직 나[吾]만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는가.
밭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집은 지킬 것이 없다. 나의 정원의 꽃나무ㆍ과실나무 등 여러 나무
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혔다. 나의 책을 훔쳐 없애버릴 자가 있는가.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이
세상에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나의 옷과 식량을 도둑질하여 나를 군색하게 하겠는가. 천하의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의 곡식은 모두 내가 먹을 양식이다. 도둑이 비록 훔쳐간다 하더라도 한두 개에 불과할
것이니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런즉 천하의 만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유독 이른바 나[吾]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도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화가 겁을 주어도 떠나가며,
심금을 울리는 고운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빨을 한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그런데, 한 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나[吾] 같은 것이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약용께서 지은 수오재기의 일부분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바로 재속의 삶을 향기롭게 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사부께서 강조하신 가난, 겸손, 단순함 역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3월 성지 트레킹 화두로 남기고 싶어 올려봅니다. 언제나 평화를 나누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벌써 4월이 기다려집니다.
꾸~벅.